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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 담론의 치유책으로 기능하는 기독교 신학담론과 실재: 라캉과 기독교 (1)
김태호(감리교신학대학) | 승인 2019.02.07 19:59

텍사스에 위치한 조웰 오스틴의 레이크우드 교회(Lakewood Church)와 같이 소위 메가 처치(Mega Church)라고 불리는 미국의 대형교회들은 구도자 예배(Seeker-sensitive Worship)를 통해서 급격하게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도자 예배는 1975년 미국 일리노이에서 빌 하이블스 목사의 윌로우크릭 교회(Willow Creek Church)를 통해 시작된 새로운 예배 형식(1)으로 대중적인 세속 문화를 교회 안으로 들여오는 것을 선교 전략으로 삼는다.(2)

문화라는 세속 담론에 감염된 기독교 예배

2011년 필자가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입학하여 서울에 있는 한 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에도 구도자 예배는 매우 뜨거운 감자였다. 한편에서는 타성에 젖은 기존의 예배 형식에서 벗어나 열린 예배를 통해 청년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해야 한다는 새로 부임한 담임목사님이 계셨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기존 성도들의 주저함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에 이 둘 사이의 긴장은 계속 유지되었다.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사실에 대한 목사님의 들뜬 마음과 함께 세속 문화를 교회 안으로 들여와야 한다는 성도들의 불편한 감정이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교차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거의 8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는 구도자 예배가 실재의 진리를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 기독교의 본질을 살려내는데 실패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심지어 구도자 예배는 오늘날 타락하는 한국 교회의 현실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기도 하다.(3) 교회 안에서 흐르는 질서와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 안에서 흐르고 있는 물신주의(Mammonism)의 질서를 구별하기 힘들어졌고 단지 고된 삶에서 얻은 마음의 응어리를 해소하기 위한 카타르시스의 기능을 수행하는 종교가 되어버린 지금의 기독교는 처음에 자신이 지녔던 고유한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구도자 예배는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함으로서 죄에 물든 신자 자신의 상태를 보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 교회는 영화 인셉션(Inception, 2010)에 나타난 것과 같이 드림머신을 통해 소비자가 꿈 안에 있는 자신이 설계한 환상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하는 자들과 같지 않은가?(4) 교회는 삶의 실재를 감추기 위해 소위 구도자로 불리는 이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삶의 이미지를 설교라는 언어 행위를 통해 설파함으로서 그들을 환상 안에 가두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필자는 라캉(Jacques Lacan)과 지젝(Slavoj Žižek)이 주장하는 종교에 대한 분석과 비판들이 기독교의 정체성을 다시 재고할 수 있게 하는 빛을 제공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라캉은 환상과 실재를 구분함으로서 데카르트적인 생각하는 주체가 아니라 대타자의 욕망에 이끌리는 분열된 주체로서의 인간 실존을 드러내며 진정한 주체성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사고할 수 없는 곳에서, 즉 언어라는 상징계(the Symbolic)의 밖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5)

또한 지젝은 라캉의 이론에서 실재계(the Real)의 역할을 강조하며 실재를 대면하여 기존의 상징계인 환상(fantasy)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상징계의 도래를 가능하게 하는 지점을 기독교 신학의 자리에서 발견한다.(6)  환상에 의해 왜곡된 실재에 대한 라캉의 분석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지젝이 주목하는 기독교의 핵심을 살펴봄으로써 필자는 오늘날 기독교 신학이 더 이상 세속 문화라는 환상에 오염되지 않고 다시 본래의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것이다.

우선적으로 필자는 기독교 신학이 라캉과 지젝의 이론과 연결될 수 있는 접점을 찾기 위해 초대 교부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의 『고백록』(Confession)을 통해서 그의 신학 안에 나타난 인식의 왜곡에 대해 살펴본 후 포스트모던 이후의 탈세속적 신학을 지향하는 급진 정통주의(Radical Orthodoxy) 신학에서 논의된 기독교 신학의 독특성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전개되는 환상과 실재의 구분에서는 어거스틴이 말한 인식의 왜곡이 라캉의 언어로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 실재로서의 신이 어떻게 기독교에 대한 지젝의 논의와 연결될 수 있는지를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신론을 통해서 조명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지젝의 관점을 통해 기독교 내러티브 안에 드러나 있는 실재를 구약, 복음서, 서신서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분석하고 궁극적으로는 기독교 신학이 어떠한 의미에서 문화라는 세속 담론의 환상을 극복하고 우리를 실재에 대면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담론으로써 기능할 수 있는지를 규명하고자 한다. 

