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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3.1운동100주년위원회, 3.1운동 100주년 한국 그리스도인의 고백과 다짐 발표선언문에 대한 온라인 서명과 의견 받고 있어
이정훈 | 승인 2019.01.12 19:29

“우리는 3.1운동 백주년을 맞아 이웃과 함께하는 교회로의 갱신을 선언하고자 합니다.”

한국기독교3.1운동100주년위원회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3.1운동 정신을 계승하고 한국사회의 미래 방향을 제시하는 문서 “3.1운동 100주년 한국 그리스도인의 고백과 다짐”을 공개하며 이 문서의 목적을 이와 같이 밝혔다.

한국기독교3.1운동100주년위원회 2019년 1월 11일 공개하고 온라인을 통해 서명과 의견을 받고 있다. 온라인 서명을 위한 홈페이지는 주소는 http://smailcentennial.kr(앞의 인터넷 주소를 클릭하면 서명과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페이지로 이동한다)이며 소셜 아이디(네이버, 카카오, 구글)로 로그인 해 서명에 참여할 수 있다.

이 문서는 ▲ 행복, ▲ 공동체, ▲ 다양성, ▲ 여성, ▲ 청년, ▲교육, ▲ 경제정의, ▲ 생태, ▲ 시민사회, ▲ 한반도의 평화, ▲세계평화, ▲죄의 고백 등 12개 항목에 걸쳐 교회 갱신과 사회갱신에 대한 의견을 내놓았다.

이 문서의 최종발표일은 2019년 3월 1일로 예정되어 있으며 2019년 1월 11일부터 2월 28일까지 온‧오프라인에서 서명과 의견을 받아 최종 발표문서에 반영할 계획이다.

이 문서는 2018년 한해 동안 한국기독교3.1운동100주년위원회 한국그리스도인헌장 준비위원회(준비위원장 장윤재 교수)로 모인 20여 명의 학자(신학, 역사학, 사회학, 경제학, 종교학, 여성학 분야)와 활동가들이 7차례의 집담회와 수차례의 준비모임을 거쳐 준비한 것이다.

3.1운동 100주년 한국 그리스도인의 고백과 다짐
(최종수정안)

I. 시작하는 말

백 년 전 우리 선조들은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선언하면서, 힘의 시대가 가고 정의와 인도의 새 시대가 다가왔음을 외쳤습니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나 과거 제국주의 침략전쟁으로 찌든 힘의 시대가 무한 경쟁이란 이름으로 힘없는 자들을 약탈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로 탈바꿈하여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힘없는 이들의 탓으로 돌리는 이 사회 곳곳에서 상처 입은 마음의 탄식소리가 들려옵니다. 이에 우리는 다시금 힘의 시대를 극복하고 상생의 시대를 열어 가고자 합니다. 

백 년 전 선조들은 이천만 민중의 뜻을 모아 민족의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오늘날 그 민중이 남북한, 재외동포, 다문화 가정을 포함하여 팔천만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수적으로 늘어났을 뿐 아니라 구성상으로도 다양해졌습니다. 그 때는 이천만 민중이 나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주권재민의 원칙을 가지고 자주독립을 선포하였습니다. 이제는 다양성 속의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힘없는 자들의 생활상의 자주와 독립을 의미하는 실질적인 민주화와 복지사회의 건설을 선언해야 할 때입니다. 

백 년 전 선조들은 목 놓아 독립 만세를 부르며 하나가 되었습니다. 만세시위의 장은 국민통합의 마중물로서 오늘날의 한민족을 만들어낸 거대한 용광로였습니다. 그 동력으로 우리는 꿈에도 그리던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외세의 힘겨루기 속에서 국토는 두 동강났고, 급기야 동족상잔의 비극적 전쟁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에 우리는 남북으로 갈라진 민족을 하나로 잇고,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를 이룩하는 일이야말로 오늘날 3.1정신을 되살리는 길이라고 고백합니다. 

