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Sermonday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렘 23:23-32; 계 8:1-5; 눅 12:49-59)주현절 다섯째 주일(2월3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9.02.05 17:48

1. 가짜 뉴스와 거짓말 천국

<김우중 회장의 책>

김영삼 대통령 시대였던가요?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말이 유행했었습니다. 1995년 1월 국가기관으로 세계화추진위원회를 공식 출범하고 김대통령은 “세계화는 우리 민족이 세계로 뻗어나가 세계의 중심에 서는 유일한 길”이라고 천명 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이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 (김영사, 1989)라는 책을 통해 세계를 무대로 현장을 누비며 굴지의 기업을 일으켜 세운 자신의 경험담을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생생한 삶의 교훈과 인생철학이 들어있었습니다. “세계는 넓고 가보지 않은 길이 있으니, 해내지 못할 일은 없다.”라고 말하면서 새로운 길을 향해 용기 있게 개척해 나갈 것을 권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계는 탈세계화(post-globalization, 후기-지구화)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영국의 유럽연합탈퇴(Brexit)와 미국 트럼프 대통령 시대의 개막은 보호주의와 국가 간 배타주의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소통과 교류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무시되고, 세계는 이제 끝없는 이기적 욕망의 지평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것은 경제적으로는 보호무역주의의 부활이며 국가적으로는 대외고립주의의 표방이며 국가 간에는 교역 상대국과 이민자들에 대한 적대의식을 감정적으로 표출하는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난민 혐오와 미국의 멕시코 장벽이 바로 그것입니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2018년 3월 13일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고에 있는 미국과 멕시코 국경지대를 방문해 국경장막 시제품을 둘러본 후 소감을 말하고 있다>
<시리아 난민 쿠르디의 죽음>

이러한 주체의 욕망과 타자에 대한 배타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진실과 사실은 폄하되고, 거짓과 사이비가 그 욕망의 헛된 전망을 정당화시킵니다. 2016년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그 해의 언어로 등장한 ‘탈진실(post-truth)’과 독일언어학회가 제시한 ‘탈사실(postfaktisch)’이라는 단어는 지구촌이 이제 ‘거짓의 시대’가 되었음을 알리는 서막이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 혹은 가짜 뉴스가 판을 치며 거짓말 천국을 만들고 있습니다.

유튜브나 페이스북 등 SNS상에 떠도는 뉴스들은 대부분 가짜입니다. 조중동을 위시한 정식 언론사도 사실을 왜곡한 뉴스를 보내는 마당에, 표피적이고 유희적인 SNS에서 진실을 바랄 수는 없겠죠? 염려되는 것은 이러한 거짓말이 뉴스라는 외피를 입고 세상을 떠돈다는 것입니다. 사실 가짜뉴스(fake news)는 2010년 중반에 등장했습니다. 최근 국내외 학계에서는 가짜뉴스라는 말 대신 ‘허위정보(disinformation)’로, 혹은 ‘거짓정보’로 용어를 변경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가짜뉴스에서 풍기는 ‘그래도 언론적 행위’라는 이미지를 건져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짜뉴스 기지가 일베에서 유튜브로 이동>

그러나 이러한 ‘허위정보’가 100% 가짜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90%의 내용이 사실인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에 근거해야 일반 사람들이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허위정보’는 인과관계를 허위로 만들어내고 별개 사실들을 자의적으로 결합하여 결론을 비틀어 버립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거짓(false, lying)을 ‘하나님보다 자신을 주인으로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으로 봅니다. 이러한 거짓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인 우상숭배, 복술, 주술과 관련해 사용되었으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속여 예언하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되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9:8-9)

따라서 구약성서는 거짓 고소와 거짓 증거를 경계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십계명의 8계명도 이렇게 선포합니다.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신약성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취합니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은 거짓말 천국입니다. 특별히 교계 네트워크를 통해, 평신도들의 단톡을 통해 가짜 뉴스가 유통되고 있습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가짜, 거짓, 외식함에 대한 말씀입니다. 구약의 말씀은 말 그대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신약의 말씀은 거짓을 말하는 자들, 곧 외식하는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심판선언입니다, 가짜와 거짓은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날의 말씀인 요한계시록도 바로 이러한 이들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자, 동시에 구원의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도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해외선교주일이자, 설주일인 오늘 이 말씀이 주어진 의미가 있습니다. 국제적으로 가짜와 거짓이 난무하는 시대, 또 설 명절을 맞아 가족 간에 소통할 때 얼마나 많은 거짓과 가짜뉴스가 판을 벌일지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 아닐까 이러한 생각도 해봅니다. 특별히 2019년 한해 가짜뉴스가 개신교계를 들었다 놓았다 할터인데, 오늘 세 본문 말씀을 통해 은혜 받고 말씀대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2.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

