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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파리로 충분하다허무를 허무는 이야기 | 『등대로』
박만희(함께.걷는.교회, 평화교회연구소) | 승인 2018.12.28 19:35
“평화교회연구소는 평화로운 세상, 올바른 믿음의 교회를 꿈꾸며 부흥과 성장보다 평화, 생명, 정의의 가치가 실현되는 21세기 새로운 한국교회를 상상합니다!” 모토 아래 건강한 한국교회를 상상하는 평화교회연구소가 매달 발행하는 “웹진 평:상”의 글들을 에큐메니안에 게재합니다. 글의 게재를 허락해 주신 평화교회연구소 소장님과 연구소 소속 모든 연구원들과 웹진 기고자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보다 작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큰 이야기들에 치이고 밀려나 하찮게 취급당하던 이파리 같은 이야기들이 이제는 듣고 싶다. 국가가 은폐해 온 비밀, 고위층 인사가 저지른 비리, 늘 외면당하면서도 곧잘 이용당하는 정의 등 여전히 잘 팔리는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들 뒤로 밀려나 회색처리 되어 빛깔을 잃어버린 작은 이야기들 말이다.

때로 큰 이야기들은 자신만이 전부인 듯 군다. 전 우주의 행복이 자신들에게만 달려있기라도 한 것 마냥 자신만만하다. 그들은 뻣뻣하게 고개를 세우고 폭군이 되어 작은 이야기들을 가둔다.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듯이 작은 이야기들을 은폐한다.

누가 그들을 폭군으로 만들었는가. 말하고 쓴 이들이다. 듣고 읽는 사람들이다. 모두에게 혐의가 있다. 그들은 큰 이야기에 열광하고 그것을 소비한다. 큰 이야기는 우상이 되어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작은 이야기는 이단이 되어 어둠 속으로 숨는다. 문학은 그렇게 이단 판결을 받은 작은 이야기들의 오명을 벗겨내고 그들에게 빛을 비춘다. 등대처럼. 그 빛은 작은 이야기들에 가 닿을까.

『등대로』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전적 소설로, 램지 가족과 그의 손님들이 작은 섬에서 휴가를 보내며 겪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겪은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소설엔 이렇다 할 줄거리가 없다. 섬이라는 밀폐된 공간이 흔히 주는 스펙터클이나 긴장감이 『등대로』에는 없다. 아무런 사건도, 작은 긴장감도 『등대로』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의식의 흐름’만이 있을 뿐이다.

『등대로』는 3부로 구성 되어있다. 1부는 등대로 소풍을 가려는 램지 가족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합리적이고 냉철한 아빠 램지는 소풍 전날 밤 궂은 날씨를 보고 내일 계획은 취소될 거라고, 등대에 갈 마음에 들뜬 아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인물이다.

“램지 씨의 말은 옳았다. 그의 말은 어제나 옳았다. 그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느 누구(특히 자기 자식들)의 기쁨이나 편의를 봐주려고 사실을 임의대로 고치지도 않았고 불쾌한 말을 바꾸지도 않았다.”(10)

램지는 근대를 대표하는 합리주의자이며 명망 높은 철학자이면서도, 자신의 업적이 영원하지 않을까봐 불안해하며 끊임없이 아내를 비롯한 여성에게 공감을 요구하는 유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 그러나 아니었다. 어떻게 해도 램지씨는 꼼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거기에 서서 공감을 요구하고 있었다.”(62)

반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램지 부인은 모든 빈 곳을 채우는 존재다. 그녀는 남편 램지의 정확하면서도 날카로운 말에 상처받은 아들 제임스를 어루만지면서도, 언제나 공감을 바라는 남편을 한결 같이 채워주는 인물이다.

“실로 그녀는 모든 남성을 보호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이유 때문에, 어쩌면 그들의 기사도 정신과 용기 때문에, 그들이 조약을 협상하고 인도를 통치하고 재정을 관리하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자신을 대하는 태도 때문에 그리했다.”(13)

그녀는 ‘램지 부인’으로서의 완벽한 역할 때문에 모두에게 찬사를 받으면서도, 언제나 타인의 파편으로만 존재한다. 소설 내내 그녀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램지 부인으로만 호명될 뿐이다. 램지 부인으로 그녀는 누구보다도 또렷하게 존재하지만, 그녀 자신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빈 곳을 채워 안정과 평화를 만들어 내는 자기 존재에 허영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부재에는 끝 모를 허무를 느낀다. 소설은 그 간극을 그린다.

