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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화목하라(사11:10-13; 고전 3:1-9; 막 9:38-50)주현절 둘째 주일
최병학 | 승인 2019.01.16 19:39

1. 경쟁과 독점 사회에서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뱅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 반철환, ‘새해 첫 기적’, 『웃음의 힘』 지혜, 2012.

우리는 경쟁사회, 승자독식의 가치관을 가진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누구도 낙오된 사람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고, 모두들 인싸(주류)가 되려고 합니다. 이것은 부모자식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2002)가 있습니다. 등장인물 중 소매치기 고복수(양동근 분)와 졸부의 딸로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밴드 피아니스트 전경(이나영 분)이 나오는데, 하루는 복수가 전경이 아버지 전낙관(조경환 분)과 대문 앞에서 마주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편의점에서 산 소주팩을 빨대로 빨아 마시고 들어오는 전경을 보고 아버지는 뺨을 때리며 이렇게 소리칩니다. “음악을 해? 그게 음악이야? 술 처먹고 머리통 흔들어대는 게 음악이야? 제대로 된 거 하라구 피아노 가르쳤더니 병신 육갑을 하고 있냐? 그게 음악이야?” 아버지의 손이 다시 전경의 뺨으로 향하는 순간, 갑자기 복수가 뛰어들어 그 손을 잡습니다. 그리고 전낙관에게 대들며 이렇게 말합니다. “무슨 아버지가 자식을 때립니까? 우리 아버진 내가 별 드러운 짓을 다 해두 손 한번 안대던데!”

전경은 복수에게 그냥 빨리 가라면서 아버지에게 “잘못했어요.”라고 사고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더 심한 말을 합니다. “나한테 잘못한 거 없어. 니 인생 자체가 잘못이야.” 그러자 황당한 복수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저씨, 친아버지 아니시죠? 진짜 아버지 따루 있을 거예요. 무슨 아버지가 이래? 아버지 다시 찾아봐요. 이 사람, 아니야.”

아버지는 딸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니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 사회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잘못된 가치관이 사람들을 병들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공생애는 이러한 경쟁과 독점 사회를,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세상을 해체하는 데 그 핵심이 있습니다. 반철환의 시, ‘새해 첫 기적’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바위는 앉은 채로 모두가 함께 도착하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요, 모두가 함께 하는 것이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지난 2019년 1월 11일 75m 굴뚝 위에서 단식까지 불사하며 농성하던 파인텍 노동자들이 굴뚝에서 내려와 6년 만에 일터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기약도 없는 굴뚝 생활을 시작한 지 425일 만입니다. 목숨을 건 단식까지 불사하며 겨우 이뤄낸 성과입니다. 2018년 여름엔 KTX 승무원 119명이 12년의 길고 긴 투쟁 끝에 전원 복직되었고, 9월에는 9년을 끌어오던 쌍용차 해고 사태가 끝맺음했습니다. 쌍용차 사태는 해직자와 해직자 가족까지 30명이 세상을 등지는 고통스러운 사건이었습니다. 아무튼 파인텍 노동자들의 고통에 동참하며 동조단식을 한 송경동 시인과 우리 기장 교단의 박승렬 목사님(NCCK 인권센터 소장)이 있었습니다. 종교인과 시인이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하는 사회는 적어도 희망이 죽지는 않은 시대입니다.

<굴뚝 위 파인텍 노동자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이러한 경쟁사회, 독점 사회, 노동자들이 목숨을 걸고 ‘배수의 진’을 쳐야만 문제가 해결되는 세상, 생각이 다르다고 혐오하고 괴롭히고, 질투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각각 제자들의 배타성(복음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서로간의 질투와 괴롭힘(구약), 그리고 고린도 교회 내 분열과 배타성(서신서)에 관한 말씀입니다.

2.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신약 본문 말씀 마가복음 9장은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누가 크냐는 논쟁(막 9:33-37)’ 이후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제자인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합니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막 9:38).” 그러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39-40).”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뜻인 하나님 나라와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제자들은 뜻을 모아 함께 하며 화목해야 하는데, “누가 크냐” 논쟁하고, 또 같은 뜻을 가졌지만,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을 배척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41).” 예수님의 제자라고 한다면 사랑을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에 속한 자라면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랑보다 경쟁이, 남보다 자신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42).”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을 중심으로 한 12제자 그룹(정통파)과 일반제자(비정통파) 사이의 긴장과 갈등이 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분열과 갈등, 다툼에 대해 책망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다음의 말씀은 심판의 말씀과도 같습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3-49)

소금을 친다는 말은 구약의 제사행위에 나옵니다. 모든 희생 제물에 소금을 쳐서 바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칠 제물의 정결과 정화의 의미, 부패방지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소금이 그 기능을 못하면 불로써 치겠다는 말입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 하시니라(50).”