구약의 말씀 예레미야 23장 말씀은 전체적으로는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패망할 것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윗의 계보를 통해 메시야가 도래할 것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렘 23:1-8).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유다의 영적 지도자들의 타락상에 대한 고발과 심판에 관한 예언입니다. 또한 거짓 선지자들을 정죄하는 내용도 이어집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은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 그들이 서로 꿈 꾼 것을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조상들이 바알로 말미암아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 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렘 23:25-27)

이스라엘 조상들이 풍요의 신 바알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린 것 같이 지금 유다 백성들이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개신교계를 보면 거짓 선지자들의 전성기입니다. 극우와 개신교가 만나서 상식 이하의 수준으로 전락되었습니다. 가짜 뉴스를 남발하고, 아니면 말고 식의 고소와 고발이 난무합니다.

‘탈진실’과 ‘탈사실’의 시대가 이끄는 ‘거짓의 시대’는 ‘진실의 죽음’을 가져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윤리 상대주의(Ethical Relativism)와 다원주의(Pluralism)가 여기에 일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토대였던 진리를 해체하였고 개인의 개체화와 익명화는 거짓에 대한 민감성을 둔화시켰으며 인터넷 기술이 열어놓은 매체환경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만의 대안 사실을 믿는 분할된 ‘마이크로 공론장’을 만들어냈습니다.

중요한 것은 거짓을 사실로 믿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을 하나의 의견으로 강등시키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실의 신뢰성을 잠식하고 공론장을 왜곡하는 것은 결국은 민주주의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극우 개신교와 거짓 선지자들, 거짓을 선포하는 목사들 때문에 지금 개신교는 위기입니다. 예레미야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꿈을 꾼 선지자는 꿈을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가 어찌 알곡과 같겠느냐(렘 23:28).”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성실함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어찌 진리를 선포하는 목회자와 진리의 도를 전하는 성도들이 가짜와 거짓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알곡은 겨와 같지 않습니다. 가짜와 거짓 뉴스는 알곡이 아니라 바람에 나부끼는 겨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거짓과 가짜를 전하는 이들을 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 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둑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여호와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렘 23:29-31)

놀라운 심판의 말씀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 앞에 일점일획이라도 거짓을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백성들을 미혹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을 왜곡하고, 진실을 은폐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닙니다. 교회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씀은 오늘 목회자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 주시는 채찍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거짓 꿈을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은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3:32)

3. 외식하는 자

이러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은 예레미야 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있고,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신약 누가복음 12장의 말씀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경계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것을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눅 12:13-21)와 종의 비유(눅 12:35-48)를 통해 물질에 대한 탐욕을 경계하고 아버지의 나라를 사모하라고 훈계하시며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의 말씀은 예수께서 당신 스스로 이 땅에 불을 던지러, 또한 분쟁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눅 12:49-53)

설 명절이 되면 가족들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정치 이야기도 빠지지 않겠죠? 그러나 같은 가족이라도 정치적인 이념과 신념이 다르면 남보다도 더 못합니다. 그만큼 정치는 민감한 사안입니다. 그러나 진실과 가짜, 옳음과 거짓 사이에는 타협이 있을 순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탐욕과 맘몬과 거짓과 가짜와 결탁한 이들과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불을 던진다고 하십니다.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과 가짜 뉴스를 전하는 목회자들과 분쟁하라고 하십니다. 그 이가 아버지일지라도, 혹은 어머니일지라도 가짜와 거짓을 예수의 이름으로 전하는 이들은 분쟁을 통해서라도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마음이 강팍하기 때문에, 자기 고집에 갇혀 있기 때문에,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다른 것을 보지 못합니다. 예수께서도 그것을 잘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눅 12:54-57)

가짜뉴스, 곧 허위정보는 영혼을 좀먹는 사단의 음성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사실을 왜곡할까요? 왜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할까요? 왜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가요? 게다가 개신교에서 가짜 뉴스가 더 극성을 부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건전한 보수 정치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서교인문사회연구실(http://seogyo.net, 2017년 첫 발을 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연구자들이 모여 함께 학습하고 활동하는 집단으로 현실적 쟁점들에 관한 연구를 통해 새로운 사회와 삶의 형식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김현준 연구원은 한국 개신교의 극우 이념을 조사하며 이렇게 분석합니다.

