‘억압된 것의 회귀’로서의 미래(세계 공화국)

오래전 읽었던 책을 다시 손에 들었다. 재차 읽으니 낯설었던 저자의 생각이 상당부분 명확해 졌다. 일본인 저자가 너무 생경했기에 그의 주요 개념이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저자의 책 10여권이 벌써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음도 알게 되었다. 신학자인 필자에게 낯설었을 뿐 본 책은 헤겔과 마르크스 비판서로 이름을 떨친 명저였다. 헤겔 관념론을 뒤집어 생산양식으로 인류사를 이해한 마르크스를 아시아적 시각에서 비판했던 까닭이다.

이에 더해 주권 국가를 넘어 ‘세계 공화국’으로서의 인류 미래를 상상했으니 신학자로서 관심할 이유가 생겨났다. 이 글의 제목으로 내건 ‘억압된 것의 회귀’란 말은 본래 프로이드의 개념으로서 미래를 이해하는 저자의 독특한 방식을 적시한다. 미래란 역사발전과정에서 망각된 과거의 도래란 것이다.

오래된 과거의 고차원적 회복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이를 위해 저자는 단계적인 서구 역사철학(진보사관)을 비판했다. ‘생산양식’이 아니라 ‘교환양식’을 토대로 역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재조명하였다.

주지하듯 본 책의 제목은 『제국의 구조』이다. ‘제국의 원리’라 해도 적합할 듯싶다. 여기서 제국은 제국주의와 상극(相剋)적이다. 제국은 긍정적이나 제국주의는 부정적 평가를 받는다. 물론 교환양식에 입각할 때 가능한 설명이다.

제국주의는 근대(주권) 국가들 탄생 이후에 생겼으나 제국은 그 이전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존재했다고 저자는 보았다. 이는 생산양식으로 동양을 바라 본 마르크스와는 이질적이다. 제국이 긍정적인 이유는 그 속에 교환양식의 원형적 형태로서 호수(互受) 혹은 互惠性(호혜성, 증여와 답례)이 여전히 담지 된 탓이다.

하지만 근대이후 제국주의는 이를 탈각시켰다. 제국주의의 변형된 형태로서 신자유주의 체제가 이를 여실히 반증하지 않는가? 그렇기에 저자는 근대 이전의 ‘제국의 구조’(원리)에 관심한다. 제국주의를 초극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국’에서 보려는 것이다.

저자가 심리학 용어 ‘억압된 것의 회귀’란 말을 사용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물론 이 경우 의당 고차원적인 회복이어야 할 것이다. 저자의 결론인 ‘세계 공화국’은 자국민조차 수탈과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 신(新)제국주의, 곧 신자유주의와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잊혀 진 교환양식의 고차원적 회귀 속에서 가능할 수 있다.

본 책 첫 장에서 마르크스·헤겔 비판의 맹점을 파헤쳤다. 그 이전에 신자유주의를 헤겔을 좆아 역사의 종언이라 말한 후쿠야마 견해부터 비판한다. 현실에서는 여전히 역사의 끝을 말한 헤겔이 승자처럼 보이는 탓이다. 자본이 곧 국가이고 민족인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바로 목하 현실이지 않는가? 이를 넘어 설 수 없다면, 이 틀에 갇혀 살기를 작정한다면 역사는 당연히 끝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면 이 틀을 깨야만 한다. 마르크스는 헤겔 사유를 역전시켰으나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의식이 존재를 규정치 않고 생산양식(유물론)이 의식을 규정한다고 보았던 것은 절반만의 진리였다. 이는 일종의 경제결정론으로서 국가나 민족의 자율성을 예견치 못한 결과였다. 마르크스 운동이 민족(독일) 파시즘에 패배한 것이 구체적 실례이다.

국가나 민족이 생산양식의 변화로 소멸치 않은 것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이를 상부구조로 보는 것 역시 마르크스 입장에선 용납키 어려운 일이었다. 저자는 이것을 마르크스의 자기모순이라 일컬었고 그 뿌리를 생산양식론에서 찾았다. 생산수단의 소유여하에 따라 생산양식을 규정하는 입장만으로 사회 구성체로서의 자본제 경제를 충족히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주지하듯 자본주의는 관념적 상부구조인 ‘신용’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상품교환을 넘어 원초적 교환양식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원시시대부터 존재했던 교환양식과 그 변천과정의 탐구를 통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미래를 보고자 한 것이다.

