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Sermonday
겸손(미 6:1-8; 약 1:16-27; 마 7:13-23)주현절 넷째 주일(1월27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9.01.29 22:00

1.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가면 카탈루냐 출신 천재적인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A. Gaudí i Cornet, 1852~1926)의 숨결과 손길이 배어 있는 건축물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살바도르 달리(S. Dali)의 ‘흐느적 녹아내리는’ 그림이 눈앞에 현실로 재현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가우디의 건축물들은 자연의 형상에서 모티브를 얻어 건축에 적용하는 이른바 ‘카탈루냐 모더니즘’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 holy family, 성스런 가족) 성당은 가우디 필생의 역작으로 지금도 여전히 건축 중에 있습니다. 가우디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후배 건축가들이 그가 남긴 설계도와 스케치를 해석하며 100년이 넘도록 건축 중에 있는 것입니다. 완공은 2026년으로 가우디 사망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완성을 알리는 최종 시그널은 예수님의 12제자를 상징하는 100m가 넘는 12개의 첨탑이 세워지는 것과 그 중앙에 예수님을 상징하는 170m 높이의 탑에 십자가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안토니오 가우디>(사진 왼쪽)와 <사그라다 파밀리아>(사진 오른쪽)
<사그라다 파밀리아>(사진 왼쪽)와 <몬주일 언덕의 황영조>(사진 오른쪽)

이 높이는 가우디의 자연주의 건축가다운 면모와 독실한 신앙심이 숨어 있는데, 가우디는 자신의 건축물이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높은 몬주익 언덕(171m, 1992년 황영조가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서 몬주익의 영웅으로 불립니다만)보다 더 높아서 자연스런 스카이라인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건축물이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보다 더 높아서도 안 된다고도 생각했습니다. 구약 성서의 하늘에 오르는 탑을 쌓자는 바벨탑 사건(창 11:1-9)의 이념을 극복하는 놀라운 신앙의 겸손입니다.(김영인, 『헬라어 수업』, 리빙북스, 2018 참조)

주현절 넷째 주일에 주시는 말씀은 겸손입니다. 구약 미가서는 ‘하나님과 겸손히 행하라’고 말하고 있으며 서신서는 겸손을 위해, 또한 창조주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무엇이 중요한지를 ‘듣기는 속히, 말하기와 성내기는 더디 하라’는 실천을 통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복음서는 이러한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2.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

이사야와 동시대에 사역한 미가는 선지자의 소명을 받아 고향집을 떠나 남유다 수도인 예루살렘 성읍 사람들에게 준엄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미가는 남유다 11대 요담 왕과 12대 아하스왕, 13대 히스기야 왕 시대에 걸쳐 예언 활동을 했는데(B.C. 742~687), 그중 유다의 우상숭배가 극심했던 아하스 왕 통치 기간(B.C. 735~716)에 많은 활동을 하였습니다. 당시 미가는 예루살렘의 부와 권력을 가진 소수가 사치를 즐기며 다수의 가난한 백성들을 억압하는 현실에 분노합니다. 사회적, 정치적 지위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는 이들에게 신랄한 비난을 퍼붓습니다. 따라서 미가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불의를 폭로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냅니다.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미 6:8절).”고 합니다.

<미가의 상황은 오늘 우리의 상황과 같습니다>

미가서 전체를 살펴보면,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곧 ‘백성의 죄를 폭로’하고,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마침내 ‘연단이 끝난 뒤 회복되리라’는 소망의 말씀으로 나누어집니다. 특별히 본문 미가 6장의 말씀은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 경고 가운데 한 부분으로, 하나님께서 왜 사랑하는 유다 백성들을 채찍질하시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공의롭게 행하신 여호와처럼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의 그 요구에 따르라고 질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가는 이렇게 예언을 선포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는 일어나서 산을 향하여 변론하여 작은 산들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미 6:1-2)

그럼 여호와의 변론 말씀은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 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싯딤에서 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공의롭게 행한 일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미 6:3-5)

 

<렘브란트의 발람과 당나귀(1626)>

애굽 땅에서 종노릇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여 주셨고, 출애굽의 여정 가운데 동행하시며 함께 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특히 출애굽 당시 십볼의 아들 모압 왕 발락이 브올의 아들 선지자 발람에게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를 요청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민 22:12).”고 하셨습니다. 탐욕에 눈이 어두운 발람은 재차 가고자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허락하시되, 하나님께서 이르시는 말만 준행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아무튼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불순종의 길을 가다가, 칼을 든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 죽을 뻔했으며 나귀의 책망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어 발람의 ‘이스라엘 저주 예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내용을 다시 확인한 ‘메시야 승리 예언’으로 변하게 됩니다(민 24:10-24). 하나님의 공의가 역설적으로 완성되며 선으로 악을 이기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잘 나타난 사건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사도 요한도 버가모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책망할 것 두어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 2:14-15)

