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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위한 평화의 상(像) 그리기한 가지 성서의 평화 이해
김상기 교수(한신대) | 승인 2019.01.05 21:50

평화는 비평화를 거쳐 생각하기가 더 쉽다. 비평화적 요소들, 곧 전쟁, 폭력, 억압, 차별, 혐오, 불평등, 착취, 빈곤, 기아, 안전 위협, 생태 파괴 등이 있는 곳에 넓게 말해 평화의 꿈이 싹튼다. 이것은 평화를 이야기하거나 추구하려고 한다면, 사회와 국가, 개인과 인민, 지역과 세계, 자연과 문명 등을 함께 생각할 수 있는 포괄적 시각이 필요함을 뜻한다. 더구나 저 비평화적 요소들은 각기 독립되어 있는 것들도 아니지만 하나하나도 소수의 힘으로 제거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따라서 그것들을 걷어내기 위해서는 각 부문들에서 반평화적 세력 내지 연합세력에 맞서 싸우는 평화적 힘들이 서로 연대하고 또 그 저변이 지속적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평화 구축을 위한 분명한 평화의 상(像) 확립

이렇게 비평화적 요소들의 관점에서 평화에 접근하면, 평화로 가는 길이 얼마나 멀고 험할지 곧 드러난다.  그러면 평화는 그 길 끝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다. 평화 수립은 예컨대 전쟁의 종식 내지 부재 같은 비평화적 요소들의 제거로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요소들의 부재는 평화를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평화적 요소들의 제거가 가져올 새로운 물적 토대 위에 지속가능한 평화체제가 수립되려면, 구체적이고 분명한 평화의 상(像)이 있어야 하고 이를 실현할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비평화적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한 저항은 평화 운동으로서 평화의 세상을 구상하고 평화를 훈련하고 평화체제로의 전환을 준비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평화에 대한 논의에서 인권으로서의 평화권이 다루어지기 시작한지 이미 오래다.(미주 1) 평화적 생존권이라는 의미의 평화권은 이제 인간의 기본권 곧 자연권으로 인식된다. 평화는 단지 어떤 상태가 아니라 평화권의 실현과 향유를 뜻한다. 이렇게 보면 위에 언급된 비평화적 요소들은 모두 평화권 곧 인권 침해의 관점에서 다루어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평화와 평화권을 말하는 것은 갖가지 형태의 개인적ㆍ구조적 폭력에 의해 인권 침해가 발생하는 비평화적 현장에 서게 한다. 이에 따라 그것은 비판적이고 윤리적이고 또 실천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점은 교회가 평화를 말할 때에도 달라지지 않는다. 여기에 우리의 평화 이야기가 단지 평화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에 그칠 수 없고 또 그쳐서도 안되는 까닭이 있다. 평화와 평화권 실현을 위해 증언하고 일하는 것은 교회 실천의 핵심이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릴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진다(마 5,9).

이는 하나님이 그러는 것처럼 평화롭게 살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 권리를 돌려받기 위한 그들의 행동에 참여하고 그들이 그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하라는 명령이다. 평화가 종말론적으로 그려지는 경우에도 그것은 평화권 실현으로서의 평화와 그 향유를 역사 밖으로 밀어내고 단지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 종말론적 이해를 역사 안으로 끌어들여 사유와 행위의 준거로 삼고 이를 위해 종말론적 열정으로 일하라고 부르는 초청장이다. 이를 외면하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일 수 없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신학은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전제 아래 성서가 그리는 평화상(像)을 살펴보자. 그것은 평화권 실현으로서의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이 방향 없는 것이 아님을 보여줄 것이다. 그런데 이를 다루기에 앞서 사사시대의 평화체제 실험을 짤막하게나마 언급해두는 것이 좋겠다. 평화체제 수립이 결코 공허한 것이나 비현실적인 것이 아님을 말하기 위해서다.

