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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이 겪는 신경증과 자아의 전일성‘아픈’ 사람이라는 문제와 자아의 전일성을 중심으로
이경우(감리교신학대학) | 승인 2019.01.03 17:58

요즘 사람에게 ‘운동’은 필수적이다. 육체적으로 건강해야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통용되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토록 육체적 건강에 대해 현대인이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이유는 그만큼 ‘정상적’이라고 불리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신적인 영역,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한 반응으로 눈에 보이는 것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대인의 건강 점검하기

한병철 교수는 현대를 ‘피로사회’라고 부른다.(1) 피로사회는 현대인에게 탈진과 피로함을 주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신경증을 얻게 된다. 신경증을 얻는 것은 우울증과 조증처럼 병리학적인 부분에 취약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육체적인 건강을 원하는 현대인의 의식과는 달리 정신적인 부분에서는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피로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현대인은 누구나 일종의 신경증을 겪고 있다. 병리학적 측면에서 의사에게 공식적으로 진단을 받지 않았어도 전체적인 측면에서 자신만의 신경증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실존적인 불안을 대상화 하여 해소하는 것이다.(2) 예를 들어 물건의 줄을 세우거나, 색을 꼭 맞춰서 진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한다면 극심한 불안증세를 호소하게 되는데, 유독 증상을 호소하는 본인만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옷을 벗는 순서가 고착화 되어 있는 것도 일종의 불안증세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정도의 차이가 있을 지라도 현대인에게 신경증은 다른 사람과 종류가 다르진 않다.

알랭 드 보통은 현대인이 가지는 불안을 ‘지위불안’이라고 정의한다.(3) 현대인은 능력주의 사회에서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지위가 능력에 따라 정해진다는 점에서 ‘불안’을 호소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자신과 동등한 또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 자기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같은 동기인 회사원이 자신보다 빠르게 직급을 얻을 때 우리는 극심한 불안을 느낀다는 것이다.

▲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계승해 정신분석학을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켰다고 평가받고 있는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쟈크 라깡. ⓒGetty Image

틸리히의 말처럼 불안이 실존적인 부분에서 비존재의 위협이라면 그것은 어떠한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 실존주의 철학자가 그것을 ‘무’의 지평에서 해석할 때, 피로사회는 그것을 대상화하는 부분에서 ‘정상적인’ 것을 추구함으로써 불안을 해소하려는 것이다. 정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자신의 신경증적인 모습을 거부하려는 행동으로 나타난다.마치 자신은 그러한 병리학적 측면에서 아무런 해당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길 원하는 것이다.

건강한 것을 간절히 추구하는 것은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가면이라고 볼 수 있으며, 건강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건강하지 않다고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현대인은 누구나 건강하지 않음을 가지고 있다. 정신적인 부분에서 반드시 일을 해야 하는 강박과 더불어 일을 하기 위해 반드시 건강해야 하는 생각이 불안을 대상화 하면서 해소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인의 건강을 점검했을 때 항상 건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누구나 병리학적 측면에서, 또는 최소한 실존적 측면에서 ‘아프다’는 것이다. 하지만 피로사회는 이러한 ‘아픔’을 이해하지 않고 또한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픈 사람?, ‘안’아픈 사람

(1) ‘아프다’는 규정의 문제 

현대인이 신경증을 겪는 것으로 본다면 피로사회에서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은 ‘아프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픈’ 사람을 보는 것이다. 미셸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정신 착란자, 광포하게 구는 미치광이, 조광증에 시달리는 자, 또는 사나운 사람이 곧장 식별되는 것은 사실이다.”라고 말한다.(4) 즉, 아프지 않은 사람은 아픈 사람을 한 번에 알아본다. 특히 병리학적 증상을 겪는 사람을 볼 때 자신과 다른 이질감을 직시한다. 그것은 그들이 미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이 정신 장애에 고유한 징표가 모든 광기의 지각되지 않는 본질에 덧붙여지는 특별한 방식으로 그들의 망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정신분열과 같은 병리학적인 증상을 겪는 사람을 우리는 ‘아픈’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아픈 사람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그 사람이 정상적인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정상적인 것에 대한 강박이 있는 현대사회에서 아프다는 것은 큰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불안을 내포한다.