기표의 연쇄에 휩싸인 어거스틴

“모든 시대에 걸쳐서 서구 그리스도교 신학의 터전을 마련했던 사람”(7)이라는 점에서 어거스틴의 대표적인 저술인 『고백록』(Confession)을 살펴보는 것은 라캉과 기독교 신학과의 인식론적인 접점을 발견하기 위해 중요한 작업이다. 어거스틴은 이 책에서 신을 인식하고자 하는 자신의 시야를 가로막는 어떤 장애물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러한 것들이 다름 아닌 스스로의 교만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내가 교만하게 당신을 거슬러 일어서고 곧은 목을 방패로 삼아 당신께 달려들었을 때 내 밑에 있는 낮은 사물들이 내 위로 올라가 나를 무겁게 내리눌러서 나는 쉬거나 숨을 돌릴 여유도 없었습니다. 내가 눈을 떠서 보려고 하면 세상의 사물들이 사방으로부터 무더기로 떼를 지어 내 눈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것들을 피해 내가 좀 생각을 하려고 하면 이런 사물의 영상들이 주께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고 나에게 “이 더럽고 쓸모없는 인간이! 네가 어디로 간단 말이냐?”라고 말한 것 같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상처에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상처받은 자를 고쳐 주시듯 교만한 자를 겸손케 하시려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교만으로 부풀어 당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습니다. 그것은 마치 내 뺨이 너무 부풀어 올라 눈을 덮어 앞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 것 같았습니다.(8)

어거스틴은 세상의 사물들을 바라보는 것을 기본적으로 인식의 왜곡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세상의 사물들은 그가 실재로서의 신을 보려고 할 때 그의 눈앞을 가로막고 그를 무겁게 내리 눌러버리는 어떠한 억압(repression)으로서 기능한다. 이것은 라캉의 관점에서 볼 때 자아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오인의 구조에 다름이 아니다.(9) 이 오인을 구성하는 ‘세상의 사물들’은 인간이 언어를 습득하면서 배우는 개념들이다.

▲ 바울 이후로 기독교의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어거스틴 ⓒGetty Imsage

이러한 개념들의 연쇄에 의해 오인이 생겼다는 사실은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할 때부터 억압이 작동된다는 라캉의 진술과 일치한다.(10)  즉, 어거스틴은 상징계(the Symbolic)라는 기표의 연쇄로 이루어진 현실(reality)이라는 세계 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가 실재로서의 신을 인식하려 하면 할수록 눈 앞에서 그를 시야를 가로막는 기표의 연쇄는 한치의 틈도 주지 않고 떼를 지어 그의 눈 앞에 모여들며 그 공백을 욕망의 또 다른 구체적인 대상들로 매워서 은폐해 버리려고 한다.(11)

어거스틴이 이러한 인식의 왜곡을 교만이라는 윤리적인 용어를 통해 표현한 이유는 그의 신학에서 인식이 항상 사랑과 관련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틸리히는 사랑으로서의 인식에 대한 어거스틴의 관점을 참여라는 개념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식이란 참여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낮은 차원의 영들이 물질적 세계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인식이 참여인 동시에 결합인 한, 그것은 사랑이다. 결합은 사랑을 의미한다. 따라서 물질적 세계를 인식하려는 사람은 그것을 사랑하며,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은 가장 높은 인식 곧 신적인 것에의 인식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를 받는다.(12)

무엇인가를 인식한다는 것은 그것에 참여하는 것이며 이 참여는 결합을 의미하기에 사랑으로 해석될 수 있다. 즉, 주판치치가 이야기 했듯이 이 왜곡된 인식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며 행위 차원에서 분열을 겪지 않은 주체가 어떤 대타자를 자발적으로 선택하게 됨으로써 발생한다.(13) 그렇기에 인식의 왜곡은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자신의 교만을 드러내는 신호였으며 우리는 이를 통해 실재와의 대면을 거부하고 타자의 욕망을 추구하기를 선택하는 인간의 교만, 즉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본성(sinful state)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필자는 어거스틴의 고백록 안에서 물질적 세계라는 환상에 거하기를 선택하고 실재를 기피하고자 하는 성향을 지닌 죄로 물든 인간의 실존을 발견한다. 기독교 신학은 우리의 인식이 이미 오인의 구조 안에 있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에 환상과 실재를 구분하는 라캉의 분석 담론의 빛에서 새롭게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오인의 구조인 환상을 어떻게 횡단하여 실재와 대면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14)

주이상스의 기제인 기독교 내러티브

라캉은 우리의 현실이 주이상스의 기제인 언어를 통해 접근되는 것이라고 보았다.(15) 즉,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는 언어라는 상징 시스템으로 구조화된 환상이며 우리는 이러한 현실(reality)이 실재(the Real)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분열된 주체인 인간의 실존을 고려할 때 언어의 사용은 인간이 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즉, 방황하는 주체를 고정시켜줄 언어라는 기제가 있어야만이 인간은 소위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따라서 세계가 언어를 통해서 인식된다는 사실은 극복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져야할 최종적인 관심은 언어를 “존재의 집”(the house of Being, 하이데거)으로 삼을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과연 어떤 언어를 매개로 하여 실재에 다가갈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로 수렴하게 된다.