사사기의 평화 이해

사사 시대는 권력에 의한 압제를 거부하고 균등한 토지분배를 통해 평등과 평화의 경제적 기초를 마련했지만, 그 실험은 반복되는 전쟁과 부패 때문에 결국 실패하고 만다. 그렇지만 군주제 국가들 틈바귀에서 비국가체제의 평등·평화 사회가 전쟁과 식민지 경험을 수차례 반복하면서도 200여년 동안이나 유지될 수 있었다면, 그 체제가 그만큼 경쟁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그 체제의 붕괴가 전쟁을 포함한 외부 세력의 적대행위 때문이 아니라 부정부패에 대한 내부의 반발 때문이었음은-전쟁은 이스라엘의 군주제 요구에서 단지 이차적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삼상 8장)-그 체제 구성원들의 지향과 의지 외에 ‘공정성’이 그 체제 유지에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일깨워준다. 공정성 훼손은 억울한 자들과 부당한 이익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평화권을 침해하고 연대의식을 약화시키고 최종적으로 체제에 대한 불신을 낳을 수 있다. 다시 말해 평화체제의 지속가능 여부는 일차적으로 내부조건에 달려있고, 이 조건은 공정성으로 대표되는 정의임을 시사한다.

ⓒGetty Image

사사기에서 볼 수 있었던 평화·평등 사회의 숨은 전제와 조건이 시편 85편에서는 개념들로 표출되고 있다.

8 나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실지 들으리라
   야훼, 분명 그는 평화를
   그의 백성, 그의 신실한 자들에게 말씀하시리라
   그들이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않도록.
9 참으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깝고
   (그의) 영광이 우리 땅에 내려올 것이다
10 인애와 진리가 서로 만나고
     공의와 평화가 입맞춘다
11 진리가 땅에서 돋아나고
     공의는 하늘에서 굽어본다
12 그렇다, 야훼께서 좋은 것을 주시고
     우리 땅은 산물을 낼 것이다
13 공의가 그(=야훼) 앞에 가며
     그의 발길을 놓으리라

시편의 평화 이해

시편기자는 1-3절에서 ‘과거’의 회복과 용서 사건을 언급하고 4-7절에서 이 사건이 현재 자비와 구원의 사건으로 다시 일어나기를 간구한다.(2) 이스라엘의 배반과 그에 대한 야훼의 분노로 이스라엘은 또다시 비평화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그 상황은 영영 종식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길고 길었을 그의 탄식과 간구의 끝은 새로운 비전과 확신이었다. 야훼는 그의 백성에게 곧 그를 성실히 따르는 자들에게 평화(샬롬)를 선포하실 것이다. 이 평화는 구원의 표지로서 그들이 과거로 퇴행하지 않게 할 평화이다. 그러한 것으로서의 평화는 또한 야훼의 영광이 내려오는 자리이다.

거기서는 비평화적 요소들이 지배할 때 자취를 감췄던 인애와 진리와 공의와 평화가 함께 어우려져 나타나고 파괴되었던 자연이 회복된다(호 4,1-3 참조).(3) 독자는 시인이 그 감격스러운 변화를 '입맞추다'와 '만나다'는 말로 나타내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4)

인애와 진리, 그리고 공의와 평화의 관계

여기서 인애와 진리와 공의와 평화가 서로 어떻게 관련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평화를 공의ㆍ정의와 연결지은 것은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관계는 이사야 32:15-18에서 밝혀진다.(5) 이에 따르면 공의ㆍ정의의 일이 평화이다. 먹거리 생산과 분배가 공의와 정의를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시 지속가능한 평화의 물적 토대가 될 것이다(아래도 참조). 또 이 토대 위에 세워지는 평안과 안전은 정의ㆍ공의의 열매이자 평화의 모습이다. 이는 공의와 정의 없이 평화가 실현될 수 없고 정의와 공의 없는 평화는 평화일 수 없음을 뜻한다. 단순히 전쟁이나 식민지 점령의 종식 같은 것이 평화일 수 없고 평화를 꼭 가져오는 것도 아님은 역사 속에서 수없이 입증되어 왔다.

인애/사랑과 진리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양자는 거짓과 짝할 수 없고 악을 생각하거나 지지할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더 나아가 인애/사랑은 이웃을 향한 불의와 단절을 뜻하는 진리를 기뻐한다 (고전 13: 6). 인애/사랑과 진리가 만난다는 것은 양자의 협력으로 그와 같은 불의가 극복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협력의 최종 결과는 (선과) 공의·정의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애/사랑과 진리는 그 (선과) 정의를 위해 악을 감수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선과) 정의·공의는 인애/사랑과 진리의 인도를 받는다. 이런 의미에서 인애/사랑과 진리는 (선과) 정의·공의와 공속관계에 있다. 그렇다면 평화는 정의·공의를 매개로 인애/사랑과 진리와 상호관련된다.