미셸 푸코는 지금까지 아픈 사람을 억압해왔다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지속해서 등장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분명히 “정신병은 인간이 역사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 모순의 결과”임을 설명하려고 한다.(5) 푸코는 광기가 어떤 항구적인 정신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역사의 특정 시점에 이르러 사회적으로 이성 개념을 정립하고자 광기 개념을 발명했으며, 이에 따라 광기는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선을 표시하는 울타리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다.(6) 따라서 아픈 사람과 아프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것, 그것이 광기의 역사 개념에서 우리가 단순히 미친 사람으로 규정하려고 하는 권력체계이다.

뉴스를 통해서 볼 수 있는 사건 중에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바로 ‘심신미약’에 관한 것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심신미약이라는 이유로 완전하게 지지 않는 것에 대해 분노한다. 문제는 이러한 ‘심신미약’의 상태에 빠진 사람을 따로 ‘관리’하자는 의견이 심심하지 않게 나온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는 사람은 이성의 부분에 두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비이성의 부분에 두고 있으며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푸코가 말하는 것처럼 광기와 이성을 구분하는 것은 옳지 않다.(7) 이것은 아픈 사람과 아프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정상적인’ 것에 대한 강박이 있는 지를 잘 보여준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신경증적인 것은 피로사회에서 너무나도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신건강에 있어서 아프다는 것을 예민하게 규정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아프지 않아야만 하고 아프다는 것은 정상적인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며 자기 긍정 없이 존재하는 사람에게 이것은 사회가 자신을 배제하는 것으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인은 왜 자신은 ‘아프지 않다’는 규정을 통해서 아픈 사람을 배제하려고 하는가에 대해 물어야 한다. 그러한 생각은 주체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억압받은 것이며,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며 그로인한 생각이라고 볼 수 있다.

(2) 정신분석적 해석

현대인이 ‘정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의식에서 가능한 것이다. 무의식이 원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기 때문에 자아는 그것을 욕망하며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것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경증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서 정상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게 되므로 이질감을 느끼고 배제하는 것이다.

자크 라캉은 자아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전언을 통해서, 그리고 타자와의 협력을 통해서 자신의 대상을 구하게 된다고 한다.(8) 의식 너머에 존재하는 대타자가 욕망하는 모습을 통해서 자아는 그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인이 갈망하는 ‘정상적이어야 한다’는 의식은 스스로가 가지고 있기 보다는 대타자가 가지는 욕망을 욕망하는 것에 가깝다.

‘아프다’, ‘아프지 않다’는 것은 결국 언어적 구조를 통해서 전달된다. 따라서 ‘아프다’는 구조에 포함되는 사람과 ‘아프지 않다’는 구조에 포함되는 사람이 생기길 마련이다. 아프지 않은 사람들이 정상적인 부류로 해석되는 사회 구조에서 ‘아프다’ 규정당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다. 라캉의 말대로 언어에는 의미작용을 만들어내는 것이 담겨 있다.(9) 무의식은 이러한 환유 속에서 잠재해 있고 은유 속에서는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정신분석에 있어서 언어구조가 중요한 이유는 주체가 스스로 이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주체가 자기 내부에 스스로 지배할 수 없는 이질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고려되지 않을 때 정신분석학은 단순히 타협적인 전술에 불과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10) 따라서 근본적인 이질성에서 생겨난 인간 내부의 결핍은 결코 다시 회복될 수 없다.

