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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을 다 이루다: 윤두서의 「자화상」『신앙, 그림을 읽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19.02.01 18:47

한 번 뿐인 인생, 성공여부에 상관없이 모든 것을 거는 삶이 있다. 불가능해도 시도할 수밖에 없는 사랑 때문이다.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죽어도 실은 더 큰 것을 이룬다. 사랑이 스스로를 이루기 때문이다. 게다가 누군가 그 뒤를 따라온다면, 큰 성공 그 이상의 성취다. 사랑들이 따라갈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완성보다 아름다운 미완을 남겼기 때문이다. 실패하기 쉬운 줄 알면서도 그 좁은 길을 따라갈 이유를 남겼기 때문이다. 생존과 쾌락만이 남아있는 허무의 시대에 살아갈 이유를 남기는 것만 한 업적도 드물다.

기둥만 남은 신전, 한옥의 빛바랜 꽃살문, 완성하지 못한 조각상과 그림들도 말없이 보여준다, 허물어짐의 아름다움을, 미완의 아름다움을. 차오르고 기울어가는 모든 과정은 아름답다. 보름달만 승리이고 초승달은 패배인가? 달의 모든 순간이 아름답다. 모든 존재는 과정이고, 변화의 과정 그 자체로도 충분하다. 국보 240호로 지정된 윤두서의 「자화상」 역시 미완성인 작품이다. 귀도, 몸도 없이 얼굴만 허공에 뜬 기묘한, 아니 기괴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 어떤 자화상보다도 강렬하다.

▲ 윤두서의 <자화상> ⓒGetty Image

처음에는 영혼을 꿰뚫어 볼 것만 같은 시선에 압도된다. 속내를 감출 수 없을 것만 같다. 사방으로 뻗친 수염의 기운이 강렬하고, 치켜 올라간 눈썹과 눈꼬리는 매섭게 진심을 묻는 것만 같다. ‘그대는 누구인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가?’ 어둠 속에서 이 작품과 독대한다면 섬뜩하기까지 할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바라보면, 왜인지 알 수 없지만 자상함이 눈가와 입가를 따라 스쳐간다. 그는 누구이고 어떤 삶을 살았을지, 자신을 왜 이렇게 그렸는지, 왜 미완성인지 궁금해진다. 호기심을 쫓아 그의 인생을 찾아본다. 그의 삶을 알면 알수록 이 작품의 깊은 맛에 반한다. 다 표현하지 못한 미완의 아름다움이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끌어들이고 있다.

오주석 교수는 미켈란젤로의 미완성작 「노예상」과 비교하면서 이렇게 평한다. “미켈란젤로나 윤두서는 어쩌면 똑같이 미완성작 속에서 더 이상 손댈 수 없는 완전성을 감지하고서 그 이상의 작업을 스스로 포기했던 것인지도 모른다.”(오석주,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94.) 이런 극찬과 함께 붙인 이름은 ‘미완의 비장미’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은 한국화 초상화 중 최고의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국보로 지정된 최고의 초상화가 미완의 작품인 것이다. 최고의 작품이 완벽한 완성작이 아니라 미완성이라는 것, 그것은 놓쳐버린 아름다움을 일깨운다. 미완성만이 보여줄 수 있는 찬란함을 드러낸다.

작품 자체는 마무리 짓지 못한 상태지만, 그 상태 그대로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 미완성으로 끝난 조각상을 상상해 보자. 조각이 중단된 그 모습이 예술가가 쪼아나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어떤 모습으로 조각하려 한 것일까? 작가의 고뇌와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미완은 수많은 완성을 상상하도록 유혹한다. 각자가 그려보는 완성작으로 초대한다. 더 이상 손댈 것이 없는 작품이 목표라면 미완은 실패다. 그러나 무한히 변주될 수 있는 아름다움을 향해 모든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려는 목적이었다면 완벽한 성공이다.

이 땅의 삶은 어떤 모습인가? 미완의 아름다움을 강탈하고 있다. “네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싹부터 짓밟아버린다. 원하는 것은 무슨, 생존의 길만을 강요한다. 성적, 대학진학, 스펙, 취업… 실패할 여유 따위는 없다. 수많은 실패를 통해 자신을 만나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꿈을 찾을 기회는 사치다. 실패를 통해 깊어가는 성숙 따위는 배부른 소리다.

결과만이 중요하다. 과정 자체가 지닌 의미와 아름다움은 헛소리일 뿐이다. 1등이 아닌 모든 것은 패배일 뿐 아니라 죽음이다. 미완성의 아름다움, 과정의 아름다움은 설자리가 없다. 그러니 무엇인가를 시도하기 전에 성공가능성부터 계산할 수밖에. 그 안에 담긴 의미나 뜻이 아니라 실현가능성만이 중요하다. 1등만 살아남는 사회는 그렇게 성공만을 강요한다. 빈틈없이 완벽해져서 1등이 되어 살아남으라고, 완벽한 것, 승자만이 아름답고 가치 있다고 다그친다.

“다 이루었다.” 주님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면서 남긴 말씀이다. 무엇을 다 이룬 것인가? 구원 사역은 아직 미완성이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도 실은 미완성이었다. 예루살렘 성을 떠나지 말고 성령님을 기다리라고 하셨다.

주님께서 다 이루신 그 완성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을 위한 비움이다. 성령님께서 제자들을 통해 친히 해나가실 일들 위한 물러남이다. 제자들과 성도들이 성령님과 함께 이뤄갈 구원 역사의 문을 여신 것이다. “다 이룸”은 하나님 이루실 일들을 위한 “여백을 이룸”이었다. 케노시스kenosis, 자기 비움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삶은 이처럼 “과정이 되는 길”이자 “길이 되는 과정”이다.

▲ 단해감리교회 하태혁 목사 ⓒ에큐메니안

한 평생, 반드시 이루고 싶은 그 무엇인가, 그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일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몸과 영혼이 타는 갈증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길을 잃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성령님께서, 사랑하는 이들이 함께 이뤄갈 것을 믿어야 한다. 사랑이 그 길을 영원히 이어갈 것을 믿고 함께 걷는 한 걸음이면 충분하다.

그것은 완벽한 무엇을 완성하는 과정이 결코 아니다. 하나의 과정이, 한 걸음이 지닌 미완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누리는 행복이다. 주님은 완성이 아니라 길이 되셨다. 길이란 완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이어진다. 주님을 따라 사는 삶도 그렇게 끝없는 길이 된다. 끝없는 길이 되는 삶과 죽음, 영원한 삶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글쓴이 하태혁 목사는 추풍령 숲속에 자리 잡은 단해감리교회 담임목사이자, U.H.M. Gallery 단해기념관 부관장으로 영성으로 읽는 미술의 맛을 나누며 지냅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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