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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도다, 남을 위해 ‘가난해진 사람들아’복 있는 사람은?(눅 6:22-23)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19.02.03 19:01

지난 몇 주 동안의 말씀에서 우리는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예수님의 삶을 따라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에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대로 회개하고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교회에 오래 다니신 여러분들께서는 대부분 예수님께서 어떤 이야기를 하셨고,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가 예수님의 삶에서 놓친 부분은 없는지, 예수님께서 하신 이야기나 보이신 삶이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내용들과 동일한지, 한동안 그런 말씀을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그렇기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한동안은 복음서의 말씀을 전해드리게 될 듯 합니다. 그리고 복음서의 말씀들 중에서도 하나의 복음서에만 나타난 본문보다는 적어도 두 개의 복음서 이상에서 동시에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팔복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은 마태복음 5장 1-12절에 나타난 팔복의 누가복음 버전입니다. 사실 누가복음에서는 팔복이라고 부르기도 어렵습니다. 복 받을 사람이 네 부류밖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다고 사복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합니다. 누가복음에는 복 받을 사람에 대한 선포와 동시에 슬퍼할 사람들에 대한 선포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개역개정 성경에는 소제목에 ‘복과 화를 선포하시다.’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만약에 마태복음 5장을 읽지 않고 누가복음만을 읽었다면, 이 부분을 누가복음의 팔복이라고 부르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태복음의 팔복과 거의 동일한 말씀이지만 의미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오늘의 본문, 누가복음 6장을 읽을 때, 너무나 유명한 마태복음의 팔복 떠오르기 때문에 누가복음도 이와 동일한 내용으로 읽어버리고 끝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차이를 생각하게 되고, 마태복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 있다고 선포했고, 누가복음은 ‘가난한 사람’이 복 있다고 선포하고 있다는 점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면 결론은 ‘역시 누가복음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복음이었다’로 끝나게 됩니다.

▲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아야 한다. ⓒGetty Image

예전에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가서 갈릴리 해변을 볼 때, 어떤 목사님께서 그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팔복은 마태복음의 ‘심령이 가난한 사람’으로만 설교를 해왔는데, 막상 여기에 와서 보니까 예수님께서 정말 하셨던 말씀은 누가복음의 ‘가난한 사람’이 맞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정말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고민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초대교회의 생각들을 떼어놓고 본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성경에서 찾아내는 일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목사님의 이야기와 같은 해석 방식은 상당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팔복을 비교하면서, 그 기반에 마태복음을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희망의 선포이고 복의 선포로 끝난다.’라는 기본적인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을 기록한 교회에는 부유한 성도들이 많이 있었기에 ‘심령이’라는 말을 첨가했다고 밖에는 이야기하지 못하게 됩니다.

본문의 기본 구조

물론 오늘 본문도 분명 누군가를 향한 위로이고, 누군가를 향한 복의 선포입니다. 마태복음과 마찬가지로 누가복음도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본문 속에 녹여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명 자체에 대한 약간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이기 때문에 마태복음에 대한 설명은 그만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보면, 복 받을 사람 네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가난한 사람, 배고픈 사람, 우는 사람, 인자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고, 멀어지고, 욕 먹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네 부류의 사람에게 상응하는 복을 말씀하십니다. 헬라어 본문은 ‘복이 있다. ~한 사람들아, ~이기 때문이다’의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24-26절에는 이와 정반대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부자, 배부른 사람, 웃는 사람, 사람들로부터 잘했다는 말을 듣는 사람, 이렇게 네 부류의 사람들이 또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는 슬픔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슬프도다. ~한 사람들아, ~이기 때문이다’의 구성입니다.

굳이 헬라어 원문을 보지 않는다하더라도 복 있는 사람들과 화 있을 사람들에 대한 선포가 정확하게 동일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해야 합니다. 누가복음은 가난한 사람들은 무조건 복이 있다고 하고, 부유한 사람들은 무조건 화를 입는다고 말하는 것일까? 문자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복음’으로 끝나는 것인가?

하지만 누가복음을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돈을 버는 일 자체에 대해서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벌어서 베풀라는 흐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복과 화

이 본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몇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본문 자체에서 완벽하게 대구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전혀 대구를 이루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22절에 ‘인자로 말미암아’입니다. 물론 23절에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도 24절 이후와 대구를 이루지는 않습니다만, 이 부분은 복과 화 중에서 복을 더욱 강조하는 표현 정도로만 생각하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인자’로 칭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인자’가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예수님으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고, 멀어지고, 욕먹게 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를 해석할 때, 우리는 의례 그랬던 것처럼 초대교회의 상황, 로마나 유대교에 의한 박해 상황에 적용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기에 박해를 받았다. 하지만 지금의 박해는 나중의 천국과 기쁨으로 이어질 것이다.”라는 해석이 됩니다. 

