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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탈(삼상1:19-28; 히2:9-18; 눅2:41-52)성탄절 첫째 주일(12.30)
최병학(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9.01.01 19:15

1. <마르셀 뒤샹 회고전>: 뒤집고 또 뒤집어라, 너 자신의 틀을 깨부숴라

미술사에서 ‘예술’의 정의를 바꿔버린 위대한 예술가가 있습니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왔던 ‘재현(mimesis)’의 굴레에서 미술을 해방시킨 현대 개념미술의 아버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입니다. 프랑스 북부 도시 루앙에서 태어난 뒤샹이 평생 자기 자신에게 주문한 말은 “뒤집고 또 뒤집어라”, “너 자신의 틀을 깨부숴라”입니다. 사실 뒤샹은 25세 때에 이미 화가로 성공했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이렇게 결심합니다. “마르셀, 그림은 더는 아니야, 일자리를 찾자.” 이 말은 뒤샹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예술 작업 방식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선언이었고, 앞으로는 그림을 생계유지 수단으로 삼지 않겠다는 각오였습니다. 일탈과 도전이 새로운 예술가와 예술의 탄생, 그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서울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러한 뒤샹의 삶과 예술을 집중 조명하는 <마르셀 뒤샹전>이 개막했습니다(2018.12.22.~2019.4.7.). 뒤샹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이 협업해서 여는 전시회입니다. 뒤샹의 회화와 드로잉, 레디메이드 작품 등 150여 점을 선보입니다. ‘판의 규칙’을 완전히 바꾼 천재 아티스트인 뒤샹에 대한 많은 궁금증과 수수께끼를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전시회이자, 그의 복잡하고 대담했던 머릿속을 탐험할 소중한 기회입니다.

<국립현대미술과 뒤샹 전시전 포스터>

이번 전시회는 이러한 일탈, 혹은 도전의 여정을 작품 변화에 따라 총 4부로 나누어 보여줍니다. 티모시 럽 필라델피아미술관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뒤샹은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놀랍고 영향력이 큰 작가이다. 뒤샹을 이해하지 않고는 현대미술을 이해할 수 없다. 뒤샹의 업적이 새로운 관객과 만나게 돼 기쁘다.” 또한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 전 관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현대미술에서 뒤샹은 서양철학의 플라톤과 같은 존재이다.”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앞서 이렇게 이야기했죠.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라고. 따라서 마리 전관장의 말은 뒤샹 이후의 현대 예술은 뒤샹 이전과 같을 수 없고, 뒤샹의 자장 안에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곧, 뒤샹 이후의 모든 현대미술은 ‘아이디어 자체’가, 물성으로서의 찬란한 예술품보다 더 중요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뒤샹은 전복과 유희, 그리고 그 스스로가 명명한 ‘무예술적(anartistic)’ 경향을 추구하며 예술의 성질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니체가 신을 죽이고, 양자역학이 고전 물리학을 죽였다면 뒤샹은 미(美)를 죽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니체의 초인(Übermensch)의 자리에 뒤샹은 의미(意味), 곧 개념이라는 신의 옷자락을 펼쳐 놓았습니다.

1913년 뒤샹이 뉴욕의 무기고에서 열린 아모리 쇼(Armory Show)에 처음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Nude Descending a Staircase No.2)>(1912)를 출품했을 때 뉴욕의 화단은 동요했고, 이내 전위미술의 화신이 되었습니다. 이후 레디메이드(ready made, 기성품) 작품인 <샘(Fontaine)>(1917)을 통해서 예술을 ‘손재주’나 ‘능력’이 아닌 ‘정신적 선택’으로 만들었으며, <수염난 모나리자(L.H.O.O.Q)>(1919)를 통해 예술과 일상의 벽을 허물었습니다. 이후 81세에 세상을 떠날 때 까지 뒤샹은 가장 혁신적인 예술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한마디로 틀을 뒤집고 또 뒤집는 일탈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밴드 자우림의 노래 ‘일탈’의 가사 일부입니다.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하루
지루해 난 하품이나 해
뭐 화끈한 일
뭐 신나는 일 없을까
우와우와우와우와
할 일이 쌓였을 때 훌쩍 여행을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점프를
신도림역 안에서 스트립 쇼를
야이야이야이야이야
하는 일 없이 피곤한 일생
나른해 난 기지개나 펴
뭐 화끈한 일
뭐 신나는 일 없을까
우와우와우와우와
머리에 꽃을 달고 미친 척 춤을
선보기 하루 전에 홀딱 삭발을
비 오는 겨울밤에 벗고 조깅을
야이야이야이야이야