“그녀가 여자였기에, 하루 종일 사람들은 으레 이러저러한 문제로 그녀를 찾았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원했고, 다른 사람은 저것을 원했다. 아이들은 자라고 있었고, 그녀는 종종 자신이 사람들의 감정에 흠뻑 젖은 스펀지일 뿐이라고 느끼기도 했다.”(55)

“그렇게 감싸 주고 보호해 줄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그녀에게는 스스로를 알아볼 수 있는 겉껍데기조차 남지 않았다.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었고, 다 써 버렸다. 어머니의 무릎 사이에서 뻣뻣하게 서 있던 제임스는 그녀가 이파리들과 춤추는 나뭇가지들이 너울거리고 장밋빛 꽃이 만발한 과일나무로 우뚝 솟는 것을 느꼈고, 그 아버지, 자기중심적인 남자의 메마른 언월도, 놋쇠 부리가 공감을 요구하며 그 나무에 파고들어 찔러 대는 것을 보았다.”(64)

『등대로』 1부는 램지 부인을 중심으로, 남편 램지와 손님들의 성격을 드러낸다. 그것을 통해 소설은 램지 부인과 남편 램지로 대표되는 인물들의 성격을 여남(女男)으로 대비하여 보여준다. 특이하게도 소설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1부 내내 사건은커녕 시간의 흐름조차도 눈에 띠지 않는다. 잠깐의 산책과 저녁 식탁에서 오고가는 대화가 전부다.

2부 역시 독특하다. 2부는 1,3부를 연결하는 다리로 10년의 시간을 묘사한다. 그 사이 1차 세계대전이 있었고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램지 부인이 이룩한 평화로 충만했던 집은 텅 비었고 폐허가 되었다.

“그리하여 등불이 모두 꺼졌고, 달이 졌고, 가느다란 빗줄기가 지붕을 톡톡 두드리면서 거대한 암흑이 억수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무엇도 밀려 들어와 넘쳐흐르는 어둠을 견디고 살아남을 수 없을 듯했다. 어둠은 열쇠 구멍과 갈라진 틈새로 살금살금 기어들고, 몰래 창문 블라인드를 돌아서 침실로 들어가고, 여기서 주전자와 물동이를 삼켜 버리고, 저기 붉고 노란 달리아 수반을 삼키고, 거기에서는 서랍장의 날카로운 모서리들과 단단한 몸체를 삼켜 버렸다.”(203)

2부는 폐허에 관한 산문시이다. 퇴락과 부패가 빈 집을 장악했고, 황폐해져버린 그 공간은 전쟁으로 파괴된 세계를 담아낸다. 버지니아 울프는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통해 무참히 부서진 세계를 그려낸다. 돌이킬 수 없는 황폐를 아름다운 언어로 묘사한다. 2부는 시(詩)에 가까운 언어로 공간의 퇴락과 시간의 흐름을 묘사한다.

그 뿐 아니다. 무엇보다 독자를 당황하게 하는 것은 램지 부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램지 부인의 죽음을 괄호 안에 넣는다.

“(램지 씨는 어느 어둑한 날 아침에 비틀거리며 복도를 따라 걷다가 양팔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가 팔을 내민 전날 밤에 램지 부인이 다소 갑작스레 죽었기에, 그의 팔은 텅 빈 채로 남고 말았다.)”(208)

왜 죽었을까? 어쩌다가 죽었을까? 소설은 이유를 언급하지 않는다. 병 때문인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건지. 그게 아니라면 전쟁이 목숨을 앗아간 것인지 소설은 밝히지 않는다. 이미 충분히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쏟아냈고, 그래서 소멸한 것이다.

“그 즉시 램지 부인은 꽃잎 하나가 다른 꽃잎 속에 포개지듯 온몸이 접히는 것 같았다. 기진맥진하여 무너져 내리면서 그녀는 극도의 피로감에 절묘하게 몸을 내맡겼고, 그림 형제의 동화책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일 힘밖에 남지 않았다. 그동안 창조를 이루어 냈다는 황홀감이, 완전히 늘어났다가 이내 부드럽게 멈춘 스프링의 진동처럼 그녀의 몸속에서 고동치며 지나갔다.”(65)

“그렇게 감싸 주고 보호해 줄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그녀에게는 스스로를 알아볼 수 있는 겉껍데기조차 남지 않았다.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었고, 다 써 버렸다.”(64)

램지 부인 뿐 아니다. 램지를 이어 학자가 될 줄 알았던 아들 앤드류는 전쟁터에서 죽었고, 가장 예뻤던 딸 프루는 출산 중에 사망했다. 이 모든 죽음은 괄호로 처리되고, 소설은 반복해서 말한다.

“우리는 각자 홀로 죽어갔지”(312)

램지 부인의 죽음은 영원할 것만 같았던 평화를 폐허로 바꾸어 놓았다. 부조리한 전쟁은 합리적인 아들을 죽게 했고, 가족, 사랑, 희생 따위의 말이 떠오르게 하는 출산은 '여전히' 한 여성의 목숨을 앗아갔다. 죽음은 갑작스러웠고, 건조했으며, 계속되었다.

3부는 10년 후 다시 섬을 찾은 램지 가족과 손님들을 다시 비춘다. 늙은 램지는 죽은 아내를 기리기 위해 아들 제임스와 딸 캠을 억지로 데리고 등대로 향한다. 완벽한 엄마를 잃은 남매는 침묵으로 아버지 램지에게 저항하기로 결의한다. 과거의 램지 부인처럼 아버지의 결핍을 채워주지 않겠다는 조약을 맺는다.