백 년 전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의 현장에서 민족과 하나 됨으로써 하나님의 정의를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는 더 이상 옛 사람이 아니라 새 사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정의와 인도를 따르는 새 사람이 만들어갈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이 가득했던 그 때와 비교할 때 지금의 한국교회는 타성에 젖어 더 이상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지 못하는 기득권의 아성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에 우리는 3.1운동 백주년을 맞아 이웃과 함께하는 교회로의 갱신을 선언하고자 합니다.

II. 우리의 고백과 다짐

1. 행복

행복은 인간의 기본권이요, 존재의 힘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은 세대와 계층을 막론하고 모두가 불행하다고 호소합니다. 어린이들은 노는 법을 잊은 채 공부기계가 되어 사느라 불행합니다. 청소년들은 관계적 힘을 키울 기회를 박탈당한 채 살인적인 등급 컷의 세상에서 홀로 달리느라 불행합니다. 청년들은 생존을 위협하는 불안정한 일자리로 인해 불행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장년은 위아래로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느라 정작 나를 잃어 또 불행합니다. 파란만장한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노년 역시 고독과 빈곤으로 고통 받으며 불행합니다. 2018년의 우리는 이렇게 모두가 다 불행합니다. 이렇게나 불행한 사회가 되는데 혹 무관심함으로 동조한 것은 아닌지,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내 몫만큼 행복한 세상을 만들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경쟁의 달리기를 잠깐 멈추고 나를, 너를, 우리를 돌아봅시다. 이렇게 달려서 얻는 승자독식으로는 어느 누구도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생각’을, ‘쉼’을 우리 공동체 안으로 가져와야 하겠습니다. ‘마주봄’을, ‘스며듦’을, ‘함께 세움’을 경험하고 그 능력을 길러낼 수 있도록 제도와 프로그램과 개인의 선택이 함께 가야하겠습니다. ‘성찰을 위한 느림’과 ‘삶의 균형’와 ‘약자와의 공존’을 선택하더라도 홀로 외톨이가 되거나 가난해지지 않는 세상을 만듭시다. 행복은 함께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백 년 전 자주와 독립을 향한 우리 공동체의 외침에 교회가 함께 했듯이, 지역마다 넘치는 교회가 ‘우리의 행복’을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가 함께,’ 그것이 교회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2. 공동체

오랜 시간 이웃집 남자가 주검으로 빈 방에 방치되어도 아무도 몰랐습니다. 가난하고 외로운 이웃이 가족에게조차 자기 처지를 알리기는커녕 도움의 손도 내밀지 못하고 자기 목숨을 끊어버립니다. 수많은 이들이 죽도록 일해도 몸과 맘 편하게 기대고 쉴 곳이 없이 여기저기 떠돌다 끝내 일터로부터 버려져 삶을 포기합니다. 언제 쓸모없는 인간으로 전락해 고립된 삶을 살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이 우리사회를 무섭게 휘감고 있습니다. 백 년 전 한국 민중들을 압박하던 식민주의의 음침한 얼굴은 이제 신자유주의의 옷을 입고 우리들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이 불안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필사적인 경쟁, 자기계발 등의 각자도생 담론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망을 더 찢어놓고 사람들을 소비사회의 무한욕구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나답게 안심하며 살 수 있는 곳이 점점 사라져갑니다. 가족도, 이웃도, 회사도 더 이상 나를 지켜주고 받아줄 곳이 아닙니다. 서로를 지탱하고 서로 돌보면서도 나다움을 존중받고 살 수 있는 곳은 이제 영영 찾을 수 없는 것일까요? 서로의 연약함을 받아들이고 서로 지지하면서도 스스로의 힘과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연대와 자립’이 살아 숨 쉬는 새로운 공동체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환대와 우정, 하나님 주신 생명다움으로 이 신자유주의의 불안과 고립의 전략을 하나씩 꺾어나갈 우리들의 공간을 소망하며 함께 만들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3. 다양성