하지만 저는 두 번째 단서에 의해서 이런 해석보다 좀 더 근원적인 예수님의 말씀에 다가갈 수 있는 해석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뒤이어 나오는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과 부유한 자들을 구분하시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복을, 부유한 이들에게는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을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27-29절 말씀입니다.

제가 앞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드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기본으로 두고 본문을 이해한다면, 20-26절의 팔복 본문과 다음에 이어지는 27-36절의 원수사랑 본문은 개별 본문으로 따로 해석하게 됩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이 두 말씀이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물론 누가복음의 저자 혹은 저작집단이 이런 편집 작업을 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저는 예수님께서 본래 하셨던 말씀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말씀이 하나로 묶이면서 이야기는 확대되고 구체화 됩니다. ‘인자로 말미암아’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고난을 주는 존재들이 명확하게 나타나게 되고, 그들의 행위가 더욱 구체화 됩니다. 그들은 원수, 적입니다. 원수들은 이들을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며, 뺨을 때리고, 겉옷을 빼앗습니다.

22절에 나타난 미워하며(미슈 μισέω)가 27절에서 동일하게 연결되고, 22절의 욕함(오네이디쪼 ὀνειδίζω)과 내쫓음(에크발로 ἐκβάλλω)은 28절의 저주(카타라오마이 καταράομαι)와 학대(에페레아쪼 ἐπηρεάζω)로 확대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처음에 복을 선포 받았던 사람들, 그들이 왜 지금의 상황, 가난, 배고픔, 눈물 흘림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부유한 자들, 배부른 자들, 웃고 있는 자들이 어떻게 그 부와 음식과 웃음을 얻었는지도 알게 됩니다. 그것은 폭력적인 착취와 수탈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부유한 자들은 단순하게 돈이 많은 사람들,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폭력적인 착취와 수탈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 자신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남의 것을 빼앗아 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정확하게 ‘슬픔’을 선포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그들로 인해 착취당하고 수탈당하여 슬퍼하며 배를 주리고 있는 이들을 향해 복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오늘의 본문은 단순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음’이 아니라 폭력으로 착취하고 수탈해왔던 이들을 향한 심판의 선포입니다. 또 이제 더 이상 착취당하지 않고 수탈당하지 않으리라는 희망의 선포입니다.

사람을 위하여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왜 ‘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셨는지, ‘나(에고 ἐγώ)’라는 편한 한 단어가 아닌, 정관사를 포함한 네 단어 ‘사람의 아들(투 휘우 투 안트로푸 τοῦ υἱοῦ τοῦ ἀνθρώπου)’을 사용하셨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분명 중의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일전에 말씀 드린대로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와 동시에 말 그대로, ‘일반적인 사람’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일전에 다니엘에서 ‘인자’가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는지 말씀드렸습니다.

교회의 신앙이 삽입된 해석으로만 보자면, ‘인자’는 분명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현이고, ‘예수님을 따름으로 인한 박해’가 맞는 해석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본래 하셨던 말씀을 생각해본다면, ‘인자’는 일반적인 사람을 의미할 가능성도 높습니다. 어쩌면 이런 중의적인 표현을 일부러 사용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자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단지 ‘예수님’을 따름으로 어려움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넘어서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가 어려움에 처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누군가를 위해 도움을 주거나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은 복이 있다고 선포하시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에 오늘 누가복음의 말씀은 그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복음이 아닙니다. 남을 위해서 ‘가난해진 사람들’을 위한 복음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선포는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희망의 선포가 아니라 남을 위해 살아왔던 사람들, 하지만 남을 돕느라 자신은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복과 희망의 선포가 됩니다.

또한 남은 신경 쓰지 않고, 남의 것을 빼앗으며 자신의 배만 채워왔던 사람들을 향한 심판과 슬픔의 선포입니다.

실천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인간인 저에게 친한 분께서 읽어보라고 하셨던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 목사님의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라는 시로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 하나 살기도 어렵다는 말보다는 남을 위해 한 가지라도 행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다른 이들을 위한 삶이 내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들 것만 같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고, 그곳에 배부름과 웃음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되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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