“기본적으로 개신교 보수주의는 반공주의와 근본주의를 그 핵심으로 하는데, 최근의 극우주의는 반공주의에 동성애 혐오, 여성혐오(반여성주의), 이슬람·이주민 혐오(인종주의)를 ‘가짜뉴스’로 추가하며, 혐오와 차별 주장을 공공성 담론으로 포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김현준 연구원에 따르면 보수 우익 개신교의 역사는 이렇습니다. 1단계 1970-80년대 ‘국가조찬기도회 정치’를 시작으로, 2단계 1990년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광장정치’와 기독당을 거쳐, 3단계 2000년대 기독당과 기독교 뉴라이트라는 ‘전문적 사회운동조직’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마지막 4단계로 2010년 전후 에스더 기도운동이라는 혐오와 차별 기반의 전방위적 세력으로 발전해왔다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이제 5단계로 접어들었다 볼 수 있는데, 보수연합기구인 한기총 제25대 대표회장에 청교도영성훈련원 원장인 전광훈 목사가 당선됨으로 2020년대는 한국 극우 개신교의 소멸로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극우 민족주의 개신교인들이 가짜 뉴스를 생산하고 퍼뜨리는 이유는 이들이 갖고 있었던 정치적 주도권과 도덕적 우월성에 대한 ‘박탈감’과 ‘소외감’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포, 반대 세력에 대한 무분별한 증오와 공격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말세론이 위세를 떨쳤을 때 극우 개신교는 ‘포기와 무기력’이 지배했었는데, 최근의 개신교 극우주의는 공격성 레벨이 강화되어 증오와 공격으로 방향을 전환합니다. 사랑의 종교인 개신교가 혐오와 폭력을 부추기는 종교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아무튼 김현준 연구원은 이렇게 말합니다. “극우 기독교 세력은 오늘날 저마다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고통의 원인이 ‘사회적 소수자’ 때문이라고 선동한다. 그들이 만든 가짜뉴스가 그 혐오와 차별에 정당성을 부여해주고 있는 셈이다. 가짜뉴스와 반지성주의는 현실의 고통을 자양분 삼아, 한국 사회의 극우화를 재추동하고 있다.” 안타깝습니다. 사회적 약자, 소수자, 강도만난 사람을 돌보는 것이 기독교의 정신일진대, 한국 극우 개신교회는 반대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진실의 길을 외면하고 거짓과 가짜의 길을 가는 이들의 결과는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4. 일곱인, 나팔, 대접 재앙의 때에

<윈쪽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성서를 통해 우리는 ‘바른 교훈’을 얻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가며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바른 교훈이 아니라, 우리를 미혹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요한계시록 6장부터 16장까지 이어지는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재앙입니다.

이 세 재앙은 서로 단절된 것이 아니라, 상호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한 일곱이란 숫자는 천지 창조의 7일과 관련된 것으로서 7단계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7단계로 세상을 일관되게 심판하실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창조도 심판도 모두 하나님의 섭리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잘 말해줍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을 통하여 나오고 그분에게로 돌아가니 그분에게 영광이 영원히 있습니다. 아멘(롬 11:36).”

아무튼 요한계시록은 기원후 1세기 말경 로마제국의 박해의 위협에 놓여 있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수신자로 합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사단과 세상의 시련에 직면한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어진 교훈과 위로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먼저 사도 요한은 환상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통해 일곱 교회에 예언을 선포합니다(계 2-3장). 그리고 하늘 보좌와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계 4:2)를 통해 하늘나라의 모습을 봅니다. 이후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있는 봉인된 두루마리를 통하여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재앙이 순차적으로 시작됩니다.

사실 인(印)은 왕이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에서 관리자나 통치자, 혹은 어떤 권한이 있는 자가 사건과 논쟁의 결론으로 인을 쳐서 결정합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일곱인을 통해 이제 하나님의 뜻이 결정되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팔은 전투나 어떤 새로운 일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상대편을 의식해서 부는 것입니다. 대접은 말 그대로 물을 담아 놓는 것으로 대접을 붓는다는 말은 심판의 물이(불이라고 할까요?)이 쏟아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인과 나팔, 대접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구원’과 ‘전쟁’, 그리고 ‘심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구원의 인을 치고, 나팔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단의 세력과 영적인 전쟁을 선포하며, 마침내 진노의 대접은 사단과 가짜들과 외식하는 이들에게 붓는 심판을 의미합니다. 정리를 해 볼까요? 인(=구원), 나팔(=전쟁), 대접(=심판)으로 이해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이 모든 재앙들이 칠년 동안 이 땅에 임하는데, 칠년의 전반부 즉 ‘전(前)삼년반’에는 여섯 인의 재앙이 진행되고, ‘후(後)삼년반’에는 나팔재앙과 대접재앙이 진행됩니다. 그리고 전삼년반과 후삼년반 사이에는 네 천사가 사방의 모든 바람을 붙잡아 불지 못하게 하고(계 7:1), 하늘이 반시간쯤 고요한 시간(계 8:1)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일곱째 인을 떼고 일곱 나팔재앙과 일곱 대접심판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표1>로 한번 그려볼까요?