‘세계화’는 더 이상 이념도 가치도 아닌, 우리의 현실입니다. 다른 지역, 다른 국가, 다른 성적 정체성, 다른 종교에 속한 이들이 일상 속에서 서로 교차합니다. 경제 활동을 위해서도, 정치나 시민운동을 하면서도, 혹은 여행이나 심지어 생존을 위해서 자신에게 익숙한 ‘경계’를 넘나듭니다. 서로 다른 신념과 가치관, 문화와 생활방식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만나는 이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이 될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싸움터’가 될 지는 우리의 태도와 결단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는 이해와 포용보다 오해와 배타로 인한 사건과 사고들이 더 많아 안타깝습니다. 이러한 때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가 하나’라는 정신으로 세워진 교회가 다양성을 포용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다른 종교와 화합했던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모습을 더 많이 보인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는 ‘혼합주의’와 ‘이단’이라는 언어를 사용하여 심지어 기독교 내부의 다양성마저 억압한 역사가 있습니다. ‘이교’와 ‘미신’이라는 언어를 사용하여 무속, 유교, 불교 등 전통종교와의 관계를 단절했고, 최근에는 이슬람을 비난하여 무슬림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공포를 증폭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탈북민이나 이주노동자, 난민과 같이 고향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근거없는 적대감이 번지는 것을 보면서도 방관하거나 부추겼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해방과 구원의 약속을 믿고 뜻을 모은 여러 족속들과 동행했습니다. ‘다름’은 ‘틀림’이 아닙니다. 1919년 한국교회는 천도교, 불교와 연대하여 제국주의라는 ‘틀림’에 함께 대응했었습니다. 3.1운동 백 년을 맞는 이 시점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다양한 모습을 인정하고, 온 인류가 겪고 있는 사회적, 문명적 위기를 함께 극복하는 동반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4. 여성

늘 있었기에 너무 익숙한, 우리사회의 여성혐오는 최근 그 민낯을 드러냈습니다. 민주주의를 염원하던 촛불광장에서 조차 여성혐오를 아무렇지도 않게 외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성장의 주역은 여성이라고 칭송해 온 교회 역시 여성을 차별해 왔습니다. 아니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습니다. ‘세례 받은 날이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는 어느 전도부인의 고백으로부터 지식 여성의 대부분은 ‘교회 물을 마신 여자’라는 신문 기사에 이르기까지 초기교회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차고 넘칩니다. 당시 여성에게는 교회가 복음이자 희망의 원천이었습니다. 하지만 교회 내에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게 존중받지 못하고 있으며 이제 가부장적 문화에 질식한 젊은 여성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더 이상 여성에게 희망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한국의 여성들은 가정과 직장으로 상징되는 인간 삶의 자리에서 계속해서 차별과 폭력을 당해왔습니다. 요즈음 ‘미투’와 ‘위드유’ 운동으로 한국사회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내 삶은 너의 포르노가 아니다”라는 절규가 거리를 가득 메웁니다. 젠더폭력에 대한 여성들의 집단적 항거는 성평등 사회를 강력히 요청합니다. “힘의 시대가 가고 정의와 인도의 시대가 온다”고 외친 3.1정신을 기억합니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힘센 자가 약한 자를 유린하는 폭력에 찬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발전이라는 가면과 조화라는 미명으로 포장된 폭력은 폭력으로 인지되지 못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젠더폭력이 창조의 질서도, 음양의 조화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미투’와 ‘위드유’ 운동은 위력에 의한 성범죄,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그 모든 작태의 중지를 선포합니다. 가부장적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젠더폭력에 공모한 말과 행동을 겸허히 성찰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묵인되어온 불의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는 여성들의 ‘불편한 용기’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열 것입니다. “남녀노소 없이 어둡고 답답한 옛 보금자리로부터 활발히 일어나 삼라만상과 함께 기쁘고 유쾌한 부활을” 꿈꾸던 백 년 전의 3.1선언이 실현되도록, 더 이상 젠더폭력을 방관하지 않는 사회적 조건과 환경을 함께 만들어가야 하겠습니다. 