일탈은 참으로 매력적인 단어입니다.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하루, 할 일이 잔득 쌓인 일상, 이러한 일상에서 일탈은 머리에 꽃을 달고 미친 척 춤을 추고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점프를 하고 신도림 역 안에서 스트립쇼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전적인 의미로 일탈은 ‘기존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단순히 이해되지만, 여기에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자우림의 노래는 용기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노래로 잠시나마 일탈을 꿈꾸게 합니다. 오늘 성탄 첫째 주일 세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일탈을 보여줍니다. 세상에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그의 대속적 삶이 바로 뒤샹의 예술과 같이, 자우림의 노래 ‘일탈’과 같이 기존 체제, 아니 기존의 가치관에 대한 저항으로 새로운 가치관을 우리들에게 보여 줍니다.

2. 어린 예수의 일탈: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신약의 본문 말씀은 어린 시절 예수님의 이야기로 누가복음에만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12살 때 부모님을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월절 절기를 지켰을 때의 일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랍비와 대화하는 어린 예수>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눅 2:41-47)

유대인의 명절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간 예수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는 절기를 마치고 돌아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한 순례 길이라 혼잡한 가운데, 아들 예수를 잃어버렸음을 하루가 지나서 깨달았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사흘 길을 거슬러 올라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성전에서 랍비인 선생들과 대화와 토론에 흠뻑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눅 2:48).”

그러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라고 반문합니다. 물론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지만(50), 어머니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었다고 합니다(51).

본문에서 우리는 어린 예수의 일탈을 봅니다. 상식적으로 12살 어린 아이가 부모의 품을 벗어나 사흘 동안 떨어진 것도 문제지만, 더욱이 그 사흘 동안 성전에서 랍비들과 대화와 토론을 하였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존 상식, 기존 틀을 깨는 것입니다. 일탈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탈은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의 모습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방문을 통하여 예수는 이곳이 하늘 아버지의 집임을 깨닫고 그곳의 랍비들과 만나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흘 동안 토론에 빠져 있던 예수를 통해 우리는 일상과 종교적 삶의 일치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술과 일상의 벽을 허문 뒤샹의 작품 <수염난 모나리자>를 생각나게 합니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 <모나리자(The Mona Lisa)>(1503)의 주인공 모나리자를 신비하고 오묘한 미소를 지닌 매력적인 여인에서 수염 난 남자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한낱 장난으로 치부될 수 있을 이 행위는 현대 미술에 엄청난 파급력을 미쳤습니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로 대표되는 과거 미술사의 전통과 권위를 이처럼 조롱한 예는 뒤샹의 경우가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뒤샹은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찬양하고 숭배하는 다빈치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뒤샹은 무언가 ‘그리는’ 것을 포기함으로 회화의 부정을 실천했지만, 이 용감하고도 무모한 도전은 현대 미술을 진일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예술과 일상의 벽을 허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늘이라는 고상한 영역에서 자신만의 춤을 출 때, 보는 이 없겠지만, 일탈을 통해 땅의 지평을 확보할 때, 진일보 할 것입니다. 어린 예수는 일탈을 통해 평상시의 일상과 종교적 삶을 일치 시켰던 것입니다. 이후 누가복음은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라고 말하며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정리합니다.

