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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찍어대던 율법의 낙인을 던져버리자복이 전파되기 위해서(갈 3:14)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19.01.06 22:37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2019년 첫 번째 말씀입니다. 지난 달란트 비유에 대한 말씀에서 조금 더 나아가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먼저 짧게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약속하신 후에, 그에게 ‘복이 될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이런 약속을 하십니다. “너를 축복하는 이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이에게 내가 저주하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이 된다’고 하신 말씀은 바꿔 말해서 ‘복의 통로’가 되라는 말씀이고, 이는 아브라함에게 내려진 복이라기보다는, 온 세상에 복을 전하는 존재가 되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해야 할 일은 다른 이들로부터 ‘축복 받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축복할 때에 하나님의 복이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축복 받는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가야만, 하나님의 복이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올해 여러분들이 세상으로부터 축복 받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라고, 그렇기에 또한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전하는 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기에 오늘은 우리가 남들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먼저 명심해야 할 점을 사도 바울의 이야기로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안디옥 사건

사도 바울이 율법을 어떻게 다루었는가의 이야기는 이미 로마서를 통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바울은 분명 율법을 완전 폐기처분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율법은 지금까지 우리의 길잡이였다고 말합니다(갈3:24). 또 로마서 7장을 보면, 선한 일을 하려고 생각하는 일 자체가 마음에 악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롬7:24).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고리를 끊으셨고, 이제 우리는 죄의 길을 완전히 떠나 하나님의 길을 걷게 되었기 때문에 선이냐 악이냐를 고민할 이유도, 율법도 의미가 없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율법이 잘못되었다거나 폐기처분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악’을 완전히 버렸기에 더 이상 의미가 없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아직 악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이 선을 향한 길잡이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주장을 정리해보면 그래도 율법의 존재 의의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는 듯 합니다만, 바울 서신을 읽다보면 때때로 율법 폐기하자는거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 바울과 베드로 ⓒGetty Image

바울은 왜 이렇게까지 율법에 비판적일까? 저는 그 해답을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한 사건에서 찾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1-14절에 나오는, 바울이 안디옥에서 베드로를 책망했던 사건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전반부를 보면, 바울은 초대교회의 중심으로 여겨졌던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방인 선교에 대한 권한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방인 선교 권한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을 선교 대상으로 인정했다는 의미이고, 할례에 의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물론 예루살렘 교회 내에서는 이에 대한 논쟁들이 있었겠지만, 바울은 교회의 인정을 얻었고,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던 중에 베드로를 비롯한 몇몇 유대인들이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공동식사를 나누는 일이 생깁니다. 식사를 나누던 중에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함께 있던 유대인들, 바울의 동역자였던 바나바는 그 식탁을 떠나게 됩니다. 무할례자들과 식사를 나눈 일로 문제가 생길까봐 그것이 걱정되어서 식탁을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베드로가 식탁을 떠난 이유가 정확하게 어떤 법에 근거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무할례자라고 해서 무조건 식탁을 나눌 수 없다는 법은 없기 때문에 그 식탁에 있던 이방인 중에 함께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있었는지, 그 식탁에 올라온 음식이 부정한 음식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혹은 출애굽기 12장 48절에 따르면 유월절은 무할례자들과 함께 식탁을 나눌 수 없다는 법이 있는데, 이들이 식탁을 나누던 시기의 문제였을 수도 있습니다.

정확이 무슨 문제가 원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베드로는 아마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율법 중심의, 혹은 할례자 중심의 선교 집단과 이방인 중심의 선교 집단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질지도 모르기에 그 자리를 떠난 것으로 여겨집니다. 만약 베드로가 이러한 갈등과 분열을 걱정하여 자리를 떠났다면, 누구보다도 교회의 갈등과 분열을 염려했던 바울이 베드로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베드로를 질책했습니다.

바울이 왜 베드로를 질책했는가? 학자들이나 많은 목사님들은 신학적이거나 신앙적인 이유를 들어가면서 이를 해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율법에서 벗어났어야 하는 베드로가 여전히 율법에 매여 있었기에 질책했다고도 하고,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 전도 사건과 베드로가 환상을 보았던 사건을 근거로, 베드로가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를 깨우쳐주기 위해서 질책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실질적으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성소수자 선교를 하는 교회에 가서, 응원도 하고, 성소수자 분들과 함께 밥을 먹다가, 성소수자 목회를 반대하는 노회의 어떤 목사님이나 장로님이 그쪽으로 온다는 얘기를 듣고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버린다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제 행동이 어떻게 비치겠습니까? 그곳에서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은 ‘쟤 왜 온거야?’ 하고 생각하실 겁니다. 이렇게 자리를 떠버리는 행동은 선교 대상자들을 향한 모욕이고, 또한 상처를 주는 행동입니다.