5. 청년

3.1운동의 동력은 청년이었습니다. 1919년 2월 8일 동경에서 독립을 선언했던 청년들의 활약은 3월 1일로 이어졌습니다. 학생들은 전단을 돌리며 만세운동을 알렸습니다. 탑골공원에서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하여 시민들의 심금을 울린 것도 학생대표였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 역사 속에서 청년은 수없이 불의에 항거했습니다. 1980년 5월 18일 민주화운동도, 1987년 6월 항쟁도 청년의 주도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처럼 청년들은 사회 개혁의 주체이자, 열정의 대명사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청년들은 너무나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현실을 지옥에 빗대며 자조하고, 스스로 계급을 나누며, 삶의 의미를 포기하고 있습니다. 일자리, 주거, 노동, 학자금 등 수많은 문제들이 청년들을 옥죄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버티기도 힘든 현실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찾거나, 꿈을 꾸거나, 미래를 기대하는 청년들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기독청년운동 또한 점점 약화되고 있습니다. 청년들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라는 암흑의 시대에도 청년들이 저항했듯이, 현대의 청년들도 서로 공조하며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돕기 위한 청년조직이 생겨나고, 서로의 고통을 나누며, 서로의 행복을 찾으며, 또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며 공존하고 있습니다. 주거 문제에 부딪히는 청년들은 집을 서로 나누고, 협동조합을 통해 서로 공유하며 다시 일어납니다. 기독청년운동은 서로 교류하고, 현실을 바라보며 다시 조금씩 움직이려 합니다. 지금의 청년들은 머지않아 찾아올 한반도의 평화를 실질적으로 만들어가야 할 세대입니다. 연대의 힘으로 다시 청년들이 희망과 평화를 외칠 때입니다.

6. 교육

2011년부터 한국의 자살률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독 10대의 자살률은 상승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자살을 생각하는 이유의 1위는 학업 스트레스입니다. “배우고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옛 성현의 물음에 청소년들은 ‘죽고 싶다’고 대답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오래전부터 왜곡된 교육시스템이 청소년들을 병들게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과도한 학업량과 경쟁에 짓눌린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모릅니다. 전인교육이 무너졌다는 한탄은 몇 십 년째 우리 주위를 공허하게 맴돌기만 합니다. 백 년 전 독립을 선언했던 선조들은 독립이 “억눌리고 오그라들고 사그라진 양심과 위엄과 체면을 일으켜 세우고 각 개인의 인격을 정당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우선 필요한 일”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교육은 양심, 위엄, 체면 등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람으로서의 인격을 발전시키는 일 보다 ‘더 비싼 노동상품’을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왜 독립하려고 했는지를 잊어버린 셈입니다. 

진짜 문제는 우리의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경쟁이 사회를 압도하는 법칙이 된 이상 교육 역시 시장화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 고개를 젓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왜곡된 교육을 내버려 둔 채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고 존엄한 인간으로 함께 성장하기 위한 교육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깊이 생각하고, 멋진 꿈을 꾸고, 따뜻하게 공감하며,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친절한 태도로 이웃을 대하는 사람, 그래서 함께 어우러져 살고 싶어지는 사람을 만들기 위한 교육 말입니다. 교육은 더 이상 시장이 될 수 없다고 우리 함께 선언합시다.

7. 경제정의

3.1 독립선언문은 일제의 침략주의와 강권주의 아래 민족의 생존권과 자존심이 얼마나 심각하게 훼손되었는가를 지탄하며 시작합니다. 백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경제적으로는 훨씬 부유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양육강식의 질서 아래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로 전락했는지도 모릅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비정규직율, 세계에서 가장 긴 연간 근로시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노인 빈곤율,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 대기업의 ‘갑질’ 관행과 오너 집단의 행패 등, 다른 어느 선진국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기형적 단면들이 우리 주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수출기업 중심의 편향된 성장정책과 정경유착, 관치금융, 노동자 탄압, 환경파괴 등은 사회 곳곳에 깊은 상흔을 남기고 있습니다. 성장제일주의와 복지에 대한 무관심은 취약한 연금제도, 과도한 의료비 부담, 치솟는 부동산가격, 과중한 상가임대료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급기야 ‘N포세대’의 등장과 함께 인간의 가장 기본권에 속하는, 단란한 가정을 일구는 것조차 사치로 치부되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성장의 과오와 아픔을 극복하고 <기미독립선언>에서 주창한 “민족의 한결같은 자유발전”을 꾀하는 것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닐까요? 이는 정규직 중심의 안정적인 일자리를 확충하고, 저녁이 있는 삶을 가꾸고, 상생의 기업문화를 이룩하는 일이며, 교육, 의료, 주거, 연금 등의 복지체계를 재정비하고 과감하게 개혁해 나가는 일입니다. 백 년 전 이 땅의 고난 가운데 함께 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이러한 과업 가운데 우리와 함께 일하심을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포기하고 주저앉지 않을 이유입니다. 