저자는 교환양식을 네 형태로 소개하였다. 원시 부족시대의 ‘증여와 답례’(互惠), 근대 국가시대의 ‘지배(약탈)와 보호’(재분배), 오늘날 자본체제 하에서의 ‘상품교환’ 그리고 미래적 형태로서 원시적 호혜성의 고차원적 회복을 뜻하는 ‘세계 공화국’이 그것이다. 여기서 제국은 약탈과 재분배가 일어났던 두 번째 단계를 일컫는 것으로서 세계가 곧 경제가 되는 셋째 단계, 즉 제국주의와 구별된다.

앞서 말했듯이 제국은 시기적으로 근대 주권국가의 탄생 이전이다. 자본이 아니라 국가가 우선시 되는 상태라 할 것이다. 여기서는 아직 복종(약탈)과 보호(재분배)라는 교환양식이 살아있다. 국가는 본질적으로 이런 교환양식 하에 존재했다.

하지만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 잉여가치가 축적되면서 국가를 변화시켰다. 노동력 착취를 통해 원형적 호혜성은 물론 국가에 잔존하던 교환양식 자체를 온전히 해체시켰던 까닭이다. 세계자본시장에 편입된 국가가 자국민마저 보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헤겔과 후쿠야마는 이 단계를 역사의 끝이라 했으나 이것이 마지막일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확신이다. 역사 속에 잔존한 원초적 교환양식(互惠性)을 고차원적으로 회복시킬 책무를 환기시키고자 했다. 인류가 탄생시킨 보편종교 속에 이런 미래가 예시되었기에 종교는 결코 상부구조나 환상(상상)일 수 없다고 했다.

다시 말해 교환양식으로 역사를 볼 때 종교는 마르크스의 경우처럼 부정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신학 집단에 속한 우리들처럼 종교에 희망을 두지는 않았다. 호혜적 교환양식을 실현시키는 새로운 체제를 칸트(영구평화론)나 라이프니찌(모나드론)의 경우처럼 인간 보편이성에서 찾고자 하였다.

인류의 역사는 이런 몇 가지 형태의 교환양식으로 사회를 구성해왔다. 국가이전 씨족사회에서 ‘증여와 답례’의 양식이, 봉건 국가사회에선 ‘지배와 보호’가 그리고 근대 자본세계는 잉여추구를 목적하는 ‘상품교환’이 지배적 가치였던 것이다. 생산양식으로 역사를 분류한 마르크스에겐 과거는 극복의 대상이었으나 저자의 경우 ‘원초적 호혜양식’은 이후 역사로부터 억압당했으나 회귀될 만큼 미래적 의미를 갖는다.

물론 마르크스에게 있어서도 미래역사는 공산주의였다. 하지만 여기서 마르크스를 칸트와 헤겔 사이에서 이해할 필요가 충분히 있다. 칸트에게 미래적 이념은 가상(상상)이었으나 헤겔은 현실을 이념의 실현으로 본 까닭이다. 헤겔을 유물론적으로 전도(顚倒)시킨 마르크스는 현재가 끝이란 사고를 부정했다. 공산주의가 미래적 가치였던 까닭이다.

하지만 동시에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를 현실의 운동, 곧 그 운동을 실현시키는 전제라 여겼다. 공산주의를 칸트의 경우처럼 이념으로 치부하지 않은 것이다. 공산주의란 이념(이상)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지양되는 현실에서 필연적으로 생기(生起)한다 본 탓이다. 한마디로 기독교의 종말론처럼 미래(공산주의)의 선취를 전제했다. 역사의 ‘끝’을 역사 이전(史前)에 보는 것(블로흐), 그것이 바로 마르크스 유물론이었다.