‘아프다’ 규정된 사람, 즉 신경증을 앓고 있는 사람을 정상적인 범주에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은 언어구조 안에 나타난 대타자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아는 그로인한 인정욕구를 느끼게 되는데, 라캉은 이것을 “욕망은 타자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욕망이 된다.”고 주장한다.(11) 따라서 대타자에게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자신이 정상적이라는 생각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그것은 욕망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욕구는 타자를 바라볼 때도 성립한다. 자신과 동등하게 타인에게도 타자의 욕구를 욕망하는 의식이 담겨있다. 대타자의 욕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을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극심한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런 대타자의 요구 속에서 그것을 이행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신경증을 우리는 좋게 볼 수 없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은 우리가 객관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를 인간 주체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예의바른 성품 뿐 아니라 변덕스러움, 정신이상, 공포증, 연물주의에서도 우리는 무의식의 흔적을 볼 수 있다.(12)

현대인에게 신경증은 특별한 것이 아니고 모두가 겪는 현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에서 무의식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너무나도 쉽게 병리학적 측면을 배제하는 것과 정신건강에 대해서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완벽한 정신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정신 상태는 라캉에게 있어서 상상계에 머무르는 것과 같다.

확실성의 주체라는 것, 정상적인 사람이 ‘아픈 사람’에게 투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은 ‘아프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주체에 대한 확실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라캉에게 있어서 확실성의 주체는 자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여기는 것은 기만에 가까울 수 있으며 진리의 토대를 보증해 줄 수 있는 것은 어떤 타자로부터이다.(13) 따라서 정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욕망은 오히려 어떤 타자로부터 확실성을 얻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아의 전일성 추구

(1) 전일성을 위한 첫 번째 과제, 창조성

앞서 말한 것처럼 푸코나 라캉은 신경증을 앓고 있는 사람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다고 한다. 나와 타자가 다르다는 이질성으로 인하여 직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와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창조성’이다. 창조성을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천재성’이라고 한다. 신경증을 앓고 있는 사람을 한 번에 알아보는 것처럼 로버트 S.코링턴은 창조성을 한 번에 보면 알아본다고 한다.(14) 창조성도 마찬가지로 신경증을 앓는 사람과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에서 어떤 우월한 존재로 여기는 천재적인 사람과 배제하고 관리의 대상으로 여기려 하는 사람과 동일한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코링턴은 조울증과 천재 효과에 연관성을 연구하면서 신경증을 앓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창조성에 대해서 말한다. 이러한 창조성은 성과물과 과정 그리고 공동체에서 나타난다.(15) 오히려 창조성은 ‘아프지 않다’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아프다’는 사람에게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정상적인 자리에 놓여 있는 사람은 보편적인 사람보다 더 특별한, 천재적인 것을 원하지만 그러한 천재 효과, 천재성, 창조성은 ‘아프다’고 배제당한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애매하다는 것과 비정상으로 구분되는 이유는 ‘아프다’는 이유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음에 있다. 그러나 창조성을 발현하는 관점에서 그 경계는 상당히 모호해진다. 그럼으로서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은 언어의 구조 속에 나타나는 ‘배제’성이다.

전일성을 위한 첫 번째 과제로서 추구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창조성에 대한 긍정이다. 창조성은 그 자체가 목적으로 나타난다. 창조성은 그 자신 이외에 어떤 고차적인 것을 섬기지 않는다.(16) 또한 창조성은 그의 활력을 부여하거나 혹은 동기를 부여하는 조건들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잠재성을 발현하는 것과 같다. 신경증의 문제는 배제 하거나 또는 정상적인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는 규정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잠재성을 어떤 식으로 발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남기게 된다.