8. 생태

3.1운동 백주년을 앞둔 이번 여름, 111년만의 폭염으로 한반도가 펄펄 끓었습니다. 열대야가 한 달 이상 지속되면서 사람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고, 에어컨을 켤 수 없는 경제적 약자들은 더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아름다웠던 삼천리금수강산이 기후변화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뚜렷한 사계가 사라지고 아열대의 기후로 변하고 있습니다. 한반도 인근 바다에서 잡히는 물고기의 종류가 바뀌고 있습니다. 한반도뿐만이 아닙니다. 북극의 얼음이 녹고 지구 곳곳에서 기상 이변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지구는 더 이상 건강한 지구가 아닙니다. 지구 온난화를 되돌릴 수 없는 시점에 가까이 와 있다는 과학자들의 경고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인간의 탐욕이 문명의 멸망을 재촉하고 우주적 종말까지 예견케 하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모든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로마서 8:22) 시대입니다. 산업혁명 이래 더 많은 물질적 풍요와 편리를 추구해온 경제성장 전략은 화석연료의 대량소비와 이산화탄소의 대량방출을 의미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후변화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전 지구적인 위기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풀 한 포기 안에서도 우주의 생명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죽어가는 작은 새 한 마리의 신음소리에도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생태적이고 영적인 감성을 길러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고 경영할 권리가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착각에 힘을 보태는 모든 인간중심주의적인 신학과 교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다른 모든 생명들과 지구를 공유하며 함께 사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 새 문명의 빛이 한반도와 지구 위에 가득 비추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9. 민주주의/시민사회

이 땅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하던 망국의 위기 속에서 기독교는 희망의 복음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복음은 우리 민족에 의해 주체적으로 수용되었습니다. 신문명의 전달자로, 새로운 정신의 원천으로 받아들여진 기독교는 민족독립운동의 산실로 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농촌계몽운동, 물산장려운동, 노동청년운동, 체육운동 등으로 민족의 근대화에 이바지했습니다. 그리고 해방 이후 분단과 전쟁으로 이 땅에 폐허가 되었을 때 그 위에 다시 희망의 씨앗을 심으며 한국의 민주주의와 시민사회 건설에 기여했습니다. 한국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복음의 씨앗이 고난의 땅 한반도에 떨어져 민족의 자주독립과 근대국가의 수립 그리고 자치와 협동의 시민사회 건설이라는 풍성한 열매를 맺은 은총의 역사입니다.

3.1운동 백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는 또 다시 깊은 사회적 위기와 대면합니다.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 우리 사회는 경제성장을 이루고 민주화를 성취하는 등 많은 발전을 이루었으나 아직도 분단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꿈을 잃은 사회적 약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민족독립의 꿈은 단지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라다운 나라’를 이루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우리의 역사적 책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권력집단들의 이익추구로 민주주의와 사회정의가 땅에 떨어진 오늘날 시민의 참여를 통해 각종 권력집단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시민 주도의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를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공공의 문제에 대한 시민의 참여와 책임의식을 높이는 시민사회운동을 전개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각자의 인격을 정당하게 발전시켜 주권재민의 근대국가를 이루려고 했던 3.1정신의 완성이 될 것입니다.

10. 한반도의 평화

한국전쟁은 인류 최초의 이념전쟁이었습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열강이 격돌했고, 편을 갈라 이에 동조한 나라들이 살상과 파괴에 참여했습니다. 이 전쟁은 같은 겨레끼리 싸우고 죽인 비극적 동족상잔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한국전쟁’은 같은 마을의 이웃끼리, 심지어 친족과 가족끼리 서로를 증오하고 학살한 ‘작은 전쟁들’의 총칭입니다. 이 전쟁의 상처가 치유되지 못한 채 세대에서 세대로 유전됐습니다. 3년 간의 전쟁은 멈췄지만 냉전(冷戰)이 세기를 넘기면서까지 계속됐고, 적대적 이념의 돌무더기가 민주, 인권, 평화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따뜻한 평화의 봄소식을 전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념 갈등을 부추겨왔습니다.