필자는 여기서 기독교 내러티브를 실재에 접근하기 위한 유일한 매개로 간주하는 최근 기독교 신학의 한 경향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존 밀뱅크(John Milbank), 그레이엄 워드(Graham Ward), 캐서린 픽스톡(Catherine Pickstock)을 선두로 하는 급진 정통주의 운동은 세속 철학과 기독교 신학 사이의 차이점을 강조함으로서 계시의 자료인 기독교 내러티브의 원리들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신학만이 우리를 실재에 다가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급진 정통주의는 인식론과 정치적인 결과들을 수반하는 기독교인과 이방인 사이에 근본적인 비통약성을 설명하고자 한다. … 말씀의 계시를 믿음으로 수용한 공동체로서 에클레시아는 세상을 이방인들이 보는 것과는 과격하게 다른 방식으로 본다. 밀뱅크가 표현한 것과 같이, “기독교 내러티브 전체가 실재가 어떠한지를 말하고 있는 바대로 그대로이든지 아니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만약에 그러하다면, 우리는 실재가 어떠한지에 대해 접근할 다른 방도가 없을 뿐 아니라 그 문제 자체를 규정할 어떠한 부가적인 방법도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독특하게 기독교적 사고는 “유일하게 계시의 자료로부터 나오는 사고 밖에 없다.(16)

기독교 내러티브를 우리가 실재에 관해 논할 수 있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담론으로 보는 밀뱅크의 관점은 기독교를 실재를 드러내는 계시의 종교로 보는 지젝의 관점과 공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젝은 기독교 안에서 드러나는 계시가 무엇인지를 말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정통 기독교와 영지주의 전통의 대립 구도를 사용한다.

(신적)법을 보완하는 외설적 초자아는 대타자의 무능함을 은폐하는 반면에, 기독교는 이러한 무능함을 드러낸다. … 바로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다. …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종교에서 공적 텍스트는 언제나 은밀한 입교 의례와 난교 파티라는 보완물을 수반했던 반면에, 기독교의 공적 텍스트를 외설적인 방식으로 보완하려는 모든 시도는 기독교를 이교적 그노시스주의 전통 속에 이단적으로 재등록 하는 것에 불과하다(이는 그리스도의 ‘비밀교시’가 신약성경에 암호로 쓰여 있고 외전에 나와 있다고 보는 태도에 해당한다). … 좀더 감정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이를 더 신랄하게 공식화하자면, 신이 계시하는 것은 신의 숨겨진 권능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무능함뿐이다.(17)

여기서 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지젝이 말하는 이단인 영지주의와 정통 기독교의 대립이 라캉이 말하는 환상과 실재의 대립 구도에 절묘하게 대응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환상과 실재를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영지주의와 구별되는 참된 기독교에 대한 어떤 구조 틀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지젝이 지적한 기독교의 핵심인 신의 무능함이 성서 내러티브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실재에 접근할 수 있는 기독교 신학만의 독특성이 무엇인지 밝히고 이를 통해 세속 철학과 타협하지 않는 기독교적인 ‘종교 철학’(Religious Philosophy)을 확립하기 위한 토대를 놓을 수 있다. 그렇다면 라캉이 말하는 환상과 실재 사이의 벌어진 틈새는 과연 무엇이며 이 둘은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 것인가?

미주

(미주 1) Bob Burney. A Shocking “Confession” from Willow Creek Community Church. Townhall. Oct 30, 2007. (https://townhall.com/columnists/bobburney/2007/10/30/a-shocking-“confession”-from-willow-creek-community-church-n1381140)
(미주 2) https://en.wikipedia.org/wiki/Church_Growth
(미주 3) 정대운, “한국교회는 하용조 목사를 따라하다 예배를 잃어버렸다”, 바른 믿음, 2018.04.19.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151)
(미주 4) https://namu.wiki/w/인셉션
(미주 5) 자크 라캉, 『욕망이론』, 권택영 엮음(서울: 문예출판사, 1994), 83-84.
(미주 6) 슬라브이 지젝, 『죽은 신을 위하여: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 김정아 역(서울: 도서출판 길, 2007), 276-77.
(미주 7) 폴 틸리히, 『그리스도교 사상사』, 잉게베르크 C. 헤넬 엮음, 송기득 옮김(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5), 183.
(미주 8) 성 어거스틴,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선한용 옮김(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3), 223. (※ 볼드체 강조는 필자) 
(미주 9) 자크 라캉 (1994), 『욕망이론』, 50.
(미주 10) Jacques Lacan, On Feminine Sexuality: The Limits of Love and Knowledge: Book XX: Encore 1972-1973 (New York: W.W. Norton & Company, Inc, 1998), 56.
(미주 11) 백상현,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파주: 위고, 2017), 27.
(미주 12) 폴 틸리히 (2005), 『그리스도교 사상사』, 197.
(미주 13) 알렌카 주판치치, 『실재의 윤리』, 이성민 옮김(서울: 도서출판 b, 2004), 165.
(미주 14) Ibid., 365.
(미주 15) Jacques Lacan (1998), On Feminine Sexuality, 56.
(미주 16) 제임스 K.A. 스미스, 『급진 정통주의 신학』, 한상화 옮김(서울: CLC, 2011), 70. (※ 볼드체 강조는 필자)
(미주 17) 슬라브이 지젝 (2007), 『죽은 신을 위하여』, 204-6. (※ 볼드체 강조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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