자리를 떠난 사람 입장에서는 괜한 소란을 만들지 않겠다는 의도가 있었을지 몰라도,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상처를 남길 수밖에 없습니다. 떠난 사람이 속으로는 자신들을 ‘좋지 않은 존재’, 또는 ‘바르지 않은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1차 선교 대상은 이방인입니다. 안디옥에서 베드로가 보인 행동은 자신의 선교에 찬물을 끼얹는 행동이고, 더 나아가 자신이 선교하고 있는 이방인들을 부정한 존재, 식탁을 함께 나누지 못할 존재로 규정짓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니 화가 나지 않았겠습니까? 베드로를 찾아가서 ‘뭐하는 짓거리냐!’고 따지지 않았겠습니까?

율법의 낙인

저는 바울이 율법에 대해서 이토록 비판적인 이유는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율법주의가 우선적으로 자신의 선교에 방해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자신의 선교 대상인 이방인들을 ‘부정한 존재’로 낙인찍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어떻게 역사하고 계신지를 깨달았습니다. 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복을 내리셨는지, 왜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믿고 따르라고 명령하셨는지, 하나님의 섭리, 계획을 깨닫고 이방인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결코 유대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이방인으로 전도대상을 변경한 찌질한 선교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이방인으로 선교 대상을 변경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서 선택받은 자들이 먼저 선한 일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선택 받은 자들이 선하게 살아감으로 모두가 행복하고 평화로운 모습을 보인다면,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도 그 공동체로 나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선한 모습을 보여주라고 그 지침인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받은 이들은 율법을 통해 선한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악한 사람을 규정하고 정죄하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바울이 율법주의를 비판하면서 하고 있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이러한 낙인찍는 행위를 그만두라는 이야기입니다. 죄인 규정하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도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전해주셨습니다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우리 눈에 있는 들보는 왜 보지 못하냐고 말씀하셨습니다(마7:1-5; 눅6:41-42). 하나님의 복을 전해야 하는 우리가 복을 전하기에 앞서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율법의 낙인을 던져버리는 일입니다. 보통 이 이야기를 ‘나에게 찍혀있는 율법의 낙인을 벗어버리자’라고 잘못 생각하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남에게 찍어대던 율법의 낙인을 던져버리자’입니다.

누군가를 죄인으로 규정하고, 남의 악을 들추기에 앞서서 나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고, 나의 잘못을 하나님 앞에 뉘우치고 회개하고 다시는 행하지 않는 일이 먼저입니다.

율법으로 저주함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평소에도 곧잘 드리는 말씀이기에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도 아니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도 아닙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흔히 보게 되는 경우에 관한 것입니다.

만약에 제가 설교 말씀을 전하면서 이런 말씀을 했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교회 출석 제대로 하지 않고, 헌금생활 제대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 받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흔히 들어왔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어떤 성도님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교회를 계속 빠졌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혹은 어떤 성도님이 헌금생활을 안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선포한 말씀에 따르면 이 분들은 벌 받을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 분들이 그냥 잘 사는 겁니다. 교회도 안나오고 헌금생활도 안하는데 잘 삽니다. 그러면 말씀을 선포한 저는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솔직하게 이런 경우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제가 지금까지 많은 목사님들께 들어왔던 이야기는 이겁니다. “언젠가 크게 어려운 일이 생길거다.”

어쩌면 여러분들도 알게 모르게 이런 생각을 갖고 계셨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를 듣고나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드십니까? 목회자가 교회 안나오는 성도의, 또 헌금생활 안하는 성도의 불행을 바라고 있다는 점입니다. 언젠가 크게 넘어질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건 저주 아닙니까?

그 분들이 잘 살지 못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그 분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할겁니다. “교회를 안나오고 헌금생활 안하니까 그렇게 힘들게 살지” 자신이 선포한 말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아니면 자신이 강단에서 거짓말 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목회자는 어렵게 사는 성도님들을 향해서 마음속에 저 사람은 ‘벌 받은 사람’, 혹은 ‘저 사람은 벌 받을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고 그 사람을 대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역시도 그 사람을 향한 저주 아닙니까?

창세기 12장 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라고 말씀하셨지만, 율법을 손에 든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 자신을 저주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테두리 밖에 있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저주 받을 사람으로 낙인찍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복이 전달되지 않도록 복의 빗장을 채워 버렸습니다.

나가는 말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복이 온 땅에 전해지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복을 주신 이유,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모두 하나님의 복이 온 땅에 전해지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혹시나 우리가 나를 위해 복을 빌어주고, 그렇기에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교회에서 배워왔던 율법이라는 낙인 때문에 벌 받을 사람, 저주받을 사람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복이 전해지지 않습니다. 복이 전파되지 않습니다. 이 땅은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은 나에게만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제대로 선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할 때만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남이 나를 칭찬하고 복을 빌어줄 수 있도록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과 은혜가 그들에게도, 세상 구석구석에도 전파될 줄로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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