사실 소금은 다양한 음식 재료를 화목하게 하는데 쓰입니다. 곧 맛을 내게 하는데 쓰이는 것입니다.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는 말씀은 예수의 제자로 정결하며, 이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는 선한 일을 하기 위해 하나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다양한 성격과 환경,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는 늘 언제나 사건이 생깁니다. 따라서 음식에 맛을 내는 소금을 두고 화목하지 않으면 아무 맛도 없는 음식처럼 교회 공동체는 무의미합니다.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마 5:13)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소금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하루는 꾀꼬리가 하나님께 가서 개구리의 시끄러운 울음소리 때문에 자기의 아름다운 노래가 들리지 않는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노래를 계속 부르려무나. 네가 그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까 개구리 울음소리가 더욱 시끄럽잖니.”

3. 에브라임과 유다의 화목

분열과 갈등은 제자들 사이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남북으로 분단이 되어 있듯이 이스라엘도 북 이스라엘(에브라임)과 남 유다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분열이 오래되면 서로 상대방에 대한 미움과 증오, 적개심이 있습니다. 남과 북의 지금까지의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원 교목실장인 정종훈 교수가 지난겨울, 21세기포럼 제45차 정례포럼에서 ‘PD수첩을 통해 본 한국기독교의 치부와 반성’이라는 강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강연의 핵심은 우리가 회개해야 할 한국 교회의 치부이며 5개 항목으로 준비했는데, 핵심적인 것은 회개한 자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방식이 무엇인가 고민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정종훈 교수가 지적하는 한국 교회의 5가지 치부는 무엇일까요? 첫째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교회세습입니다. 둘째 ‘빨갱이 이데올로기’입니다. 셋째 물량주의(교회 건물의 크기, 예산의 규모)와 맘몬이즘(Mammonism, 물질과 돈 숭배)과 ‘이중 이기주의’(예수 믿어서 천당은 보장받은 것이고, 더불어 세상에서도 가장 좋은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넷째 정치권력 지향적인 교계 지도자들입니다. 다섯째 이슬람포비아입니다.

첫째는 너무나 ‘명성’이 자자한 것이고, 둘째와 다섯째만 살펴볼까요? 사실 명성교회 관계자들도 PD수첩 제작자들을 향해 “빨갱이”, “날도둑놈들”이라고 욕하며 반기독교 세력이라면서 폭력을 행사했는데, 자신의 불의를 지적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빨갱이”라고 하며 폭력을 행사합니다. 정종훈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빨갱이 이데올로기 이면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세상의 보복의 논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보복의 논리라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갖다 대고 오리를 가자면 십리도 가고 겉옷을 벗어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벗어주는 가르침을, 철저히 평화를 추구하도록 가르쳤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물론 해방직후 북한에서 토지개혁으로 인해 토지를 강탈당하고 재산을 빼앗기고 월남하신 분들이 아픔이 있을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철천지원수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의를 지적하는 것이 빨갱이 하고 무슨 상관입니다. 그 말이 먹힌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비정상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슬람포비아(이슬람공포증, Islamophobia)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난민공포증은 예멘 난민들에 대한 한국교회의 대응이었습니다. 예멘에 내전이 발생하여 주민들이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라서 사람들이 해외로 도피했습니다. 제주도에 5백여명의 예멘인들이 입국을 하고 난민신청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하여 한국교회가 조직적으로 이슬람포비아로 대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종훈 교수의 말입니다. “예멘인들? 그들을 받아서 한 형제자매가 된다면 우리의 도덕적, 윤리적 우월성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입니다. 그 일을 교회가 주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돌봄, 섬김, 나눔에 사랑을 실천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선교입니다.”

<한국인들의 난민포비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돌봄, 섬김, 나눔, 사랑의 실천은 분열된 유다와 이스라엘에서도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오늘 구약의 본문 말씀에서 메시야 왕국이 도래하면, 이러한 분단과 증오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그 날에 주께서 다시 그의 손을 펴사, 그의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치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을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리니 에브라임의 질투는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들은 끊어지며 에브라임은 유다를 질투하지 아니하며 유다는 에브라임을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사 11:10-13)

쫓긴자들, 흩어진 자들을 모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서로 간에 질투와 괴롭힘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미국 국무부가 인도적 지원에 대한 일부 대북제재를 완화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2019년 1월 11일 외교 전문매체 포린폴리시(FP) 발표). 유엔과 민간 구호단체들이 미국의 대북 정책 때문에 생명을 살리는 구호 노력이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고 지적한 것에 대해 동의하며 제재를 완화한 것입니다.

벚꽃 날리는 봄이 오면 북미정상이 만나고, 남북정상 회담을 통해 한반도에 평화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경제협력을 통해 한반도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할 것입니다. 부산 남구 <남북정상회담 성사, 환영준비위원회>에서 통일부 추천 북한영화를 상영합니다. 매월 격주 화요일에 상영하려고 합니다. 장소는 우리 교회입니다. 영화 상영 후에는 제가 영화의 핵심 ‘로즈버드’를 찾고 영화비평을 하는 등 영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첫 상영은 2019년 1월 22일(화) 저녁 7시 30분 교회 본당입니다. 우리 교회 올해 표어가 “그리스도의 평화, 부산 남구를 사랑으로(롬 8:34-35)”입니다. 부산 남구가 평화특구인 것처럼, 우리 남부산용호 교회가 평화를 여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평화와 사랑과 화목을 위한 일꾼으로 부름 받은 사역자요, 동역자입니다.

