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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 “고난을 통한 평화”한민족은 이 시대의 ‘평화제물’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 승인 2019.01.13 18:27

함석헌에 의하면 역사는 생명의 스스로 함이 온갖 시련을 견디어내며 자기주장을 펼쳐나가는 생명 펴참과 진화의 마당이다. 고난과 시련이 없는 생명의 전개란 없다. 고난이 곧 생명의 원리이다. 온갖 부대낌과 충돌 속에서 물질은 자기 안에 생명의 틈새를 틔우고, 고난과 시련 속에서 생명체는 자기 안에 정신의 “씨ㅇ·ㄹ”(웹에서 ‘아래 아’ 표기가 어려운 관계로 앞과 같이 표기함-편집자 주)을 영근다. 정신은 알이 드는 ‘알음[앓음]’을 통해 자기의 몸과 마음 속에 우주생명[하늘]의 뜻을 결과 무늬로 수놓는다. 따라서 생명의 역사는 생명이 맞춤[적음]과 대듦[거부] 그리고 지어냄[창조]을 통해 자기주장을 펼치면서 생명체 속에 하늘의 뜻을 씨알로 새겨넣는 ‘앓음의 역사’이다.

“이 우주는 스스로 발전하자는 하나의 뜻을 가지는 생명체입니다. 그것을 과학적으로 보면 생명의 진화일 것이고, 종교적 표현을 한다면 하늘나라 혹은 정토의 완성일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인 이상 사람에게는 두 가지 면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속적인 살림과 심령적인 살림, 그 둘은 서로 대립은 하면서도 떨어진 것일 수는 없습니다. 그 둘이 구체적으로 종합된 자리 그것이 역사의 발전입니다.”(함석헌, “두려워 말고 외치라”, 『뜻으로 본 한국의 오늘』, 함석헌 전집 11, 387.)

세계역사는 씨알로서의 민초들이 자기 안에서 역사하는 하늘의 뜻을 깨달아 읽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화답의 장이다. 한반도의 한민족의 역사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의 5천년의 역사도 고난과 시련으로 점철된 앓음의 역사다. 우리는 그 역사를 외적인 사건에서만 읽어서는 안 되고 그 시련의 사건을 통해 영근 정신[얼]의 씨알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역사를 뜻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럴 경우 역사가 우리에게 예비하고 있는 놀라운 시대적 과제를 알아볼 수 있다.

“나는 우리 역사를 고난의 역사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 우리 역사같이 천재, 지변, 고역, 질병, 압박과 착취, 내란과 외적의 침입에 시달리는 역사는 또 없는데 거기서도 내버리지 않고 일관하는 어떤 의미를 찾는다면 그밖에 길이 없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나는 생각했습니다. 우리 역사에 고난이 많고 부끄럼이 많은 것은, 우리 민족의 성격이 그 근본 바탕은 좋으나, 역사의 목적이 되고 그 진전의 원동력이 되는 이 뜻을 찾는 데 다부지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주체성 ․ 심각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이 부족을 보충하고, 그것으로써 우리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우주사적 수난의 메시아의 사명을 다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자극하자는 대생명의 공의(公意)가 움직여서 이 고난은 오는 것이라고.”(함석헌, “두려워 말고 외치라”, 『뜻으로 본 한국의 오늘』, 함석헌 전집 11, 388/9)

함석헌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씨알이다. 너는 앞선 영원의 총결산이요, 뒤에 올 영원의 맨 꼭지다. 지나간 5천년의 역사가 네 속에 있다.”(함석헌, <씨알의 설움>, 『함석헌 전집 4.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76.) “장차 오는 새 역사에서 우리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기 위하여 고난은 절대 필요하다. 보다 높은 도덕, 보다 넓은 진보적인 사상의 앞잡이가 되기 위하여, 우리가 가진 모든 낡은 것을 사정없이 빼앗아가는 고난의 좁은 문이 필요하다.”(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 전집 1, 317.)

함석헌의 역사철학에서 ‘고난’의 의미는 핵심적이다. 그가 세계가 하나로 된 지구촌 시대에 한민족이 세상에 평화와 화해를 가져올 메시아의 구실을 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한민족이 대단한 민족이라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민족이 5천년의 역사를 통해 고난 받은 민족이고 지금도 고난과 시련의 짐을 지고 있는 민족이기에 새 시대의 평화의 군대가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 까닭은 한민족이 세계평화를 위해 바쳐질 희생제물이고 이 한반도가 평화로운 ‘하나의 세계’를 위한 희생제단이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사람의 삶은 일을 치름(經驗)이라고 본다. 치르고 나면 뜻을 알게 된다. 그로써 뜻이 되는 것이고 뜻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렇게 뜻이 있으면 있는[存在] 것이고, 뜻이 없으면 없는[無] 것이다. 뜻이 있음이고, 있음이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곧 뜻이다. 모든 것의 밑이 뜻이요, 모든 것의 끝이 뜻이다. 뜻 품으면 사람이요, 뜻 없으면 사람 아니다. “뜻 깨달으면 얼(靈), 못 깨달으면 흙, 전쟁을 치르고도 뜻을 모르면 개요, 돼지다. 영원히 멍에를 메고 맷돌질을 하는 당나귀다.”(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함석헌 전집 14, 110.)