바로 여기에 마르크스의 자기모순이 드러난다. 생산양식에 근거한 유물론적 관점을 취하면서 실제로는 목적론적 관념론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역사의 마지막을 선취하여 필연성이란 관념을 빌어 강제하는 정치체제가 이로부터 비롯했다. 마르크스운동이 나찌(파시즘)에 패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 찾았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등장도 이런 반성에서 비롯했다. 상부구조의 자립성을 방해한 경제결정론에 대한 반성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경제적 토대가 다시 경시되고 말았다. 상부구조(프로이트 정신분석)에 대한 지나친 의존 탓이다. 이들과 달리 저자는 교환양식의 관점에서 마르크스의 모순(한계)을 보았다. 상부구조의 요청 없이도 교환양식만으로 상하구조를 회통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최초의 역사가 호혜성(증여와 답례)에 근거했던 탓이다.

교환양식의 관점에선 처음부터 도덕과 경제의 두 차원이 나뉘지 않았다. 상호 채무의식(죄의식)이 교환양식의 본질인 탓이다. 여기서는 종교와 도덕이 자연스레 경제적 토대가 될 수 있었다. 비록 이런 채무의식이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이르러 억압, 실종되었으나 이의 고차원적 회복을 인류의 미래로 여길 일이다.

여기서 저자는 역사 속 종교들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원초적 호혜성의 구조를 담지 한 최후의 역사적 형태이기에 항차 고차원적 회복의 주체가 되길 바란 것이다. 하지만 이 땅의 종교들이 이런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緣木求魚가 아닐까 싶다. 눈 부릅뜨고 자신을 크게 성찰할 일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이런 고차원적 회복을 인간 역사의 보편성에서 기대한다. 프로이트가 말한 ‘억압된 것의 회귀’란 개념을 통해서 말이다. 이 말은 본래 프로이드의 『모세와 일신교』라는 책에서 처음 선보였다. 모세가 고백한 ‘야훼’ 하느님을 한번 살해당한 이후, 줄곧 억압당했으나 강제적 형태로 회귀된 존재라 본 것이다. 사막지역에서 생존하던 유목민의 하느님이 농경(정주)문화에서 죽었으나 그 속에서 유목시대의 하느님을 고차원적으로 다시 회복시켰다고 했다.

새로운 정주문화 속에서 과거는 관습이나 향수의 대상으로 머물 공산이 크다. 하지만 일상에 반(反)하는 강박적 의식의 출현했는데, 그것이 바로 모세의 하느님(야훼)이었다. 단독성과 평등성을 중시한 유목시대의 윤리의식이 고차원적으로 복원된 것이다.

이로써 저자는 우리 시대의 ‘억압된 것의 회귀’를 말한다. 그것은 교환양식의 역사적 첫 형태인 ‘호혜’ 원리를 고차원적으로 회복시키는 일이다. 봉건제를 거쳐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살해되었으나 이들에 반하여 새롭게 출현할 수 있다고 저자는 확신했다. 아직 그 형태를 가늠할 수 없으나 방향성만큼은 분명한 새로운 체제는 보편종교의 차원을 넘어 세계 공화국 형태로 가시화될 것이다. 과거의 고차원적 회복, 그것은 동시에 의식되지 않은 미래로부터 도래하는 것이기도 하다.

본 책 『제국의 원리』 중반부에서 저자는 ‘지배와 보호’의 교환양식을 지닌 국가의 탄생과 상품교환에 의존한 자본주의 성립과정을 밝힌다. 이어서 전자를 ‘제국“의 차원에서 후자를 ’제국주의‘의 시각에서 대별하여 설명한다. 여기서 제국주의는 본 책제목인 ’제국‘의 원리를 폐기처분하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체제까지를 일컫는다. 반면 저자가 말하는 ’제국‘은 교환양식의 첫 형태인 ’호혜‘의 원리가 아직 잔존하는 형태라 할 것이다.