그러나 평화는 이러한 말들로 표상된 상태에 그치지 않는다. 그 상태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늘과 땅이 일하며 조화를 이룬다. 그렇지만 그 결과인 풍요는 그 상태의 지속을 위한 물적 조건이자 토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없으면 안 되지만, 그것이 관심의 초점이 되거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시인은 이를 그 진술 앞뒤에 하나님의 정의·공의를 배치함으로써 풍요가 그것에 종속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강조한다(마 6:24-34도 참조). 풍요의 분배가 정의·공의에 따라 이루어질 때 평화권의 실현으로서의 평화가 흔들리지 않고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이사야 45:8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하늘아 위에서 뿌려라
 구름아 공의를 쏟아라
 땅아 열려라
 구원이 싹트고 
 공의가 움트게 하라
 이 일을 모두 나 야훼가 창조하였노라

호세아서가 그리는 평화

하늘과 땅의 조화는 호세아 2:18-22가 그리는 대로 풍요로 이어지지만, 그것은 공의ㆍ정의가 동행할 때에만 땅의 사람들이 골고루 누리는 풍요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땅의 풍요가 위에서처럼 공의·정의로 바꿔 표현된 수 있을 것이다. 물적 기반이 공의·정의의 통제 아래 있을 때 평화는 실현된다. 그 평화의 모습은 사 65:17-25, 특히 21-23절*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이 집을 짓고 (거기) 살겠고
 포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그들이 지었는데 타인이 사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만들었는데 타인이 먹는 것이 아니다.
 내 백성의 날들이 마치 나무의 날들 같으리라
 내가 선택한 자들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누리리라
 그들이 힘들여 한 일이 헛되지 않으리라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갑작스런 불행을 당하지 않으리라

자기가 지은 집이나 자기가 가꾼 포도를 타인 곧 권력에게 빼앗기지 않고 고통 가운데 낳은 자녀들을 죽음의 세력에게 앗기지 않고(6) 오래오래 사는 소박한 모습이다. 그러한 나라가 길이길이 보전되는 소망이다. 이처럼 폭력과 착취, 전쟁과 자연재해가 없고 게다가 맹수들도 창조되던 때처럼 풀을 먹는다(25절)(7)

그러한 평화가 현실에서는 그야말로 환상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를 이상적인 종말론적 평화상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고 말 것인가? 최소한 그것은 그것에 비춰 우리의 현재를 반성하는 준거가 되고 또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 지점이 어디인지를 보여준다. 이것이 종말론이 수행하는 기능들 가운데 하나이다. 종말론적 평화상은 우리를 평화권 실현과 평화수립을 향해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다.

구약성서가 말하는 난민 문제

그 가능성의 의미를 남북문제, 폭력문제, 성소수자 문제 등 여러 분야에서 시험해볼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현재 우리 사회와 교회가 부딪히고 있는 난민문제와 관련해서 간단하게나마 확인해보고자 한다.

난민은 외국과의 전쟁이나 내전 뿐만 아니라 인종적·정치적·종교적 또는 그밖의 다른 이유에 의한 박해 등으로 자기 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고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다.(8) (우리나라 역시 긴 난민배출 역사를 가지고 있고 현재도 그렇다.)(9) 이들을 ‘어떻게’ 맞이해야 한다는 당위적 요구는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들은 천사나 하늘의 선물이 아니다. 그들 나라의 불행이 우리에게 천사나 선물을 보내기 위한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능력 이상으로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들과 다를 것 없는 그냥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을 공포의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스스로를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근거 없는 우월의식이고 또한 차별이다.

난민들이 난민이 된 이유는 그들 나라의 비평화적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일체의 폭력을 거부하며 평화롭게 살기를 온몸으로 추구한다.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이 평화를 찾는 간절한 부르짖음에 대한 평화의 응답이다. 이것은 우리의 평화 감수성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 우리 내부의 비평화적 요소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함으로써 평화의 꿈에 한발 다가서게 할 것이다.

이사야서에는 이렇게 응답하도록 직간접으로 요구하는 본문들이 둘 있다. 이사야 16,1-5에서 야훼는 모압에게 그들이 유다 난민들에게 피할 곳을 제공하고 숨겨주고 보호해야 한다고 요구한다.(10) 그러나 모압은 이 청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 그 결과 모압에게는 재앙이 계속 선포된다. 이와 달리 이집트는 이사야 19:16-25에 의하면 유다 난민들(!)이 정착해서 다섯 성읍을 이룰 수 있게 한 탓에 하나님에게서 '내 백성 이집트'라는 말을 듣는다. 이처럼 이들의 운명을 가른 것은 한 가지 난민수용 여부였다. 이에 대해 유다 난민이니까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성서를 비성서로 만드는 비신앙적 행위다.