니골라 당은 초기 영지주의 영향을 받은 무율법주의자들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마음대로 살아도 천국에 간다.’라고 생각한 자들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육신의 정욕대로 사는 이들입니다. 이들이 사도 요한이 보기에는 미가가 책망한 발람과 같으며, 초대교회의 니골라 당과 같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가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들려줍니다. 그것은 첫째 정의를 행하는 것, 둘째 ‘인자’를 사랑하는 것, 셋째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인자(חֶסֶד, 헤세드)’란 ‘은혜, 긍휼, 자비’를 말합니다, 영어로 ‘needy, miserable’로 번역할 수 있는데, 본문의 맥락에 따라 ‘매우 가난한’, ‘불쌍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미가 시대 예루살렘은 힘 있는 자가 무자비하게 약한 자를 억압하고 갈취하며 억울하게 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따라서 미가가 보기에 하나님은 약한 자를 돌보시고 가련하게 여기셨기에, 예루살렘 주민들도 ‘인자’, 곧 약한 자를 사랑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의와 약자 사랑은,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할 때 가능한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배드리고, 예물을 드리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은혜로운 말씀을 같이 읽어 볼까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6-8)

3.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

주의 형제인 야고보 사도는 겸손을 위해, 또한 창조주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무엇이 중요한지를 말해줍니다. 그것은 ‘듣기는 속히, 말하기와 성내기는 더디 하라.’는 실천입니다. 왜냐하면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기 때문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6-18)

따라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을 들음과 행함에 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19-21)

인간사 모든 일은 ‘말하기와 성내기는 속히 하고, 듣기는 더디 하는 것’에서 벌어집니다. 사실 분노는 인간이 가진 보편적 정서이지만,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해 타인의 목숨을 빼앗은 행위가 우리 사회에서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2012년 서울 여의도 흉기 난동사건, 2014년 울산 버스정류장 살인사건, 2016년 서울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 2018년 10월에 발생한 서울 강서구 PC방 살인사건, 부산 일가족 피살사건, 경남 거제의 폐지 줍는 여성을 젊은 청년이 살해한 사건 등은 분노에 의한 우발적 살인 사건이었습니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이들 분노 살인 사건의 가해자 대부분은 대인관계가 원만치 않은 ‘외로운 늑대(lone wolf)’유형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담아둔 화를 적절히 해소하지 못해 범죄를 저질렀다고 합니다. 경찰청이 2017년 살인을 저지른 914명의 동기를 조사한 결과 ‘우발적’인 경우가 357명(39.1%)으로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하루에 1건 꼴로 우발적 살인이 일어난 것입니다. 가정불화(76명), 현실불만(44명), 경제적 이익(19명), 보복(8명) 등 순이었는데,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이는 2014년 345명, 2015년 344명, 2016년 373명, 2017년 357명으로 매년 300∼400명 수준인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분노 살인의 원인을 잘 보여주는 영화 암수살인>

이러한 분노에 의한 범죄 발생은 경쟁과 갈등이 심한 현대 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반영한 결과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 구도에서 낙오되거나 살아남지 못한 이들이 살인 등 강력 범죄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한다는 것입니다. 과도한 경쟁에 내몰리고, 경제 불황 등을 겪을 때 외로운 늑대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좌절을 더 느끼고,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결국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하고 폭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화 <암수살인>이 분노 살인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분노 살인 사건을 다룬 영화 <암수살인>은 다음의 저의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18140)

야고보서 본문을 교회에 적용하며 교단 총회장이셨던 최부옥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에서는 성질부리는 것도 매우 조심해야만 합니다. 의견이 맞지 않는다고 소리를 지르고, 상대를 얕잡아보고 무시하는 듯한 언사는 마땅히 경고 받아야 될 일입니다. 교회에서는 큰소리 내는 것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런 일이 생기면, 교회 문이 닫히게 됩니다. 전도는 못할망정,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교회를 떠나게 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최부옥, 『주현절에 만난 예수』, 생명나무, 2012, 135쪽)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받은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고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복을 받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들어볼까요?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 22-25)

4.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복음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실천을 통해 행하는 자들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아무리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며 선지자의 직분을 잘 감당하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놀랍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이해를 기본적으로 뒤흔드는 말씀입니다. 그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요? 구약 성서 미가서에 의하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경건을 이루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이것을 구체적으로 잘 말해주었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6-27)

그렇습니다. 혀에 재갈을 물려야 합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해야 합니다. 마음  속의 뜻과 말이 같아야 합니다. 그 뜻과 말은 인자를 사랑하는 것, 곧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속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우리를 넓고 편안하지만 불의의 길로 인도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3-15)

늘 언제나 열매를 보아야 합니다.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성도는 말에나 행실에나 좋은 열매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와 성내기는 더디 하는 것,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이것이 좋은 나무가 되는 지름길입니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6-20)

5. 겸손의 주름 한줄

아마도 가우디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린 건축물이 서두에서 언급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즉 성(聖)가족 성당일 것입니다. 바르셀로나의 대표적인 이미지에는 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모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규모가 워낙 크고 계획도 현대 건축물답지 않게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1-2년이면 건물을 ‘뚝딱’ 짓고 삼십 년 된 아파트는 당연히 헐어 버려야 마땅한 퇴물 취급을 하는 우리네 풍토와는 너무 다릅니다. 그래서 더욱 인상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유럽의 성당 중에는 짓는 데 몇 백 년이 걸린 곳이 허다한데, 역사 속의 사건이 아니고 현재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우리에게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 세월을 통해 주름이 한줄 한줄 잡힌 성숙된 겸손의 영성이 예수님의 제자의 모습입니다. 낙타는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합니다. 하루를 보내고 일을 끝마칠 시간이 되면 낙타는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등에 있는 짐이 내려지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또 새날이 시작되면 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짊어집니다.

<낙타 무릎>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 낙타에게서 우리는 신앙의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낙타 무릎과 같이 오늘도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삶의 겸손을 통해 인생의 풍성한 주름이 한줄 더 생겨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9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