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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브루그만의 『복음전파에 대한 성서적 전망』세 가지 미완성의 장면들 속에서의 복음전파 (1)
최성일 교수(한신대 신학부/선교신학) | 승인 2018.12.28 19:47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가장 영향력 있는 구약성서신학 중 한 명은 미국의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 교수라는 사실은 논쟁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브루그만 교수는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박사학위(Th. D.), 세인트루이스 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이든 신학교에서 교수와 학장으로 섬겼고, 1986년부터 2000년 은퇴할 때까지 컬럼비아 신학교에서 구약신학을 가르쳤다. 현재 컬럼비아 신학교의 구약학 명예교수이자 United Church of Christ 교단의 목회자이기도 한 그는, 풍부한 정서와 견고한 학문, 정의와 구속에 대한 열정이 어우러진 탁월한 학문 활동을 통해 구약성경 이해의 새로운 틀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이러한 탁월한 구약신학자가 복음전파에 대한 책 『Biblical Perspective on Evangelism』을 1993년 Abingdon 출판사에서 출판했다. 또한 이 책은 한신대학교 신학부 선교신학 최성일 교수님에 의해 『복음전파에 대한 성서적 전망』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2006년 한신대학교 출판부에서 출판했다. 성서적이고 통찰력으로 가득한 이 책은 세월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게감 있는 책이다.
이 책의 번역본을 전해주시며 최성일 교수님은 “이 책 4장은 여전히 한국교회에 유용해요. 잘 소개되었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선뜻 번역본의 게재를 허락하신 최성일 교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특히나 복음전파에 왜곡된 상을 가지고 있는 한국교회에 큰 깨달음이 있기를 바란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부탁드린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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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 Biblical Perspective on Evangelism을 “전도에 대한 성서적 전망”으로 옮기면 무난할 텐데, “전도”(傳道)가 일반적으로 “개종을 목적으로 기독교의 교리를 전하는 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이라는 의미를 살리기 위해 “복음선포”로 옮겼다. 외부인들에 대한 전도는 의미가 통하지만, 내부인과 자녀들에 대한 전도는 어색한 표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르그만의 단어 사용의 의도도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간직하게 하는 것으로서 이해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복음선포”로 통일했다. 그리고 그의 화려한 수사력은 사전에도 없는 많은 신조어를 사용함으로 저자의 뜻을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그는 복음선포의 대상을 지칭하기 위해 “constituency”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보통은 선거구나 유권자를 뜻하는 이 단어가 ‘후원자’, ‘지지자’, ‘구독자’ 등의 뜻도 갖고 있기 때문에, “선교대상”이라고 완전히 의역했다. 마지막 교정까지 고민했던 단어는 “appropriation”이었다. 보통 “독차지함”을 뜻하는 전유(專有)로 번역하는 이 단어는 저자의 의도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다는 나의 짧은 생각에, “사유화”(私有化)로 옮겼다. 선포된 하나님의 구원의 승리에 대한 소식을 자신의 사건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삶의 활력으로 삼는 것이라는 뜻에서 전유보다는 사유화가 좀더 나은 표현인 듯하다. 제 2의 창조로서 번역 작업을 하면서, 저자의 뜻이 제대로 전해지기를 기도한다.”(번역자 주)

▲ 최성일 교수(한신대학교 신학부/선교신학)

복음전파의 의미에 관한 우리들의 모든 혼선과 불일치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으로, 성서 자체 속에서 “소식 사건”(news event)의 구조들과 절차들과 요소들을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다. 나는 이 장에서 복음전파의 행위가 인식할만한 가치가 있는 특징적인 구조와 되풀이하여 발생하는 유형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 구조와 유형은 부분적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거듭해서 이루어지는 주장인, “하나님께서 승리하셨다”는 실체적인 주장(material claim)에 따라 형성된다.

복음전파의 의도성

그러나 그 구조와 유형은 또한 확고한 수사적 의도성(rhetorical intentionality)의 일부분이다. 이것은 이런 본문들 내에 속한 공동체가 그들의 삶과 정체성에서 가장 결정적이고 변화시킬 힘이 있는 것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방법이다. 실체적인 주장은 결코 수사적 의도성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복음전파에 관계하는 과제의 부분은 보수주의의 환원주의에 의한 것이나 혹은 자유주의의 당황스러움에 의해 우리의 표현력을 저하시켜 온 교회 전통 안에서의 우리의 표현 양식들(modes of speech)에 관한 담력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메시지”를 의미하는 “복음”(gospel)이라는 명사는 성서 속에서 “소식을 말하다”(tell-the-news: 히브리어에서는 bissar라는 한 단어)라는 동사와 연결된다. 복음전파 행위의 중심에서 메시지가, 즉 발언(utterance)의 이 순간 이전까지는 알려지지 않은 결정적인 그 무엇에 대해 말로 분명하게 소리지르는 단언이, 고지된다. 당황하게 만드는 자유주의자를 포함해서 그 누구든 복음전파의 핵심에 있는 이 힘차고 간결한 문체의 결정적인 단언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고지의 행위는 그렇지만 효과 없는 것도 아니며 전후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니다. 나는 여기에서 고지 그 자체가 세 부분으로 된 드라마의 순서 중 중명사(中名辭: middle term)라고 주장한다. 마치 복음전파가 단지 “이름을 붙이는 것”(naming the name)일 뿐이었던 것처럼, 어떤 순환주의의 보수주의자도 복음전파를 신실하게 다룰 수 없다.

