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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보잘 것 없는 지혜인가죄의 결과(창 3:1-7)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19.01.13 18:20

오늘 저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원죄를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사실 ‘원죄’라는 표현을 좋아하지도 않고, 우리는 원죄를 가지고 있다는 인식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성경이 이야기하는, 첫 번째 죄가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이야기 살펴보기

우선 선악과 이야기의 상황을 확실하게 정리해 볼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에덴 동산 중앙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가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나무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두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뱀이 하와를 유혹합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보라고 유혹합니다. 하와가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열매를 먹게 됩니다.

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어떤 학자들의 경우, 이 장면에 나타나는 뱀은 악마, 사탄이고 하와를 성적으로 유혹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와에게 성관계를 알게 하였고, 이를 알게 된 하와가 아담도 그러한 관계로 끌어들였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그래서 낳게 되는 첫 번째, 뱀과 하와 사이의 자식이 가인이고, 아담과의 관계에서 낳은 아들이 아벨이라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있다고 봅니다. 나쁜 가인과 착한 아벨을 생각하면 이런 방식의 해석도 나올 수 있고, 가인의 탄생으로 죄가 이어져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애초에 악마나 사탄의 존재가 성경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살펴본다면 이 해석이 맞을 가능성은 상당히 희박해집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하와는 자신이 먼저 열매를 먹고 아담도 이 행위에 동참하도록 합니다. 열매를 먹은 두 사람은 눈이 밝아지게 됩니다. 눈이 밝아진 이들은 자신들이 벌거벗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들이 열매를 먹고 무언가 지식 혹은 지혜를 얻은 건 분명해 보입니다.

자신들이 벌거벗고 있음을 깨달은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습니다. 옷을 입기 시작한 것입니다. 얼마 후에 하나님께서 이들 가까이 오십니다. 하나님이 다가오시는 소리를 들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에 몸을 숨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 있냐고 물어보시자, 아담이 대답합니다. “저희가 벗고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이 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아담은 하와의 책임으로 돌렸고, 하와는 뱀의 책임으로 돌렸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 또 뱀에게 벌을 내리십니다. 삶에서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도록 벌을 내리십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이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그런데 22절에 보면, 이른바 천상회의라고 불리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와 회의를 하는 듯한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생명나무의 열매도 먹고 영생할까 염려하십니다. 그렇기에 이들을 에덴동산에서 내쫓고 동산을 영원히 봉인한다는 결정을 내리십니다.

창세기 3장에 나타나는 이야기를 이렇게 나열해 놓고 보면,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존재했었다는 점과 그것을 먹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선악과는 히브리말로 ‘또브 바라아(ט֥וֹב וָרָֽע)’로 ‘선과 악’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좋음과 나쁨’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선악과는 좋음과 나쁨을 구분할 수 있게 하는 나무, 바꿔 말하자면 지혜의 나무를 의미합니다. 그렇게 보자면, 에덴동산의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지혜나무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경의 거의 처음 부분, 첫 번째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을 어떻게 구분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지혜와 생명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지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담긴 지혜, 또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영원한 존재로 남을 수 있는 생명, 이 두 가지가 하나님을 우리와 구분 짓는 두 가지 요소입니다. 어떻게 보자면 두 가지 능력인 것이고 에덴동산에는 이 능력에 접근할 수 있게 만드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결국 이를 탐내고 이 중 하나를 얻었음을 창세기는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선악과의 이야기는 신에게만 속해야 할 지혜와 생명 중 하나인 지혜를 인간이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탐낸 인간이 결국 그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나머지 능력인 생명까지도 얻을까봐 동산에서 쫓아내버리십니다.

원죄와 결과

우리는 원죄라고 부르는 이 사건, 보통은 불순종이 죄였다고 말합니다만, 창세기의 흐름 속에서 불순종보다는 하나님에게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또는 도달하려는 인간의 교만이 죄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에 나타나는 바벨탑 사건이 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것이 마치 인간의 악한 본성이고 DNA 속에 죄의식이 저장되어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DNA에 저장된 죄가 아니라 인간의 지혜 속에서 계속해서 전해져 내려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창세기 3장에 보여주고 있는 지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필요도 있을 듯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얻은 지혜에 따라 행동하게 됩니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서 지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면, 어떤 문제를 인식하고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는 것이 지혜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벗고 있다는 문제를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해결책으로 나뭇잎 옷을 만들어 입게 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가까이 오시자, 자신들이 잘못을 했다는 사실과 하나님께 벌을 받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문제를 인식합니다. 그래서 그 해결책으로 동산 나무 뒤에 숨어버리게 됩니다.