▲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からたにこうじん) 1941년 8월 6일 ~ )은 일본의 문예평론가이자 사상가로 1969년 소세키 론으로 '군조오(郡像)' 신인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78년에는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으로 가메이 가쯔 이찌로 상을 수상했다. 도쿄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 영 문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호세이 대학교, 킨키대학교에서 교수를, 예일대학교, 콜롬비아대학교 등에서 객원 교수를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정본 가라타니 고진집>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 <은유로서의 건축>, <트랜스크리틱>, <역사와 반복>, <네이션과 미학 >이 있으며 그 외에 <언어와 비극>, <근대문학의 종언>, <세계공화국으로>, <정치를 말하다>, <세계사의 구조>, <철학의 기원>, <자연과 인간> 등 다수가 있다. ⓒGetty Image

따라서 본 책 『제국의 원리』는 교환양식의 변화 차원에서 동서양 역사를 읽어 나간다. 이 책의 논리에 의하면 인류가 정주하기 시작하면서 호수(互受) 혹은 호혜적 교환양식이 생겨났다. 정주를 통해 축적이 가능한 씨족사회가 다른 씨족과의 교역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증여와 답례의 교환양식이란 것이다. 이 경우 교환은 전쟁(약탈)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동시에 증여의 힘은 부(富)와 권력의 집중을 억제시켜 국가형성을 방해한다. 평등에 우선가치를 두는 탓이다.

여기서 저자는 이런 씨족사회를 국가를 능가하는 사회시스템이라 했다. 인류의 미래는 바로 이런 시스템을 고차원적으로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씨족사회가 개인자유를 희생시키는 국가형성을 억제했던 근거를 프로이드의 원부(原父)살해에서 찾았다. 여기서 원부는 국가와 계급을 상징하는 바, 정주이전 상태인 수렵채집 시대의 자유(이동성)로 회귀하려는 죽음충동(Todestrieb)이 강박되었다는 것이다.

정주문화가 놓친 이동성(자유)을 위한 강박관념의 반복적 회귀, 이것이 바로 국가형성이 억제된 이유였다. 목하 국가와 자본, 그를 넘어서는 길 역시 강박적으로 도래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여기서 호수(互受)원리의 고차원적 회복이 자유의 상호성을 뜻한다고 봐도 좋겠다.

하지만 역사는 약탈(정복)과 재분배(보호)의 교환양식을 추동한 국가를 성립시켰다. 동서양 곳곳서 다발적으로 ‘국가’들이 생성된 것이다. 홉스 같은 사상가는 이를 계약-공포에 의한 강요된 계약이라 부른 바 있다. 하지만 국가란 제도 속에도 호수원리가 온전히 실종되지 않았다. 약탈과 동시에 보호(재분배)하는 새로운 형태의 교환양식을 야기 시킨 탓이다. 물론 국가가 이런 교환 양식을 독점했음에도 말이다.

이런 국가들을 묶어 통치하는 제국 역시 호수(호혜)성 원리에 근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국의 틀 속에서 교역이 활성화되었고 상호간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제국에는 간(間)공동체 원리가 존재했다. 제국 내에 국제법이 통용되었고 세계종교를 갖고 있었으며 상호 소통가능한 문자언어가 공유되었다. 마르크스는 이런 제국을 전제(노예제)국가라고 부정적으로 보았으나 저자는 이것의 긍정적 측면을 부각시켰다. 마르크스가 아시아를 노예제라 칭한 것과 대조된다.

저자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제국과 제국주의를 대별했다. 하지만 제국주의보다는 ‘제국’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후자가 지배와 보호의 양가(교환)적 특성을 지녔다면 전자는 원초적 교환양식(호혜성)을 폐기시키는 교환양식인 까닭이다. 전자는 자본을 앞세운 상품교환 체제로서 일체를 경제로 환원시키는 세계시스템을 적시한다.

그렇기에 세계/제국의 관계는 세계를 경제로 보는 시각과 다를 수밖에 없다. 경제를 우위에 둔 세계시스템 하에서 제국이 존재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부언하지만 제국은 지배와 보호라는 교환양식을 통해 국가들을 통합하는 체계라는 것이다. 여기선 자국의 관습이나 종교도 존중되었다. 보편종교가 제국의 토양에서 생겨난 것도 우연일 수 없다.