우리는 고지 배후에 (이전에) 우리가 직접적인 접근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신화적인 부분의 “사건”이 있음을 인식하도록 요구받는다. 그리고 선포 이후에는 즉 선포된 의견(verdict)의 주장에 따라 삶의 모든 것을 다시 정리하는 힘든 일이라는 어려움이 생긴다.

그렇다면, 복음전파에 관하여 내가 여기에서 제안하는 분류법이 복음전파에 관한 많은 인기 있는 개념들을 비판하고 거절하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하다. 독자는 이 분류법이 복음전파에 대한 우리의 부주의하고 잘못된 생각의 많은 개념들과 관습들을 조절할 것이라고 가정하지 않도록 촉구된다. 복음전파를 이해하는 이 방법은 많은 문화 수용적인(culture-accommodating) 기독교인들의 인식론(epistemology)에 대한 도전이다. 반대로 그것은 너무나도 힘든 사회적이며 세속적인 국면으로부터 동떨어진 복음을 영적으로 만들고 사유화한 기독교인들의 교회의(ecclesial) 관습과 경제적인 관습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복음은 사건이다

비유는 약 10년 전에 세인트 루이스의 무대에서 공연되었다. 그 당시 세인트 루이스 축구팀인 카디날스는 놀랍도록 미움을 받던 조지 알렌(George Allen)이 지도하던 아주 싫어하는 워싱톤 레드스킨스와 경기를 하고 있었다. 레드스킨스가 6점보다 적은 점수로 앞서고 있던 상태에서 시간이 다 되어갈 때에, 카디날스는 그들의 마지막 공격을 했다.

짐 하트(Jim Hart)는 엔드 존에 있는 멜 그레이(Mel Gray)에게 공을 패스했다. 그 공은 그레이의 손안에 안착했으며, 잔디구장을 지나쳤다가 잔디구장 위에 섰다. 한 심판은 카디날스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터치다운을 신호로 알렸다. 엔드 존의 반대쪽에 있던 한 심판은 불완전한 패스, 즉 공을 떨어뜨린 패스, 따라서 패배를 신호로 알렸다. 그것은 두 상태 모두일 수 없었다. 두 심판들은 그것을 서로 다르게 보았다.

그것은 많은 돈, 얼마간의 명성, 자존심, 서로 다른 미래 등 많은 것이 걸렸던 논쟁이 된 신호였다. 6명의 심판이 경기장 가운데에 토론을 위해 모였다. 그것은 지구의 “운명을 결정하는” 신들의 모임과 같았다. 만원의 경기장은 5분 이상 아주 조용했다. “정말로 조용하게, 정말로 조용하게, 놀라운 선물이 주어진다.” 심지어는 라디오 아나운서들도 그들의 수다를 멈추었다.

그 다음 직관적인 진실파악(epiphany)의 순간에, 아마도 홈 구장의 이점과 편견을 부여하는, 주심은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카디날스를 위한 완전한 패스, 터치다운, 승리였다! 카디날스는 승리했고, 싫어하는 레드스킨스는 패배했으며, 미움을 받던 조지 알렌에게는 응분의 벌이 주어졌다. 이것은 실제로 도덕적인 세상(universe)이다! 여러분은 경기장과 매스컴과 도시가 미쳐 날뛰었던 것을 안다. 그렇지 않은가? (그 당시에 아무도 카디날스를 피닉스로 이동시키지 않았다.)

물론 나는 그 경기에 없었다. 나는 그 어떤 행위도 보지 못했다. 나는 단지 라디오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몸소 그것을 전혀 보지 못했다. 나는 믿을 수 있게 되었던 잭 버크(Jack Buck)와 다른 아나운서들의 신뢰성에 완전히 의존했다. 나는 그 경기의 드라마에 대한 그들의 과장되고 상상력이 풍부한 표현과 재구성을 듣고 그것을 좋아했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대로 받아 들였으며, 그들을 믿었고, 그리고 무슨 일이 확실하게 일어났는지 알았다. 나는 간접으로 배웠지만 그것은 나에게 충분했다.

그것은 단지 전해들은 축구 경기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 날에 그것은 변화시킬 힘이 있는 사건이었다. 나는 재빠르게 아들에게 그가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했다. 나는 여분의 팝콘을 사서, 세상에서 모든 일이 잘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옹호하고 힘을 내기 위해 연구실로 갔다. 나는 세인트 루이스 같은 그런 승리의 장소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정말 기뻐했다. 세인트 루이스와 워싱톤 두 곳 모두에서 많은 다른 사람들은 가지각색으로 기쁜 소식과 나쁜 소식이었던 새로운 현실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여러분은 그 같은 당파적이며 흔해 빠진 이야기를 용서해 줄 것이다. 나는 그것이 구원 드라마의 모든 구성요소들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야기한다. 나는 터치다운 신호가 “복음적” 고지와 같은 그 무엇이었다고 제안한다. 그 “사건”은 그 같은 소식에 속한 구성요소들을 확인하기 위한 한 방법을 제공한다.

최성일 교수(한신대 신학부/선교신학)  sungildab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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