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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를 부수는 바람에도 계시지 않았다무엇을 믿는가(행 17:30-31)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19.01.27 19:43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오늘은 믿음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예전에 창세기 15장 6절의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에 대해서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 이 부분이 ‘아브람이 여호와를 의로 여겼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오래 전에 후배 한 명에게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얼마 후에 그 친구가 이 얘기를 자기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번역을 몰랐다는 내용을 적었는데, 그 댓글 중에 ‘믿는 게 뭔지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누군가가 남긴걸 봤습니다.

물론 철학이나 조직신학에서는 ‘믿음’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따져보는 일도 필요하고, 그 의미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성경 자체에서 우리가 ‘믿음’의 개념을 그리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국어사전에 나와있는 개념 정도로만 생각해도 됩니다. “어떤 사실이나 말을 꼭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렇다고 여기다.” 또는 “어떤 사람이나 대상에 의지하며 그것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다.” 또, “절대자나 종교적 이념 따위를 받들고 따르다.” 이게 국어사전에 정의된 ‘믿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에서 ‘믿음’에는 대상이 존재하고, 이는 ‘어떤 사실’ 또는 ‘말’입니다. 또 ‘믿음’이 사람에게 적용되었을 경우에는 ‘어떤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리라고 여긴다.’는 의미를 갖게 되고, 종교에 적용되었을 때는 ‘이념을 받들고 따른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왜 제가 사전적 의미를 먼저 말씀드리고 시작하는지, 우리가 ‘믿음’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해왔는지를 살펴보면서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존재에 대한 믿음

우선 우리가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표현을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하나님 믿는다’, ‘예수님 믿는다’ 이 말을 우리는 자주 씁니다.

만약 우리가 무신론자들과 대화를 하면서 이 표현을 썼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서 믿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존재함을 믿는다는 얘기입니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신이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다투는 일은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내려오시지 않는 한, 영원히 끝나지 않을 논쟁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신 존재 증명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그렇기에 종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 로마에 도착한 바울 ⓒGetty Image

그런데 여기에서 약간 이상한 점을 발견합니다. 신이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신론자들과 신이 존재하냐 존재하지 않느냐를 가지고 다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존재 자체를 믿는가 안 믿는가는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존재하셨다는 문서적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일반적으로 ‘너 세종대왕 믿어?’라고 세종대왕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 묻지 않습니다. 세종대왕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있고, 초상화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존재한 인물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최근에는 성경의 기록이 믿을 수 있는 역사 자료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그런 논쟁은 ‘닐 암스트롱이 정말 달에 갔던게 맞냐?’는 역사적 사료 자체에 대한 의문이기 때문에 결국 결론을 내지 못할 논쟁입니다.

예수님께서 역사적 실존 인물임을 인정한다면, ‘예수님 믿는다’는 말은 의미가 조금 바뀌게 됩니다. 그 분이 ‘어떤’ 존재인지를 믿는다는 뜻이 됩니다.

사실 이런 의미는 하나님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유일한 신이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넘어서, 이 세계에 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 이심을 믿는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단순히 존재했느냐 안 했느냐를 넘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믿습니다.

지금 많은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예수 믿는다’, ‘하나님 믿는다’는 말은 이 정도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지금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 예수님을 본 적도 없고, 또 볼 수도 없기 때문에 그 분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 믿는다는 건 중요한 일이고, 어떤 존재이신지를 믿는 일도 상당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존재에 대한,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믿음으로만 끝나도 될까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믿음

우선 성경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믿음을 살펴보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지금 시대에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은 대부분 신약성경에서 나온 이야기를 따르기 때문에 신약성경에 나타난 믿음을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믿음’의 헬라어 단어는 동사형으로 ‘피스튜오(πιστεύω)’이고 명사형으로 ‘피스티스(πίστις)’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나요? 복음서에서 ‘피스튜오’나 ‘피스티스’가 사용된 구절들을 찾아보면, 먼저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병이 낫게 되리라’ 믿으라고 하십니다. 이는 바꿔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주실 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또 제자들을 향해 ‘믿음을 가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이루어주시리라’ 믿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마17:20; 눅17:6)’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맥락에서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때때로 예수님의 존재 자체를 믿으라는 것 아닌가 싶은 본문이 있기도 합니다. 특히나 요한복음의 경우, 예수님의 존재 자체를 믿는다는 어조의 본문이 상당히 나타납니다. 게다가 초대교회 시대로 넘어오면, 서신들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표현들이 나타납니다.