서양의 진화론적 세계관과 그 폐해

지금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세 가지 핵심 축은 자유 민주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그리고 기술과 과학인데 이 세 가지가 모두 서구적인 것이다. 지구촌 시대의 현대인이 추구하는 기본가치는 자유, 평등, 인권, 사회정의라는 가치인데 이것도 서구의 전통과 역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서구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그 밑바탕에서부터 잘 분석해보면 거기에는 생존경쟁이라는 원칙에 의해서 전개돼가는 ‘진화론적인 세계관’이 깔려 있다. 이러한 진화의 꼭대기에는 “인간”(= 백인)이 있으며 이 인간이 당연히 지구의 지배를 손아귀에 넣고 마음대로 다스리고 있다.

서양의 문명과 문화의 밑바탕에는, 생존경쟁을 유일한 생명의 원칙으로 삼는, 그리고 정복자로서의 인간의 삶의 유지를 위해서 열등하다는 약한 생명체의 죽임을 정당화하는 생존의 법칙이 깔려 있다. 서양 사람들은 선교자적인 사명감에 불타올라 새로운 땅을 정복하고 자신들의 사회를 지탱하는 가치관을 그 곳에 살고 있던 원주민에게 심어주며 승자이며 정복자인 자신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희생해야 하는 노예로 만들어 다스렸다. 이른바 잘 산다는 선진국의 풍요로움은 못 산다는 제3세계 민초들의 피와 땀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서구의 근대화를 가능하게 하였던 인쇄기술, 종이, 화약, 나침반 등은 모두 동양에서 먼저 발명된 것들인데, 동양은 이것을 서양처럼 실용화시키지 못했다. 그것은 동양의 문화가 서양처럼 생존경쟁적인 죽임의 문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양은 화약을 발명하였지만 그것을 축제 때에 폭죽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인 서양은 그것을 다른 사람을 죽이고 정복하기 위한 무기인 대포를 만드는 데 활용했다. 이렇게 세계관이 다르면 문화도 다를 수밖에 없다. 서구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자유, 평등, 인권. 사회정의가 동양적인 세계관에서 나올 수가 없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세계관의 차이 때문이다.

‘1492년’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 ― 이 표현 자체가 몹시 서양적이다. 그 신대륙에는 그 땅의 주인인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후 서양과 동양이 만나면서 서양은 동양의 발단된 문화를 받아들이며 그것을 자신들의 생존경쟁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데 급급한다. 그로 인해 모든 면에서 서양보다 우위에 있었던 동양은 문화와 문명의 주도권을 서양에 내주다가 결국 서양 제국주의의 제물이 된다.

콜럼부스의 항해 이전에 이미 ‘1421년’ 중국 명나라도 남해 대원정을 실행했다. 중국인들은 콜럼부스의 선박보다 열배 가량 큰 배들을 이끌고 아프리카까지 항해를 하였지만 서양처럼 그 땅을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신대륙에 도착하자마자 그 곳에서 오래 전부터 살고 있었던 원주민들을 내쫓고 자기네들이 그 땅을 발견하였으니 자기네 땅이라고 선언하였다.

똑같은 일에서 서양과 동양의 행동패턴이 다른 것은 서양의 문명이 정복하고 죽이는 문명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명에서 “무한경쟁, 무한욕망, 무한소유”가 나올 수밖에 없다. 욕망을 극대화시키고 소유를 극대화시키고 경쟁을 극대화시키는 것, 바로 이것이 서구적 시스템이 부추기는 삶의 논리이지만 거기에는 인류와 지구 전체를 파멸로 이끄는 함정이 깔려 있다.

현대는 욕망을 고무풍선처럼 한없이 부추기는 시대다. 인간이 욕구하여 무언가를 차지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낡은 것이 되어 욕망의 눈길은 새로운 것으로 향한다. 한편으로는 욕망을 심어주어 욕구를 창출해내어 요구의 필요를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수요를 미리 계산하고 기획하여 제품을 만들어내고 소유하여 소비하고 소모하도록 유도한다. 이렇게 욕망의 조작, 욕구에 의한 소모, 새로운 욕망의 조작 등이 계속 꼬리를 물고 이어져 욕망의 끝이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자본시장의 생산과 소비전략이다.

이러한 무한 욕망의 시대에 기술과 과학의 윤리적 기준은 무엇인가? “할 수 있음”이 그 기준이다. 칸트는 ‘있음’이라는 존재의 차원이 있고, ‘할 수 있음’이라는 능력의 차원이 있고, ‘해야 함’이라는 당위의 차원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너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너는 해야 하니까”라고 말할 수 있었다. 칸트는 윤리적 당위가 주어져 있으므로 인간은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할 수 있음”을 윤리적 당위, 도덕적 실천에서 끌어내었다.

그런데 과학과 기술에서는 “할 수 있음”이 “해야 함”을 지배한다. 도덕의 자리에 이제 기술과 과학이 들어섰다. “너는 해야 한다. 왜냐하면 너는 할 수 있으니까.” 과학의 명제는,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그리고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이다. 이것이 기술과 과학이 갖고 있는 최고의 명제이다. 과학[기술]적으로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한다. 이러한 과학의 발명과 발견을 유도하는 그 밑바탕에는 돈이 깔려있다. 지금 전 세계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은 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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