지혜가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라면, 삶의 어려움을 극복해내는 능력이자 도구가 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담과 하와에게는 본래 이런 삶의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고난과 역경은 그들에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지혜를 얻게 되었기에, 그 죄의 결과로 삶에서 고통을 얻게 되었습니다.

뭔가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의 질문 같지만, 인생의 고난으로 인해 지혜가 생겨나는 것이 맞습니다만, 창세기는 오히려 그 반대의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이 교만함으로, 하나님에 도달하려는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지혜는 얻었지만 그와 동시에 고난도 얻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다양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만, 그렇게까지 자세히 또는 논리적으로 이 문제를 따져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인간의 불필요한 행동, 딱히 어려움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지혜를 얻으려던 행동은 오히려 그들에게 없던 고난을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를 창세기는 보여줍니다.

고통과 사람의 지혜

그런데 창세기 3장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내용 속에서 사람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벗었음으로 인해 나뭇잎을 엮어 옷을 만들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나뭇잎 옷 대신에 가죽옷을 만들어주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안보이면 되리라 생각하고 나무 뒤에 숨었지만, 자신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자 옆에 있는 존재, 자신에게 선악과를 권했던 존재에게 책임을 떠넘겨봤지만, 이 역시도 아무 의미 없었습니다. 오히려 셋 다 벌을 받게 됩니다.

나중에 창세기 11장에 바벨탑 사건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하늘에 닿는 탑을 만들자고 자신들의 지혜를 모아봅니다. 그런데 5절에 보면, 우습게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에게는 하늘에 닿는 탑일지라도 하나님께는 내려와서 보지 않으시면 볼 수 없을 정도로 하찮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 바벨탑 상상도 ⓒGetty Image

창세기는 말합니다. 우리가 가진 지혜, 하나님으로부터 금지되었지만, 갖게 된 그 지혜는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는 지혜인가를 말합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지혜만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하는 삶은 여전한 고통 속에서 살려는 삶이라는 점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내가 얻어서 고통을 극복하려고, 또한 어려움을 이겨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 앞에 겸손해지며, 그 지혜를 따르려고 하는 삶이 고통에서 벗어난 삶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받은 벌이기에 우리는 고통에 찬 세상을 살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서도 기쁨과 감사를 얻게 되는 삶이 누리게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원죄에서 구원받았다 말합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처음의 죄, 신에 도달하려는 교만과 나만의 힘과 지혜로 세상 살 수 있다고 여기는 오만의 죄에서 벗어나 있습니까?

지금의 시대는 사람의 지혜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시대입니다. 인간 복제 기술은 거의 완성되어 있고, 뇌이식 또는 기억 이식 분야에 성과가 나타난다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지도 모릅니다. 물론 윤리적인 문제로 반대가 극심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실제로 이런 일이 가능해진다면, 윤리적 문제고 뭐고 돈 있는 사람들은 이를 실현할 것입니다. 철학 좋아하는 사람들은 기억을 옮긴다고 해서 두 존재가 동일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동일하지 않은 존재일지언정, 영생을 꿈꾸는 사람들은 이를 실현하려고 할 것입니다.

과학의 영역에서 신에 도달하려는 행동만이 문제는 아닙니다. ‘죄’라고 말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가진 지혜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일도 사실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창세기는 아담과 하와가 내놓은 해답들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해결책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마치 철기 문명을 이룬 히타이트 제국 앞에서 ‘주먹 돌칼’ 만들 줄 안다고 자랑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를 보면, 내 지혜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 보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은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보입니다. 그렇기에 편을 가르고, 나와 같은 생각을 가졌다면 한 편이고, 다른 생각을 가진 무리는 모두 잘못된 편이라고 편 가르기를 끊임없이 하고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 이후에, 소득주도성장은 말도 안 된다느니, 다시 낙수효과를 바라보는 정책을 펴야 한다느니, 분수효과는 잘못 되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을 듣게 됩니다. 솔직히 저는 뭐가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경제학을 공부한 적도 없고, 지금까지 대충 경제 상황을 보면 큰 흐름은 읽을 줄 안다고 생각은 하지만, 세세한 부분을 물어본다면 전혀 모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경제에 대해서 완벽하게 잘 알고 있고, 자신이 하는 말대로 해야 경제가 살아난다고 말합니다. 마치 축구 경기를 보면서 ‘내가 감독이었으면 저따구로 하진 않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는 느낌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이런 모습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행동일까요? 보잘 것 없는 지혜로 스스로 누구보다 위에 있다고 여기는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할까요?

2019년의 둘째 주일입니다. 우리의 지혜를 키워가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올 한 해는 하나님의 지혜를 간구하시고,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살아가시는 한 해가 되셨으면 합니다. 고통으로 이끄는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고통이 사라지고,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며, 당신의 지혜로 오직 바르고 평안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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