다행히도 지난 74년 동안 남과 북, 그리고 남과 남을 갈라놓았던 이념의 얼음장벽이 평화의 온기에 빠르게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백 년 전,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화를 의미했던 “봄기운 가득한 천지”가 오늘에야 비로소 기지개를 펴는 것 같습니다. 어렵게 시작한 평화의 길에 가끔은 ‘꽃샘추위’도 있겠지만 한번 시작한 한반도의 봄은 되돌릴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중대한 역사적 전환기에 3.1정신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시대적 소명은 ‘무력’이 아닌 ‘도덕’임을, ‘압제’가 아닌 ‘자유’임을, ‘파괴’가 아닌 ‘건설’임을 천명합니다. 그 소명을 온전히 감당하고 실천할 때, 식민과 분단・냉전으로 인한 고난의 땅이었던 한반도는 동아시아와 세계의 평화가 피어나는 부활의 땅으로 변모될 것입니다.

11. 세계평화

3.1운동 이후 지난 백년을 돌이켜보면 군사주의와 제국주의가 동력이 되어 때로는 파시즘을, 때로는 냉전 사고를 고착시켜 왔습니다. 하지만 3.1운동 백주년을 앞두고 시작된 한반도의 평화프로세스는 ‘위력의 시대’의 상징으로 남아온 한반도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왔습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3.1운동에서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 그리고 87년 6월 항쟁과 2016년 촛불혁명이라는 백년에 걸친 시민혁명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울러 한반도 비핵화와 남북화해의 바람은 위력의 시대를 평화의 시대로 전환시킬 수 있는 새로운 세계질서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불행히도 평화의 방향을 상실한 세계 곳곳에서는 내셔널리즘이 새롭게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브렉시트와 난민문제로 유럽공동체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있고, 세계경찰을 자처하던 미국은 ‘아메리카 퍼스트’로 자국의 이익만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며 세계질서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제국, 중국은 이제 다시 아시아의 맹주로 위상을 확립하려고 합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한 걸음에 달성될 수는 없겠지만 3.1운동 백주년을 맞아 양심과 정의에 기초하며 박애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약자가 강자와 더불어 행복한 새로운 평화가 펼쳐지기를 우리는 소망합니다. 3.1운동 백주년은 과거의 백년이 아니라 앞으로 더욱 빛을 발하는 우리의 ‘오래된 미래’입니다. 이제 우리는 <기미독립선언>이 말하는 “낡은 사상과 묵은 세력”이 된 오늘의 신자유주의와 패권주의를 넘어 세계시민과 연대하여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이 있는 “앞길의 광명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갈 것입니다.

12. 교회와 죄의 고백

3.1운동은 민주공화국의 시작이었고, 시민주권시대의 첫 걸음이었습니다. 단지 저항정신뿐만이 아니라 미래정신도 함께 보여준 국권회복운동이었고 민권운동이었습니다. 또한 모두가 함께 손잡고 이룬 역사였습니다. 일본의 동경, 중국의 상해와 만주, 미국, 그리고 러시아에 흩어진 대한의 민중은 스스로 나라의 주권자임을 선언하면서 대동평화사상에 바탕을 둔 민주공화국의 청사진을 내놓았습니다. 균권(均權), 균부(均富), 균지(均智)의 평등사회가 미래 대한의 핵심이 될 것임을 당당히 밝혔습니다. 여성들은 주권재민을 넘어 민중이 인류역사의 주체임을 선언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민중의 대표로 나섰고, 모든 사람은 자신이 독립된 새 나라의 주인임을 천명했습니다. 대한의 주권은 모든 구성원에게 있으며 그 권리는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권리임을 세계를 향해 단호히 선언한 것입니다. 이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이후 백 년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백 년 전 3.1의 광장에서 민중과 함께 새로운 역사를 썼던 한국교회는 어디로 갔습니까? 물론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교회의 기여도 적지 않았으나 오늘날 한국교회는 종교가 서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군국주의의 망령이 판을 치던 일제 말기, 우리는 교회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식민제국에 민족의 영혼을 팔았습니다. 해방 후에는 치부를 감추려 ‘교회부흥’을 내걸고 ‘반공’의 머리띠를 두른 채 수 없이 많은 무고한 생명들을 권력의 제단에 제물로 바쳤습니다.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 이름조차 갖지 못한 제주 4.3은 한국교회가 역사 앞에 사죄해야 할 ‘원죄’입니다. 한국교회는 성장과 성공에 집착한 나머지 ‘공의의 신’ 야훼 하나님을 외면한 채 ‘풍요의 신’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고통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잊고 그 자리에 거대한 교회당과 고난이 아닌 욕망의 십자가를 세웠습니다. 빈곤과 노동착취,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차별, 비인간화의 다양한 고통이 민중의 일상을 파고들었지만, 교회는 침묵했고 사회적 책임을 외면했습니다. 애써 진실에 귀를 막고 입을 닫은 채 말이 없습니다. 부끄럽게도 우리는 스승을 판 유다, 겁이 많은 베드로와 같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부끄러운 과거사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죄의 고백, 그리고 새로운 다짐이 없이는 결코 미래로 가는 ‘기차’에 오를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에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의 고백을 모아 다음과 같이 다짐합니다.