이것이 난민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라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 이 본문들과 함께 마태복음 7:12의 황금률도 우리들의 태도 결정에 도움을 줄 것이다. 그에 따라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내가 난민으로 다른 나라에 간다면 나는 그곳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맞이해주기를 바랄까? 그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받아주고 도와주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찾아온 그들의 평화권을 인정하고 그들을 도와야 한다. 이것이 사랑이라고 성서는 말한다. 이 사랑의 첫걸음은 우리에게 평화로 가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난민수용은 그 나라에서 난민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 똑똑히 인식하게 하고 그 해결을 위해 노력하도록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성서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평화상은 이상적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한편으로는 평화의 조건들을 밝혀주고 평화권 실현으로서의 평화상(像)을 보여주며 이를 기억하고 평화를 위해 일하도록 우리를 부른다. 비평화적 요소들이 단번에 모두 제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각각의 자리에서 평화권의 실현을 위해 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 평화를 준비하는 길이다. 이 각자의 길들이 한 지점에서 만나는 날 저 아름다운 평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미주

(미주 1) 1969년 21차 국제적십자사 총회가 '인간은 영구평화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선언하였고, 1976년 2월 27일 유엔 인권위원회가 평화권을 인정하고, 78년과 84년 유엔총회는 '평화권 선언'을 채택하였다. 2010년의 '산티아고 평화권 선언'은 매우 중요한 선언이지만, 소위 '예방전쟁'을 평화에 대한 범죄로 규정한 1부 13조 7항에 반대하는 미국과 그 동조국들에 의해 유엔 채택이 무산되었다.
(미주 2) 시편 85편은 야훼를 2인칭으로 부르는 1-7절과 3인칭으로 부르는 8-13절로 구분되고, 1-7절 첫 단락은 하나님의 역사를 ‘과거형’으로 서술하는 1-3절과 그에게 간구하고 질문하는 4-7절로 다시 나눠진다. 둘째 단락은 1인칭으로 말하는 자의 의지와 야훼에 대한 신뢰를 말하는 8-9절과 거기 언급된 평화와 구원을 묘사하는 10-13절로 다시 나눠진다.
(미주 3) 공의와 정의는 한 쌍을 이루므로 아래에서는 필요에 따라 공의와 정의로 표기함.
(미주 4) 에바흐는 본문의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입맞추다’가 재귀형도 아니고 목적어도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싸우다’는 뜻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주어가 복수일 때 목적어는 ‘서로’라는 의미의 부사구로 대체될 수 있다. 그러면 여기에 그 어구가 없는 것은 그 뉘앙스를 문맥에서 읽어낼 수 있기 때문에 시적 간편성을 위해 생략된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만나다’는 재귀형으로 나온다.
(미주 5) 사 32,15 저 높은 곳으로부터 영이 우리에게 부어지면 광야가 밭이 되고 밭이 숲으로 여겨지리라
16 광야에 정의가 살고 공의가 밭에 거하리니
17 공의가 이룬 일이 평화요 공의가 하는 일이 영원한 평온과 안전이다
18 내 겨레가 평화로운 집과 안전한 거처와 편안한 쉼터에서 살리라
(미주 6) 이는 과거에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음을 반영할 것이다.
(미주 7)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고
뱀은 흙이 그의 양식 되리라
나의 거룩한 산에는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미주 8) 산티아고 평화권 선언 1부 9조 ‘난민의 지위에 관한 권리’가 난민협약보다 더 현실적인 난민 이해를 보여준다.
(미주 9) UN Data, Table with data on Refugees, Rep. of Korea 참조.
(미주 10) 고대역본들이 4절의 나의 쫓겨난 자들 곧 유다 난민들을 모압 난민으로 고쳐 읽고 다수의 현대 역본들이 이를 따르지만, 본문을 그대로 두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4b-5절이 유다에 대한 폭력의 중지와 회복을 노래하고,16:6 이하가 모압에 대한 심판의 원인을 그 교만으로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상기 교수(한신대)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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