<표1> 일곱인, 나팔, 대접 재앙 구분

오늘의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 볼까요?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하더니(계 8:1)” 본문 말씀 이전 까지 여섯인을 떼어 여섯 가지 재앙을 선포하였습니다. 그 재앙의 내용과 상징을 정리해 볼까요?

1. 흰말(큰 전쟁에서의 승리와 끝없는 정복을 상징, 계 6:1-2), 2. 붉은 말(전쟁과 반란, 살인으로 평화가 붕괴, 계 6:3-4), 3. 검은 말(극심한 기근과 경제 파탄, 계 6:5-6), 4. 청황색 말(전쟁과 기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 계 6:7-8), 5. 순교자의 영혼들이 하나님께 호소하며(계 6:9-11), 6. 지진과 천체의 대혼란으로 악한 자들이 두려워하는 재앙(계 6:12-17)입니다.(<표2> 참조)

<표2> 일곱인, 나팔, 대접 재앙의 내용. ⓒ한국컴퓨터선교회(KCM Search)

이러한 여섯 인 재앙 이후 반 시간쯤 고요합니다. 그때 사도 요한은 천사가 일곱 나팔을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계 8:2).” 따라서 일곱인 재앙에서 일곱 나팔재앙과 일곱 대접심판으로 넘어가기 전의 말씀이 본문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볼까요?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계 9:3-5)

일곱 나팔을 받는 것은 환난 후반기의 재앙이 곧 시작될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 성도들의 기도가 담긴 금향로의 향연(香煙, 향의 연기)이 하나님께 올라가고 금향로에는 제단의 불이 담겨져 땅에 쏟아집니다. 이후 나팔재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당한 모든 고난과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과 신원(伸冤, 복수)의 의미로 읽혀집니다. 예수께서는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실 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진리를 사모하는 진실된 성도들의 기도를 통하여 가짜 귀신, 더러운 귀신을 내어 쫓고, 그들을 우레와 번개와 지진,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도들이 세상의 권세로부터 고난을 받지 않고, 오히려 거짓 성도들이 세상에 고난을 주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적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혐오를 조장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짜뉴스를 전하며, 성령의 이름으로 물질과 맘몬을 숭배하도록 하는 목회자와 그를 따르는 교인들이 바로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런 교회가 바로 사단의 소굴입니다. 심판의 날이 가까웠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그 길 만이 개신교가 살 길이요,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지 않는 길입니다.

5.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 먼데 있는 하나님께서

2017년 8월 빌리그레이엄 센터 사무총장인 에드 스테쳐는 ‘가짜뉴스 세상에서 진리의 사람 되기(Being people of Truth in a world of fake news)’란 글에서 ‘가짜뉴스 대응법 4가지’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당신이 확인할 수 없는 것은 공유하지 말라. 둘째, 진실함(integrity)을 지키라. 셋째, 당신이 공유하는 것이 사람들에 의해 인식될 수 있는지 확인하라. 넷째, 만약 당신이 문제의 일부라면 사과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사람답게 존중받는 세상, 생명이 생명답게 인정받는 세상입니다. 가짜 뉴스를 전파하는 외식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러한 생명과 준중이 없다는 말입니다. 생명 되신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바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아주 간단한 진리입니다. 일찌기 천재 시인 아르튀르 랭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유는 세상의 속도보다 더 빨라야 한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사유는 우리 안의 불의보다 더 빨라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안에 팽배한 악의 세력들과 그나마 겨우 맞설 수 있지 않을까요? 따라서 참된 신앙의 길은 기도를 통한 ‘치열한 사유’와 ‘뜨거운 실천’에 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우리들에게 희망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3-24)

예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2:58-59)

개신교인들이 정신 차려야 합니다. 목회자들이 바로 서야 합니다. 가까운데도 계시고, 먼 데도 계신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불의를 고발하는 이들에게 용서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가짜와 외식함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께로 나가시는 올 한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9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