1. 행복 : 우리는 힘센 사람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불행한 세상을 거부하고 마주보는 기쁨과 함께 사는 삶을 선택하겠습니다.

2. 공동체 : 우리는 각자도생이 살 길이 아니라 ‘함께 사는 세상’이 우리의 나갈 길임을 마음에 새기고 서로 연대하고 협동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3. 다양성 :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포용하고, 서로가 가진 ‘다름’이 함께 어우러지는 더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겠습니다.

4. 여성 : 우리는 여성혐오문화와 차별을 근절하여 모두가 존중받는 성평등한 사회를 만들어가겠습니다.

5. 청년 : 우리는 청년이 꿈꿀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함께 나누고 행동하겠습니다.

6. 교육 : 우리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행복하며 존엄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교육을 실현하겠습니다.

7. 경제정의 : 우리는 왜곡된 경제 질서를 바로 잡고 건강한 복지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한반도 경제공동체를 일구어 나가겠습니다.

8. 생태 : 우리는 기후변화로 대표되는 오늘의 전 지구적 생명의 위기를 직시하는 것이 신앙의 책임임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아름답게 지키고 보존하는 일에 앞장서겠습니다.

9. 시민사회 : 우리는 모두가 행복한 공의롭고 민주적인 시민사회의 건설이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임을 인식하며 시민의 참여를 북돋우고 활성화하는데 앞장서겠습니다.

10. 한반도의 평화 : 우리는 같은 겨레를 갈라놓은 적대와 미움의 벽을 허물고 용서와 화해와 상생의 평화 공동체를 이루겠습니다.

11. 세계평화 : 우리는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과 전쟁과 패권주의를 반대하고 인류의 공존과 공생의 새로운 평화문명을 이룩하기 위해 힘껏 일하겠습니다.

12. 죄의 고백 : 우리는 공의로운 하나님만을 섬기며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겠습니다.

III. 맺음 말

3.1운동은 부활 신앙에 기초한 운동입니다. <기미독립선언> 안에는 “추운 겨울 이후에 만물이 소생하는”,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이 쪼이는”, 그래서 “봄기운 가득한 새로운 땅과 하늘”을 부활로 이해했습니다. 그 힘들고 어둡던 시절, 우리의 선조들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어둡고 답답한 옛 삶의 자리를 과감히 박차고 일어나 삼라만상과 함께 기쁨을 누리는 유쾌한 민족의 부활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3.1운동 백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다시 이 부활의 꿈과 믿음을 이어가고자 합니다.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의 끊겼던 혈맥이 다시 이어지고, 정의가 강물같이, 생명이 바다같이 물결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려 합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세계 만국과 나눌 수 있는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 합니다. 3.1운동 백주년을 맞아 다시 새로운 평화와 정의와 생명의 백 년을 향해 나아가려는 우리 겨레 위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동행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이사야 60:1)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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