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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현실이 생활이 되다 1 - 구약성서에서세 가지 미완성의 장면들 속에서의 복음전파 (5)
최성일 교수(한신대 신학부/선교신학) | 승인 2019.01.25 18:54

첫 번째 장면은 우리가 직접적인 접근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결정적인 전투이다. 두 번째 장면은 승리를 거둔 자와 결과를 중재시키는 알림 역할을 한다. 그것은 새로운 시간과 장소들 속에서 효과적이 된다.

세 번째 장면은 소식의 수용과 소식에 대한 응답, 다시 말하면 지금 알려진 새로운 현실이 실생활로 실현된 사유화(the lived appropriation)이다. 이 세 번째 장면은 수용, 응답, 그리고 사유화가 강제로 빼앗길 수 없고 계획대로 될 수 없거나 예언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기사들 속에서 고정되어 나타난다.

충돌, 승리 그리고 승리가 바꾸어 놓은 현실

메시지는 변화된 현실에 대한 소식을 자신들의 삶의 다양한 관점에 도달하고 침투하며 몰두하도록 많은 시간을 사용한 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받아들여진다. 실생활로 실현된 사유화는 쉽거나 분명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 고지된 새로운 승리자에게 우리 삶에 대한 통치를 양도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양도하는 것은, 새로운 통치가 무엇을 수반하는지를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겁나는 것이다. 그리고 게다가, 그것은 옛 통치의 권위가 완전히 부서졌다는 것은 전혀 분명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응답은 두려움, 시험(tentativeness), 강력한 동경을 포함하는, 때로는 하기 싫은 것으로서 공연되는, 많은 것들의 혼합이다.

▲ 애굽으로부터 탈출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Getty Image

시 96:10의 복음(“야훼께서 왕이시다!”)에 대한 여러 나라들의 응답, 즉 신들 가운데의 승리로부터 말로 표현되는 메시지는 화려한 찬양과 감사 중 하나이다. 너희가 나무나 산이나 바다였다면, 어떻게 복음에 응답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그들이 복음의 소식을 받아들였던 방법이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이 외치고
밭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시 96:11-13a)

바다는 복음 메시지에 대한 승인을 큰 소리로 외쳤다. 왜냐하면 바다는 죽음의 신들의 환경파괴 아래에서 거의 죽었기 때문이다. 그 소식을 믿고 있는 바다는 이제 오염이 끝날 것임을 안다. 나무들은 죽음의 사슬 톱의 소리를 들었으며 모두가 잘려질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새로운 통치를 성원했다. 이제 나무들은 안전하며, 자신들의 적절하고 풍성한 결실을 잘 진척시킬 수 있다. 밭이 춤을 춘다; 밭들은 화학비료에 의해 거의 질식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 밭들은 자체의 진지함을 갖게 될 수 있다.

좋은 소식은 야훼의 승리와 함께 모든 피조물이 (이집트에서의 노예처럼 고통으로 괴로워하면서 신음하고 있었음으로) 이제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이제 피조물의 최선의 수호자이며 보증인인 창조주에 의해 의도된 것처럼 기능을 발휘하면서, 최선의 진정한 자아가 되기 위해, 권한을 부여받는다. 그 소식은 죽음의 신의 권세가 결정적으로 붕괴되었음을 확신시킨다.

출애굽이 바꾼 현실

출애굽 복음의 실생활로 실현된 사유화는 성서에서 가장 발전된 주제들 가운데 있다. 미리암과 해방된 여인들은 노래하기를 끝 마쳤다. 이스라엘은 바로의 제국에 대한 야훼의 승리의 복음에 의해 야기된 새로운 세계를 직면하게된 시내산을 향해 괴로운 길을 나아갔다.

이스라엘은 그 제국 안에서 사회적 관계의 낡은 양식들이 새롭게 복음을 받아들인 이 세계에서 통할 수 없을 것이란 점을 어리둥절할 정도로 깨달았다.(1)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은 계명들, 즉 복음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위한 필요조건들과 허가증을 받았다. 십계명, 즉 계약공동체를 위한 노동 증명서(working documents)는 예배, 여가 시간, 성별, 경제, 정치적 법률적 관계들에 관한 이스라엘의 삶의 모든 국면을 다룬다.

이스라엘의 공적인 삶의 어떠한 측면도 시내산에서의 야훼 신앙의 재정의로부터 제외되지 않았다. 복음의 사유화는, 새로운 통치법(governance)의 통치에 따라, 공적이며 사적인 영역에서 인간 삶의 재특성화와 인력과 자원의 재구성에 관계한다.

소식 사유화의 과제는 끝나지 않는 과제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토라는 계속되는 재협상과 재해석 아래에서 변경될 수 있는 것이다.(2) 모세는 언제나 이스라엘을 위해 만든 하나 이상의 해석상의 계명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시내산을 떠난 후 오래되어, 약속의 땅을 받을 준비를 하는, 요단에 도착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기대했던 순간이며 이스라엘이 제국을 떠난 목적의 순간이었다.