3. 한나의 일탈: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영원히 있게 하리이다

사실 뒤샹의 일탈은 ‘레디메이드’로부터 시작됩니다. 레디메이드란 뒤샹이 1915년 창조한 미적 개념으로 작가가 직접 만들지 않은 기성품을 작품으로 제시한 것을 의미합니다. 초현실주의의 오브제(objet, 불어로 물체, 대상, 객체 등의 의미를 지니나, 미술에서는 예술과 무관한 물건을 본래의 용도에서 분리하여 작품에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느낌을 일으키는 상징적 기능을 뜻함)와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따라서 레디메이드는 우수한 손재주나 능력(앞서, 언급한 물성으로서의 찬란한 예술품)보다 ‘정신적 선택’을 통한 미학적 고찰을 중요시합니다. 이런 의미로 헤겔 미학의 측면에서 물질은 사라지고 정신만 고양되니, ‘예술의 종언’, 곧 ‘이념의 완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샘>은 뒤샹이 남성용 소변기를 전시회 작품으로 전시함으로 예술의 오랜 전통을 일탈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본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비도덕적이고 저속하며 무엇보다 표절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을 통해 미술가는 이제 작품을 ‘창조’하는 대신 ‘선택하는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물이 놓여 있는 ‘위치(전시관에 놓인 변기)’가 그 사물의 원래 ‘기능(화장실에서 사용되는 기능)’을 전도시킵니다. 기능이 위치에 따라 변화되는 놀라운 시대가 개막한 것입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후 <샘>은 신화가 되었고, 오래지 않아 20세기 최고의 예술품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샘>

구약의 본문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의 부모 한나의 일탈 이야기입니다. 사무엘 상 1장의 말씀은 사사시대와 왕정시대의 과도정부를 이끈 선지자 사무엘의 출생에 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엘가나에게 두 아내가 있었는데,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한나는 자식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서원기도를 합니다. 그 결과 제사장 엘리로부터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삼상 1:17).”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본문은 그 이후의 말씀입니다.

<엘리 제사장과 사무엘>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 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삼상 1:19-20)

기도 응답대로 아이를 낳습니다. 이름을 사무엘로 짓습니다. 그런데 이후의 말씀은 한나의 일탈을 보여줍니다. 매년제와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 사람 엘가나와 그의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삼상 1:21-22a)” 왜 그랬을까요?

매년제(Annual sacrifice)는 매년 한 번씩 드리는 제사로 일가족이 함께 참여하는 제사를 말합니다. 한나의 남편 엘가나는 가족과 함께 일 년에 한 번 실로 성소에 올라가 매년제를 드렸습니다(삼상 1:3, 1:21, 2:19). 서원제는 ‘약속한 특별한 제사’를 말합니다. 본문 말씀에는 엘가나가 서원했던 것을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한나의 서원(1:11)을 엘가나가 수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한나는 매년제와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가지 않고 대신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의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리이다 하니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이에 그 여자가 그의 아들을 양육하며 그가 젖 떼기까지 기다리다가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수소 세 마리와 밀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삼상 1:22b-24)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뗀 후, 사무엘을 여호와 앞에 영원히 있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 엘가나도 동의합니다. 한나의 일탈은 이후 사무엘의 놓여있을 위치를 바꿈으로 기능을 전도시킵니다. 어렵게 낳은 아들로 어머니 품에서 사랑받는 아이가 아니라, 제사장의 품에서 민족의 지도자로 그 기능을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한나의 일탈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일탈이었습니다. 자신의 서원 기도대로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렇게 어렵게 낳은 아들이었지만 3년이 되자 아이를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그들이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 가서 한나가 이르되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 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삼상 1:25-28)

뒤샹식으로 말하면 한나의 ‘정신적 선택(종교적으로는 영적 선택)’은 사무엘의 놓여 있을 위치를 바꿈으로 기능을 전도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새 역사를 창조하게 됩니다. 일탈이 새 시대를 연 것입니다. 그 일탈이 사무엘로 하여금 훗날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 부어(삼상 15:1, 16:13) 민족의 지도자로 세웠던 것입니다.

4. 어른 예수의 일탈: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서신서 말씀인 히브리서는 고난과 박해 때문에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유대교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구약의 중요한 세 직분인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성육신을 통해 인간이 되시고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해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천사보다 훨씬 탁월하시지만 잠시 동안 천사보다 낮아지셨다가(‘비하’로 신학적으로 표현하지만, 저는 전체 설교 맥락상 ‘일탈’로도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죽음 이후 부활승천하사 영광의 자리로 ‘승귀’하심을 보여줍니다. 곧, 그리스도의 비하(卑下, 낮아지심)와 승귀(昇貴, 높아지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일탈’과 ‘복귀’로도 설명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비하, 곧 일탈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9-10)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그 하늘 보좌를 ‘일탈’하시어 우리 인간과 같이 되셨고, 또 대제사장이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히 2:17).” 그리고 이러한 일탈을 통한 인간 사랑이야말로 구원의 창시자, 예수님 사역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고난을 통한 온전하심으로!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18).”