천재의 정신과 관련한 기본적인 사실 중 하나는 곧 자아 내부에 깊은 이분화가 존재한다는 것이다.(17) 내부 세계의 분열과 결부되어 외부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비하적 외면이 존재한다. 각 부분의 자아는 보기 드물게 맹렬히 말하고, 그럼으로써 전일성을 향한 충동을 그만큼 보다 더 절박하게 만든다. 따라서 창조성과 정신 질환은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게 되는데 조울증과 같은 경우는 천재성과 복잡한 목적론적인 상승작용이 존재한다.(18)

현대인의 구조적인 측면에서 신경증을 앓는 사람을 마치 ‘광인’으로 취급하고 있지만 오히려 창조성의 부분에서는 그들이 더욱 고양될 수 있다. 따라서 중요하는 것은 그러한 신경증의 측면에서 사람을 볼 때, 결여되어 있거나 이질감을 느끼는 타자적 존재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능력을 발산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순간에 ‘광인’으로 취급 받는 사람은 더 이상 광인의 맥락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된다. 창조성의 발현 가능한 장으로 전환이 나타나는 것이다.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사람이 받은 어떤 기본적인 정신적 상처와 그의 악화가 갖는 심리적 특성들이 더하여, 재능과 매체에 집중된 높은 창조성의 현존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격리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약물을 통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창조성의 활동을 경험할 수 있는 존재로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로인한 자아의 전일성은 타자를 배제하는 것으로 머무르지 않게 된다.

따라서 자아의 전일성은 모두를 포섭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누구도 신경증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에서 누구나 창조성의 추구를 통해 동등한 지평에서 해석될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대타자의 욕구는 우리로 하여금 ‘정상적인’ 모습을 추구하게 하고 신경증을 앓는 사람에게서 이질감을 느끼다. 하지만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의 도래는 혼란스러움을 가져준다는 점에서 창조성은 오히려 이질감이 아니라 실재계의 도래라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2) 전일성을 위한 두 번째 과제, 언어파괴

언어구조는 앞서 말한 것처럼 무의식적인 작용을 가하고 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의미 작용을 만드는 것처럼 언어 구조 안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주체는 자아가 아니라 오히려 언어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앞서 말한 것처럼 타자가 욕구하는 것을 욕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로인한 규정과 배제는 신경증을 앓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프다’는 사람으로 제한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전일성을 위한 노력으로써 ‘언어파괴’가 필요한 것이다.

코링턴은 언어의 중요성을 에너지의 관계로 통해 설명한다.(19) 그는 언어의 의미를 유한 에너지와 무한 에너지 그리고 의미 사이의 변증법을 기술하는 것으로 말한다. 특히나 에고와 그것을 담는 ‘그릇’으로서 의식은 심히 유한하고 관점 의존적이어서, 언제나 개인의 역사와 인종과 같은 여러 조건들에 얽매여 있다.

라캉에게 있어서 언어 구조는 결국 정해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전환과 상징계에서 실재계의 도래는 이루어지지만 대타자의 욕망은 여전히 환유되고 은유되는 것이다. 언어 속에 거주하는 것은 인간이다. 따라서 정신분석은 주체가 거주하는 언어의 과학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라캉의 한계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슬라보예 지젝은 라캉이 생각하는 언어의 지점에 있어서 마치 ‘언어의 감옥’과 같다고 주장한다.(20) 지젝은 언어의 고문적인 측면은 주로 리비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진리가 말하도록 하려면 주체의 적극적인 개입을 중단시키고 언어 자체가 말하도록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언어는 비틀어지고, 탈자연화되고, 연장되고, 압축되고, 잘리고, 다시 결합되고, 자신에 반해 작용하도록 만들어져야 한다.(21)

슬라보예 지젝은 상징계의 대타자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가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한다. 혁명이라는 것은 결국 외상적 사건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조를 뒤집을 수 있는 것은 실재와의 만남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뒤바꾸는 사건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경증을 앓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언어를 파괴해야 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언어구조는 신경증을 앓는 사람을 ‘아프다’로 규정한다. 아픈 사람이기 때문에 도움을 줘야 한다는 생각은 그런 사람과 나는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오히려 전일성을 추구하기 어려운 구조이다. 따라서 언어파괴는 그러한 언어구조에 있어서 슬라보예 지젝과 같이 ‘혁명’을 추가하는 것이다.