요단에서 이스라엘은, 모세가 다시 한번 계약 가능성이 있는 땅으로서 약속의 땅을 환상으로 다시 볼 동안에, 34장의 신명기를 위해 잠시 멈춘다. 그는 강한 자와 약한 자가 공동의 짐과 공동의 운명으로 서로 결합되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거듭해서 상기시켰다. 바로 그 공동의 긴밀한 유대가 존경받고 공연되지 않는 한, 땅은 몰수될 것이며, 이스라엘은 결국에는 노예상태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야훼의 승리와 제국의 패배는, 가능할 뿐만 아니라 또한 긴급하고 피할 수 없는, 생산과 분배와 소비의 계약상의 사회적 관계를 이룬다.

포로 생활로부터의 해방, 그 승리 소식이 바꾼 삶

포로기의 이스라엘에게 복음의 사유화는 길고 힘든 작업을 필요로 했다. 전달자, 즉 아름다운 발을 지닌 자는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고 단언했다(사 52:7). 그 소식의 첫 번째 수용은 즐겁게 노래하는 것이다(사 52:8-9). 그 다음에는 포로의 이스라엘에게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라”는 위임이 있다(사 52:11).

▲ 바벨로에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티소로부터 나와 고국 땅으로 향하고 있다. ⓒGetty Image

포로가 된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의 한정된 세계를 자유롭게 떠나, 그들의 본래 장소, 본래의 사회적 정의와 관습을 향해 고향으로 간다. 복음은 백성들을 소외와 배제로부터 고향으로 갈 것을 허락한다. 그렇지만 귀향은 다루기 힘들며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벅찬 일이다. 이스라엘은 옛 고향으로 갈 수 없으며,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갈 수 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 옛 고향은 우리가 알았던 고향으로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은 새로운 고향으로 귀향할 것을 요구하고 허락한다. 이사야 56-66장은 하나님의 경이적인 해방의 빛에서 이스라엘의 귀국의 비젼을 제공한다. 이사야 40-55장에서 이스라엘의 그 소식의 사유화는, 사회적 관계의 구조를 개조하고 있는 이사야 55-66장에서 확언된 공동체 건설의 힘든 임무를 수반한다. 공동체 건설의 임무는 최초의 서정적인 노래에서 예상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포로들의 귀환에 관한 이사야의 본문은 사유화의 핵심적 결정과 함께 시작한다. 이것은 복음의 소식의 수용에 관하여 이스라엘이 이야기해야만 하는 첫 번째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사 56:1).

나는, 복음의 실생활로 실현된 사유화 속에서 직면하여 해결되는, 단 두 가지 결정, 즉 정확히 정의와 의에 관계된 결정만을 언급할 것이다.

첫째로 이사야 56장에서 귀환한 이스라엘은, 필연적으로 모든 외국인들과 고자들을 환영하는 포괄적인 공동체가 되어야만 하며, 이스라엘의 예배가 “만민”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할 것임을 결정하였다. 그런 백성들이 자격을 박탈당한 자들이었다는 강한 주장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와 같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들은 성적인 결격사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들은 압제하는 제국과 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이 본문에서 사회적 양자택일에 대한 넓은 비젼은 널리 퍼졌으며, 그 같은 넓은 비젼을 공유하고 싶어했던 모든 사람은 공동체 안으로 초대되었다.

둘째로 이사야 58장에는 종교적 거리낌에 대한 충돌이 있다. 본문의 강한 주장은 복음의 빛에서 요구되는 종교와 경건은 본질적으로, 약한 자의 필요와 안녕(well-being)에 대한 강한 자의 세심한 배려에 관계되는, 이웃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종교가 말로 표현하는 것이 책임과 자격부여에 관한 정치 경제적 문제들 속으로 어떻게 불가피하게 넘쳐 들어가는 지를 유의하라: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꺽는 것이 아니겠는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7)

이사야 56과 58장에 있는 이러한 단언들은 정의와 공의에 대해 그와 같은 헌신을 하지 않았던 바벨론 세계에 대해 철저한 반대에 속하는 복음을 전해 받은 공동체(a gospelled community)를 상상한다. 실제로 그 제국은, 그러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신들에 의해 명령받고 정당함을 인정받기 때문에, 결코 그와 같은 헌신을 할 수 없었다. 소식의 주체인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최초부터 이웃의 관계에 관하여 근본적으로 관심을 갖는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다른 방법으로 권한을 위임받는다. 복음은 권력의 왜곡된 유형들이 붕괴되었다는 소식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수용은 급진적으로 변형된 유형의 사회적 관계의 수락이기 때문이다.

미주

(미주 1) Norman K. Gottwald, The Tribes of Yahweh (Maryknoll, NY: Orbis Books, 1979)에서, 그는 이스라엘 내의 출애굽-시내산의 위기가 사회적 관계의 양식들에 관계된 사회적 혁명이었음을 종합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출애굽 정복이 지배 양식들로부터의 해방이며 인류평등주의자의 사회적 관계의 실행이었다고 강조했다.
(미주 2) Walter Brueggemann, “The Commandments and Liberated, Liberating Bonding,” Journal for Preachers 102 (Lent, 1987), 15-24; reprinted in Interpretation and Obedience: From Faithful Reading to Faithful Living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1), 145-58을 보라.

최성일 교수(한신대 신학부/선교신학)  sungildab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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