이하 내용(본 책 4-5장)에서 저자는 동아시아와 유럽에서의 제국의 형성 및 발전 과정을 상세히 소개했다. 필자 보기에 여기서 다음 두 사안이 핵심이다. 아시아를 역사 이전의 단계로 보는 헤겔-마르크스 류의 차별적 진보사관을 수정코자 했으며 나아가 제국주의의 폐해를 넘어설 근거를 제시코자 한 것이다. 다시 말해 동서양에 제국이 동시적으로 존립했었고 공통된 제국의 원리를 갖고서 제국주의 ‘이후’의 세계를 상상코자 했던 것이다. 중요한 부분이라 많이 아쉽지만 지면 관계상 이 부분을 생략해야겠다.

본 책 『제국의 원리』 후반부(6장)에는 ‘제국과 세계 공화국’을 다뤘다. 제국의 원리를 통해 자본(화폐)제국주의를 초극할 새로운 미래를 제시할 목적에서이다. 저자는 유럽에서 세계/경제 시스템이 생겨난 것에 주목했다. 이는 근대이후 유럽에서 주권국가가 생겼던 결과이다. 이는 제국이 유럽에서 덜 발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르크스와는 아주 다른 생각이다.

오히려 저자에게 로마교회가 제국의 흔적을 간직한 보고(寶庫)처럼 여겨졌다. 어거스틴 이래로 신국(神國)사상 속에서 제국의 원리가 잔존해 있다는 것이다. 여하튼 주권국가의 등장은 제국주의로 나가는 발판이 되었다. 유럽의 주권국가 관념이 식민지 지배를 가능케 했던 탓이다. 1919년 3.1 운동 당시 희망으로 여겼던 민족자결주의란 서구이론 또한 일차적으로 제국으로부터 일탈을 촉구했으나 실상은 주권국가들에 의한 정복을 정당화시킨 논거였다.

자본에 맹종한 세계/경제의 시스템 속에서는 제국이 아닌 헤게모니국가가 탄생된다. 물론 중심축(軸)은 이동될 수 있겠으나 이런 국가(헤게몬)는 반복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목하 상황은 달라졌다. 세계 자본주의의 종언이 언급되고 있는 까닭이다. 자연이 가난해졌고 인간이 무너지고 있으며 기술혁신에 대한 비관이 바로 그 이유이다. 이런 조건들이 자본의 무한증식을 힘겹게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따라서 저자는 ‘억압된 것의 강박적 회귀’로서 원초적 교환양식 체제를 재론한다. 물론 거듭 말했듯이 그 고차원적 회복의 상태로서 세계 공화국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전에 존재했던 국제연맹, 그리고 지금의 국제연합이 대국(大國)의 지배를 받아 경시되곤 있으나 다시 시도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저자는 칸트의 『영구평화를 위하여』라는 책을 다시 주목했다. 헤겔에 의해 순진무구하다 비판되었지만 이 주장은 폄하될 이유가 없다. 자연이 평화롭지 않고 상호 투쟁적인 상황인 것은 주지하는 바다.

그렇지만 헤겔과 달리 칸트는 유럽에서 태동한 세계/경제 시스템과는 다른 형태의 세계를 지속적으로 상상했다. ‘세계 공화국’이란 이념이 바로 그것이다. 국가들의 자율성을 유지한 채로 국가 간의 자연(전쟁)상태)를 서서히 해소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한반도내 분단체제 극복을 위해서도 거듭 성찰할 주제라 하겠다.

칸트의 이런 생각이 중국철학에서 영향 받은 라이프니츠(모나드론)에게서 비롯했다고 저자는 믿었다. 하나의 신(神)을 다수의 모나드가 각기 서로의 관점에서 표현한다는 모나드론에 바탕하여 칸트는 향토애와 세계시민주의를 조화(양립)시켰다. 이처럼 세계 공화국은 다수의 향토, 종교, 언어를 허용하는 제국의 고차원적 회복이었다.

원초적 교환양식인 호수(호혜)원리를 ‘오래된 미래’ 삼아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주권국가(네셔날리즘)마저 넘어서는 길일 수 있겠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는 기독교의 신국(神國)사상과도 무관치 않다. 이 땅위에 이웃사랑을 통해 신(神)이 지속적으로 침투하는 상태, 그것이 바로 세계 공화국의 이념과 잇대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는 물론 저자 역시도 현실 기독교(神)에 희망을 두자 않았다. 오히려 자연의 간지(奸智)를 믿고 있다. “인간의 역사를 전체로서 고찰하면 자연이 자신의 은밀한 계획을 수행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자연은 보편이성이라 달리 불러도 좋을 듯하다. 하지만 저자는 다시 교환양식의 관점으로 세계 공화국을 비틀어 독해했다.