섬에서는 한 시선이 램지 가족이 탄 배를 좇는다. 그 시선은 ‘노처녀’ 릴리의 것으로, 그녀는 램지 부인을 존경하면서도 그녀의 허위를 꿰뚫어 본 인물이다. 릴리는 『등대로』속에서 모든 상황을 꿰뚫는 관찰자이며, 버지니아 울프 자신이다. 소설 속 릴리는 한 여성으로써 램지 부인의 역할을 대신 해줄 것을 램지에게 요구받지만, 그것을 거부하고 섬에 남아 멀어져 가는 그들을 지켜본다.

시선 하나가 더 있다. 아버지 램지를 끝까지 외면하도록 압박을 가하는 오빠 제임스와 여전히 어린 딸에게 공감을 요구하는 아빠 램지 사이에 끼어 갈등하는 캠의 시선이다. 캠은 두 남성의 막강한 요구 사이에서 멀어지는 섬을 바라본다. 이렇게 릴리와 캠, 두 여성의 시선이 멀어지는 배와 섬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앞으로 어떤 삶을 선택하게 될까. 캠과 릴리는 램지 부인의 겪었던 삶의 괴리를 극복할 수 있을까.

“남동생은 더할 나위 없는 신 같았고, 아버지는 더없이 간절하게 애원하고 있었다.”(274)

솔직히 말하자. 『등대로』는 어렵고 지루하다. (다른 고전에 비해서도 그렇다.) 손에 잡히는 이야기가 없다는 게 큰 이유겠지만, 무엇보다 버지니아 울프의 글쓰기 자체가 낯설다. 처음 『등대로』를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읽고 있는 문장이 어떤 인물의 말인지, 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 중인지, 생각 중인지를 쉽게 알아챌 수 없다.

게다가 소설 속 시간은 잘 흐르지도 않는다. 저자는 찰나를 붙잡아 그 장면에 있는 인물들의 의식을 두서없이 늘어놓는다. 때문에 책은 독자들의 인내를 요구한다. 이쯤 되면, 『등대로』는 실패한 작품이 아닐까. 이토록 어렵고 지루한 소설이 왜 여태껏 남아 있는 걸까.

버지니아 울프는 도리어 묻는다. 왜 그래야 하는가. 사건은 반드시 있어야 하며, 글은 논리적이어야만 하는가. 인물 간 대화는 선명하게 구분돼야 하며, 의식(意識)과 대화는 반드시 나뉘어야 하는가. 그것만이 ‘진실’(그게 무엇이건)을 드러내는 단 하나의 길인가. 세계는 과연 합리적이며 이성적인가.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전쟁이 세상을 뒤덮고, 그로 인해 무의미하고 부조리한 죽음이 무심하게 개인을 살해하는 마당에 무슨 권리로 저자에게 합리를 요구하는가. 남성적인 근대 이성, 합리가 가져온 폐허를 우리는 어떻게 지나가야 하는가.

버지니아 울프는 다른 길을 택한다. 다른 글쓰기를 택한다. 재미있고 그럴싸한 줄거리가 있으며 선이 굵은 이야기가 아니라, 그림을 그리듯 글을 쓴다. 순간을 기록한 그림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는 듯이. 저자는 ‘남성’이 말하는 합리적이고 보다 우선해야 할 세계가 아니라, 그들이 바라보라고 아우성치는 방향이 아니라, 그들 뒤에 있는 것들을 기록한다. 그들과 근대의 뒷모습,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여성의 의식을 그린다. 사건이 아닌 식탁, 그곳에서 저자가 꿰뚫어 본 인간, 여성과 남성 관계에서 드러나는 우스꽝스러움과 권태를 아름다운 그림 한편에 담는다.

그(녀)가 그린 일관성 없는 여러 부조리한 장면들이야 말로 진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저자는 그들의 방식이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로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등대로』는 어렵고 지루하다는 이유로 내던져 버릴 이야기가 아니다. 없는 이야기가 아니니 말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새로운 글과 형식으로 숨겨진 세계를 드러내려고 한다. 잘난 남성들이 보기엔 이파리처럼 보여도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안에 전부가 있다.

『자기만의 방』으로 이름 높은 버지니아 울프는 흔히 여성주의 작가로 불린다. 공정한 평가일까? 물론 그(녀)는 여성과 남성을 이분법적으로 대비시켰고, 우스꽝스러운 남성의 모습을 비웃었으며, 은폐되어 있던 여성의 삶을 드러냈다. 하지만 셀 수도 없이 여성을 인간 남성에 대비되는 자리에 놓고 때로는 비인간적인 창녀와 성녀로, 때로는 어리석고 우둔한 존재로 그려온 남성 작가들의 작품을 남성주의 문학이라고 하지 않듯,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 역시 문학 그 자체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드러나지 않았던 이파리 같은 삶을 자신만의 글쓰기로 드러내고, 거기에도 인간 실존의 자리가 있음을 드러낸 '작가'로 말이다.

“내가 원하는 건 일상적 경험의 차원에서 이건 의자고 저건 식탁일 뿐이라고 느끼는 동시에 이건 기적이고 저건 희열이라고 느끼는 거야.”(328)

박만희(함께.걷는.교회, 평화교회연구소)  peacechurch20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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