<영화로 남-북 잇다 포스터>

4. 사역자와 동역자로 화목하라

오늘 서신서 말씀 고린도전서는 사역자와 동역자의 의미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설립한 교회(행 18:1-17)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아시아, 지금의 터키)에서 고린도교회(그리스)의 불미스러운 소식을 듣고 디모데를 보냅니다. 당파, 소송, 음란, 문제가 되는 습관들, 주의 만찬과 영적 은사의 오용 등 고린도 교회의 여러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서 고린도전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시기와 분쟁으로 갈라진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교회 안에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게바)파, 그리스도파 같은 파당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특히 교회를 세운 바울을 추종하는 파와 현재 후임자인 아볼로를 추종하는 파 사이에 다툼이 심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디아코노스)들이니라.”(고전 3:4-5)

사역자는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 사역자라는 말을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를 섬기는 사람’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봉사하는 사역자들이 갈라지고 나누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처럼 시기와 분쟁을 일삼는 이들을 ‘육신에 속한 자’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3).”라고 묻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겸손히 사람들을 대하며 교회 일에 충성스럽게 봉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서로 자기주장만 펼쳐 싸우고 갈라졌습니다. 바울은 이런 이들을 ‘육신에 속한 자’라고 한 것이며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으로 시기와 분쟁이 끊임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신앙의 성숙이 없어서 젖 먹는 어린 아이와 같이 밥을 먹지 못하는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신령한 자들(3:1a)’처럼 대할 수 없어서 안타까워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 3:1-2)

그리고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을 권면합니다. 따라서 바울 자신과 아볼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 3:6-8)

교회는 목욕탕과 같습니다. 목욕탕에 때가 있는 사람들이 오는 것처럼 교회는 ‘의인의 집’이 아니요, ‘죄인들의 소굴’입니다. 따라서 세상 보다 더 많은 시기심과 분쟁이 있습니다. 때로는 상처를 받아서 떠나기도 하고, 사람을 보고 실망해서 신앙을 저버리기도 하고, 늘 말썽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보다 사람을 더 높이고, 세상의 가치가 교회의 영역에 침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며 때를 씻어내듯, 문제가 있는 곳이 교회이지만, 동시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곳도 교회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바울 자신과 아볼로는 하나님의 ‘동역자(쉬네르고스, 9절)’라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3:9).” 동역자는 ‘함께 일하는 자’,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를 섬기는’데 함께 일하며 돕는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9절)인 고린도 교회를 위해 바울과 아볼로는 함께 섬긴다는 것입니다. 같은 마음과 뜻을 품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파니 아볼로파니 나뉘어져 싸울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장10절).” 목욕탕에서 혼자 등의 때를 밀수는 없습니다. 서로 서로 동역하여 사역할 때 시원하게 때가 밀립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일하고 돕고 섬길 때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인 교회가 때를 벗고 아름답게 변화될 것입니다.

5. 사자의 네 번의 훌륭한 식사?

이솝 우화에 ‘네 마리 황소 이야기’가 있습니다.

<네 마리 황소 이야기>

네 마리 황소는 어디를 가도 함께 갔으며, 함께 풀을 뜯고 함께 누워 쉬었습니다. 항상 서로 가까이 지냈기 때문에 어떤 위험이 다가오더라도 위험으로부터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네 마리 소를 잡아먹으려는 사자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자는 그들을 한꺼번에 다 잡아 먹을 수는 없었습니다. 사자는 어느 누구와도 맞대결은 자신이 있었지만 한 번에 네 마리 모두와 맞부딪히기에는 힘에 겨웠습니다. 사자는 고민했습니다. 꾀를 내었습니다. 소들이 풀을 뜯고 있을 때 그 중 약간 뒤처진 황소에게 살금살금 다가가 귀엣말로 다른 소들이 그의 흉을 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소에게도 그렇게 똑같이 속삭였습니다. 사자가 이런 식으로 접근하자, 마침내 네 마리 황소들은 서로를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자기를 비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침내 그들 사이에 틈이 생겨 각자 살기로 했습니다.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사자가 노리던 대로 됐습니다. 결국 사자는 한 마리씩 소를 잡아먹을 수 있었고 네 번의 훌륭한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 사도의 화목 하라는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에브라임과 유다를 향한 이사야의 민족을 향한 화목의 외침이 들리십니까?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그 화목의 마음이 들리십니까?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집어삼킬 자를 찾는 사자(벧전 5: 8)의 먹이가 될 것입니다.

최병학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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