마르크스 전공자인 일본인 저자에게 기독교적 신(神)이나 칸트적 보편이성 보다는 교환양식이란 시각이 중요했던 것이다. 국가에 입각한 제국이나 자본에 맹종한 제국주의를 넘어선 세계 공화국을 교환양식의 전환을 통해 설명코자 한 것이다. 원초적 교환양식(互受原理)의 고차원적 회복으로서의 세계 공화국.

저자는 이것이 우리들 인간사(人間事) 속에 강박적인 것으로 도래할 것을 믿고 있다. 이것은 지배와 보호는 물론 상품교환의 차원을 훌쩍 넘어선다. 타자를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자유의 상호성’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이를 과거의 회복형태로서가 아니라 미래로부터 도래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런 교환양식이 역사적으로 보편종교의 형식으로 나타났으나 저자는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소질로 이해한다. 앞선 프로이드의 말, ‘억압된 것의 회귀’란 개념에 의지해서 말이다. 역사 속에서 생기된 계급, 국가, 가부장제 등 그런 가치를 다시 살해하는 강박적 의무를 인간에게 부여했다는 것이다. 증여의 힘, 그것이 원부(原父)살해이자 죽음의 충동이고 초자아의 길인 셈이다.

하지만 저자와 달리 필자는 순수증여를 성령의 활동이라 말하고 싶다. 움켜쥔 손을 펼치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지를 알기 때문이다. 저자는 프로이드 심리학을 칸트적으로 수용, 재구성하여 이런 강박을 사회적 규범에 저항하는 자율성(자유)으로 설명했으나 신학자로서 동의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다시 전통적 방식으로 신(神)을 호명하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사실 이 지점에서부터 신학적 논의가 출발해야 할 것이다. 여하튼 교환양식으로 풀어 낸 저자의 미래, 곧 세계 공화국은 신학적으로 논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10.

그럼에도 다시 묻는다. 순수 증여가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교환양식체제가 미래에 가능할 것인가? 더욱 우리들 의식(의지)에 반(反)해 ‘억압된 것의 강박적 회귀’의 형태로 우리들 미래를 담보할 수 있을지를 치열하게 묻고 싶다.

저자는 이런 미래가 단순히 이념일 수 없다고 했다. 역사 안에서 사회적 규범에 저항하는 자율성의 실현이라 본 탓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을 자연의 간지(奸智)라 했고 자연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정말 그 핵심이 사랑일 수밖에 없는 증여의 힘이 이런 식으로 발현될 수 있을까?

자본 제국주의를 폐할 수 있는 새로운 교환양식의 도래, 그것은 하느님 나라를 일컫는 ‘체제 밖’ 사유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지하듯 하느님 나라는 체제 밖 사유를 체제 속에서 이루라는 예수의 명령이었다. 늦게 일하러 온 자에게도 동일 품삯을 주라 했으며,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 초대하여 먹이라 했던 예수, 그것을 하느님 나라라 가르쳤던 예수의 이야기가 마르크스주의자인 저자의 확신보다 더 필자를 더욱 잘 설득한다.

증여의 힘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계체제, 곧 세계 공화국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느님 나라’의 다른 이름일 수밖에 없다. 우리들 의지를 반(反)하는 하느님 靈의 역사(役事), 곧 불고 싶은 대로 부는 하느님 영의 활동만이 이런 세계를 재창조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전통 신학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는 노릇, 여기서 성령은 위로부터 받아 할 것을 지닌 인간 본성, 곧 바탈(얼)과 뜻이 같다고 믿는다.

없이 계신 하느님과 하나 되는 인간 삶, 곧 빈탕한데 맞혀 놀고자 제 뜻 버려 하늘 뜻 구하는(無爲而無不爲) 사람들이 새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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