최근 ‘인권’의 바탕을 이루는 핵심 개념인 인간의 존엄에 대한 경멸과 부정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전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또한 극우 개신교인들은 ‘인권’이라는 말만 나와도 ‘동성애’, ‘이슬람’과 연결시켜 혐오의 말로 변질시켜 버립니다. 인권은 대한민국 헌법 2장 10조에 잘 나와 있습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인권의 초석이 되는 ‘존엄성’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디그니타스(dignitas), 혹은 영어의 디그니티(dignity)를 번역한 말입니다. 원래는 어떤 사람의 ‘지위에 걸맞은 품위’, 그리고 ‘사람의 인격과 자존감’이라는 뜻을 가진 어휘입니다. 도덕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에 따르면 인간의 존엄은 ‘그 자체로서 소중한 내재적 기본가치’를 뜻합니다. 사람은 가격을 매기거나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고유한 개별적 완결성을 지향하는 원칙이 바로 존엄성입니다.

따라서 인권(인간권리)은 인간을 존엄하다고 동의하는 바탕 위에서 법이나 제도상의 ‘권한’을 결합시킨 개념입니다. 만약 인권에서 ‘인간의 존엄’을 제외하면 순수하게 ‘법적인 권리’만 남게 됩니다. 인간의 존엄이란 인간의 ‘고유한 개별적 완전성’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인간을 상향평준화하려는 지적, 실천적 지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인간의 개별적 완전성을 해체하여 그 구성요소들의 경제적, 사회적 효용성만 써먹으려는 모든 시도는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삼는 반인권적 패악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들의 존엄성을 위해 자신의 존엄을 일탈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것도 죄 많은 우리를 위하여! “존귀한 분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예수님의 일탈을 구원의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뒤샹은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1912)를 통해 그림에 움직임(운동)을 넣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 작품 속 인물은 카메라의 셔터 속도를 느리게 한 후에 대상을 촬영한 것을, 화면에 늘어뜨려 겹쳐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기존의 회화가 추구하던 이미지가 해체되고 분절되고 파편화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뒤샹의 회화가 일반적인 망막 회화를 벗어나 있음을 깨닫습니다. 반(反)망막적인 작품입니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

예술은 ‘붓질’이 아닌 ‘방식’으로 표현돼야 한다고 믿었던 뒤샹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술은 망막적인 것을 넘어서 ‘아이디어(개념적인 것)’로 나아가야 한다.” 미술사에서 ‘생각’이 작품의 근원이 된 발생사적 기원입니다. 그림을 보면 작품 속 인물은 계단을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운동성이 보이나요? 내려옴 없이 올라감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비하 없이 승귀는 없습니다. 기존 회화에서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면 이제 뒤샹을 통해 움직임을 보아야 합니다. 내려오는 움직임을 보아야 합니다. 비천해지신 예수의 모습을 봐야 합니다. 존귀하신 분이 육을 입고 비천해지신 일탈의 구원은 이렇게 성탄 첫 주에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5.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자신의 존엄성을 버리신 예수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일탈로 아기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일상적 삶과 말씀의 삶이라는 벽을 허문 어린 예수의 일탈이 사랑을 더 공고히 해줍니다. 그리고 어른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예수의 대속적 죽음 역시 일탈로 기존의 가치관과 체계를 무너뜨립니다. 로마의 사형틀이었던 십자가 처형 사건이 인류의 구세주가 취한 구원의 방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송년주일입니다. 하늘 보좌를 일탈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랑과, 자신의 삶 전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으심으로 일탈의 구원을 이루신 그 은혜를 감사하며, 우리도 낮은 자들이 처한 곳, 소외된 이들이 머무는 곳으로 우리의 편안한 삶의 자리를 일탈하여 하나님의 사명의 자리로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다가올 새해가 부활의 찬란한 빛으로, 소망의 약속으로, 말씀의 충만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뒤샹은 “뒤집고 또 뒤집어라”, “너 자신의 틀을 깨부숴라.”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예수의 제자들은 늘 언제나 밖으로는 기존의 잘못된 ‘체제’를 뒤집고 또 뒤집어야 하며, 이를 위해 안으로는 자기 자신의 ‘틀’을 깨부수는 일탈을 시도해야 할 것입니다.

뒤샹이 그 길을 ‘예술’에서 보여주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 길을 ‘예수’를 통해 보여주어야 합니다.

최병학(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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