이는 요한복음에도 등장합니다(요1:12; 2:23; 20:31). 하지만 이와 동시에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라는 표현들(요2:22; 3:12; 4:21,50; 5:47 등)이 나타나고 있는 점을 본다면, 요한복음이나 서신들에서 사용한 ‘예수님을 믿는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표현이 단순하게 존재 자체를 믿는다는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처음에 믿음에 대한 국어사전의 정의를 말씀드리면서 사전적 정의로 봤을 때, 믿음에는 ‘어떤 사실’, ‘어떤 말’, ‘어떤 기대’, ‘어떤 이념’과 같이 특정한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단순하게 예수님께서 존재하시는가 하시지 않는가? 또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가 아닌가? 예수님은 구세주인가 아닌가? 믿음은 여기에서만 그쳐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신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시고,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도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주신다는 사실, 어려움을 이길 수 있게 해주신다는 사실 정도로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믿음과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심판 때에 구원받을 사람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눅18:8).

여기까지의 내용은 조금 정리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시면서 믿음을 이야기하십니다. 이는 분명 ‘고침 받으리라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실현됨에 있어서도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간구가 이루어진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심판과 연결되면, ‘구원을 받게 된다는 믿음’이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병을 고치셨던 것처럼,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들어주셨던 것처럼, 심판 때에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말씀이며, 이를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회개 후의 믿음

오늘 본문에서도 이러한 의미는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 연설한 내용입니다. 그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우상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며,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드러내셔서 우리로 당신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더욱 직접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사건입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과거의 죄를 용서받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며 심판 날에 구원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약을 하려고 했는데, 요약이 아닌 내용 정리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연설은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선포하셨던 말씀의 확장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다만 예수님의 말씀에서 변한 점이 있다면,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그 증거라는 점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행한 연설이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연설이나, 마가복음에서 인용한 예수님의 말씀에는 믿음에 앞선 조건이 한 가지 붙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30절 하반절의 말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또한 마가복음 1장 15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회개하고”입니다.

회개는 사실 믿음의 전제조건이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회개는 오히려 믿음의 대상에 맞닿아 있습니다. 회개는 구원의 전제조건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도 예수님께서 지금도 살아 숨 쉬고 계신 존재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분명 일부의 믿음은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구원의 조건은 충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회개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직 죄에 머물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고 예수님의 존재는 믿어도 말씀은 믿지 못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죄에 머물고 있는 사람은 믿음은 있을지언정 구원은 얻지 못합니다.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이런 질문도 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고도 예수님의 말씀까지도 믿을 수 있지 않는가? 하지만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서신에서 이런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가 아이에게 한 달 동안 아빠 엄마 말 잘 들으면 갖고 싶어하던 장난감을 사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만약 아이가 부모의 말을 믿는다면, 아이는 한 달 동안 부모의 말을 잘 들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많은 아이들은 그 한 달의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부모의 말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전부터 부모가 약속을 어겨왔다거나, 부모가 지금 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느낌이라거나, 부모가 너무 과도한 요구를 한다면 아이는 부모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방식으로 살아가면 구원을 얻게 됨을 믿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구원을 얻는 방법이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고, 이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는 건 사실은 믿고 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이런 질문도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예수님의 존재도, 말씀도 믿지 않지만, 죄에서 벗어나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그 사람에게 구원은 있는가? 구원이 있다 없다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문제이기 때문에 저는 정답을 내어드릴 순 없지만, 그 사람이야말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구원을 향한 믿음

앞선 아이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아이가 장난감을 갖기 위해 한 달간 노력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장난감의 유혹이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달 뒤에 장난감 하나 갖게 되는 것보다 한 달 동안 부모 말씀 안 듣고 사는게 더 좋다고 판단한 경우에 아이는 노력하지 않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또한 지금 많은 성도님들, 특히 교회를 떠나간 성도님들이 이런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구원받는 것보다 세상의 즐거움이 더 좋다고 판단하였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현실을 쫓는 게 더 좋다고 여겼다면, 믿더라도 회개하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기보다는 회개하지 않고 세상의 법칙대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역시도 잘못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의 말씀을 바르게 믿었다면, 세상의 현실을 쫓아 살아가는 일이 더 좋게 여겨질 수 없습니다. 세상의 현실은 끊임없이 악을 양산해가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 한 순간 나에게 즐거움을 줄 수는 있을지언정,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이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 되리라고 말씀하셨고,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따른다면 이런 세상을 이루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구원이고, 그 말씀을 믿는 게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를 바르게 믿기 위해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죄를 범하지 않고 살아가는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시기 바랍니다. 제대로 믿으셔서 이 땅을 구원으로 이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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