혁명은 실재계의 도래를 의미한다. 그것은 다시 환유와 은유를 거치지만 슬라보예 지젝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대타자가 비존재로 간주하던 존재들의 자리다. 따라서 비존재로 간주되는 존재들의 자리라는 것은 전일성을 추구할 수 있는 자리가 된다.

코링턴이 추구하는 전일성은 자아와 공동체 모두에게 치러야 할 대가를 전적으로 알고 있는 영성이다.(22) 슬라보예 지젝이 말한 것처럼 실재계의 도래가 혁명과 같은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언어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구분하고 배제했던 비존재로 있던 사람과 동일하게 전일성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코링턴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전일성을 추구하게 만든다. 그것은 타자를 배제하고, 관리의 대상을 생각하고, 이질감을 느끼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창조성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를 돌아본다면 우리의 언어는 전적으로 누군가를 ‘혐오’하기에 편하다. 군 복무를 하는 사회복무요원에게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이유로 ‘돼공’이라 하며, 정신증이 있는 복무요원에게는 ‘정공’이라 비하하는 걸 자주 볼 수 있다. 언어에 무감각하며 이러한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단순히 보고 있을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언어파괴’가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창조성’을 적극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코링턴에게 있어서 신경증을 앓는 사람에게 ‘창조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 언어파괴에 가깝다. 정상적인 사람의 범주에서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언어는 정상적인 사람이라 불리는 구조에 ‘실재계의 도래’와 같다. 이해할 수 없으며, 무엇인지 가늠할 수 없는 그것이다. 하지만 ‘가능하지 않음’은 ‘가능하다’라는 고백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코링턴에게 있어서 ‘전일성의 추구’는 정상정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혁명’과도 같은 것이다.

미주

(미주 1) 한병철, 『피로사회』, (서울: 문학과지성사, 2012), 66.
(미주 2) 폴 틸리히, 『존재의 용기』, 차성구 역 (서울: 예영커뮤니케이션, 2006), 70.
(미주 3) 알랭 드 보통, 『불안』, 정영목 역 (파주: 이레, 2005), 247.
(미주 4)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이규현 역 (서울: 나남출판사, 2003), 311~312.
(미주 5) 사라 밀스,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 임경규 역 (서울: 앨피, 2008), 188.
(미주 6) 위의 책, 189.
(미주 7) 위의 책, 192.
(미주 8) 자크 라캉, 『욕망 이론』, 권택영 역 (서울: 문예출판사, 1994), 46.
(미주 9) 위의 책, 77.
(미주 10) 위의 책, 88.
(미주 11) 위의 책, 89.
(미주 12) 위의 책, 91.
(미주 13) 자크 라캉, 『(자크 라캉) 세미나 11: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개념』, 자크-알렝 밀레 편집, 맹정현 외 역 (서울: 새물결, 2008), 62.
(미주 14) 로버트 S.코링턴, 『바람의 말을 타고: 조울증의 철학』, 박일준 역 (서울:동연, 2018), 195.
(미주 15) 위의 책, 196.
(미주 16) 위의 책, 207; 코링턴은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개별화’라는 목표는 예외로 둔다는 점이다.
(미주 17) 위의 책, 210.
(미주 18) 위의 책, 220; 이때 코링턴은 사고 장애와 기분 장애를 명백히 구분한다. 전자의 경우에는 증상들이 차도를 보일 때를 제외하고는, 창조성을 고양하는데 도움을 줄 가능성이 떨어지는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재능을 천재성으로 앙등시키는데 결정적일 수 있다.
(미주 19) 코링턴, 『바람의 말을 타고: 조울증의 철학』, 301.
(미주 20) 슬라보예 지젝, 『라캉 카페 : 헤겔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그늘2』, 조형준 역 (서울:새물결, 2013), 1530.
(미주 21) 위의 책, 1531.
(미주 22) 코링턴, 『바람의 말을 타고: 조울증의 철학』,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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