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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전파를 위해 복음을 축소하는 것은 잘못이다세 가지 미완성의 장면들 속에서의 복음전파 (7)
최성일 교수(한신대 신학부/선교신학) | 승인 2019.02.08 19:42

이제까지 나의 주장은 복음전파의 분류법 중 무엇인가를 추적하려는 시도이다. 나는 내 주장이 지나치게 도식적이며 몇 가지 점에서는 분류법을 위해 약간 무리한 것임을 깨닫는다. 그렇지만 나는 제안된 이 도식화가 본문 자체의 자료를 과장하거나 왜곡한다고 믿지 않는다.

반복되어야만 하는 복음전파의 세 장의 드라마

나는 두 가지 중요한 점을 주장하고 싶기 때문에 이 방법으로 내 주장을 발전시켰다. 첫째, 복음전파는 각 장이 다른 장들과는 다르게 간직되어야만 하는 세 장의 드라마이다. 우리의 공통적 경향은 복음전파에 관한 모든 것을 고지라는 두 번째 장 속에서 와해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내가 모아 정리한 자료들은 이 드라마의 순서에 관한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가리킨다. 한편에서, 고지와 고지자는 실제적 충돌과 승리의 첫째 장에 참여하지 않으며 현재하지도 않는다. 충돌과 승리는 우리가 접근하지 못하는 다른 곳에서 일어난다. 다른 한편으로, 실생활로 실현된 사유화는 손쉽게, 신속하게, 혹은 자동적으로 고지로부터 뒤따라오지 않는다; 오히려 사유화는 어렵고, 희생이 큰, 힘든 일이다.

둘째, 복음전파의 드라마 전체는 본래 끝나지 않은 것이며 복음전파의 모든 부분에서 반복하여 표현되어야만 한다. 복음은, 그것의 극적인 특징이 이해될 때에, “끝난 거래”(a done deal)가 아니다. 그것은 탄력성이 있는 악과 왜곡, 그리고 소외에 직면하여 언제든 다시금 이루어져야 하는 거래이다.

이 드라마의 각각의 연출은 복음에 대한 어느 다른 공연만큼이나 긴급하고, 위험스러우며, 희생이 따르는 것이다. 성서는 이 위험한 소식의 계속적인 재현이다. 교회는 이 드라마에 계속 참여해서, 드라마가 세상 속에서의 교회의 삶에 대한 정의적 기사라고 계속 주장하는 공동체이다.

복음전파를 위해 복음을 축소하는 잘못

그 드라마가 단 하나의 이야기로 축소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같은 축소는 성서의 증언과 우리 자신의 삶의 경험 모두에게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제안하는 분류법은 아래의 표에서 소개된다.

지금 나의 목적은 성서 기사의 자료들을 단순히 검토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 의도는 그 같은 분류가 신앙과 교역의 우리 자신의 상황 속에서 어떤 것과 비슷할 것인지를 탐구하려는 것이다. 분명히, 누군가 그 분류를 확대해서 현대화하려고 추구할 때, 그는 반드시 약간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나는 내 모형이 모든 사람에게 즉각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우리는 서로 다른 판단을 하게될 것이다. 나는 적어도 내 제안이 우리 모두에게 비전의 각도를 제공하고 우리의 비판적인 대화에 공헌을 하게 될지 모른다고 마음 속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개별적이며 끝나지 않은 세 장면 모두 속에 있는 분류의 동시대적 완성(implementation)을 제안할 것이다.

복음선포의 언어는 거칠고 무뚝뚝하지만

나는, 아마도 가장 분명한, 고지라는 2장에서 시작하려고 한다. 신앙과 교역이라는 우리의 정황 속에서 고지는, 내 판단에 의하면, 반드시 구체적이며, 양보하지 않는 것이며, 그리고 기독론적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힘차고 간결한 문체의 고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죽음의 권세의 능력과 위협과 유혹을 이겨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주제이다. 나는 이 깨끗하고 분명하며 힘차고 간결한 문체의 진술이 단연코 타협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같은 단순한 진술로부터 여러 가지 주석들이 뒤따라 나온다.

첫째로, 선포의 이러한 언어적 행동은 인식론적으로 전복적(subversive)이다.(미주 1) 그 단언은 이 시대의 이성에 아무런 적응을 하지 못한다; 나는 복음의 이런 언어가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에게도 마찬가지로 모욕적이라는 의견을 진술한다. 왜냐하면 그 주장들은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너무나 급진적이고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너무나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복음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극적이다. 그것은 역사적 현실이 논쟁적인 것으로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허락하고 그리고 요구한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신학적 통찰력을 위해 중요한 이득이다. 그렇지만 이 언어가 우리의 환원주의들 중 그 어느 것에도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유의하라.

▲ 아레오바고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 ⓒWikipedia

이 언어는 어떤 교의적인 스콜라 철학도 요청하지 않으며 특별히 “개혁교회 전통”에 공헌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자기만족이나 자기도취를 허용하는 도덕주의도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적 평화나 평정을 제공하는 심리주의를 전혀 허락하지 않는다.

복음의 논쟁적인 언어는 무뚝뚝하고 거칠며, “사용하기가 쉬운 것”이 아니다. 내 주장으로는, 자유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인 대부분의 우리 교회들 속에서 그와 같은 주장이 말해지거나 들리게 된 주장의 극적인 능력을 허용하기 위해 강화(discourse)의 변화된 세계를 요구한다는 결론이다.

셋째로, 간결한 말에 의한 명료화가 결정적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극적인 단언은, 여전히 고지로서 간주될지도 모르는, 두 가지 중요한 추정(extrapolations)을 허용한다. 한편으로, 고지는 우리 신앙의 논쟁적인 특성을 묘사하기 위한 음악, 예술, 그리고 춤 속에서 대담한 예술적 창의성을 요청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 주장은 죽음의 권세가 우리의 일상 생활에 스며들게 하는 행위와 위험한 간섭에 의해 통째로 선포될지 모른다.

미주

(미주 1) 복음적 신앙의 인식론적 위기에 대해서는, Sharon D. Welch, Communities of Resistance and Solidarity (Maryknoll, NY: Orbis Books, 1985) 9-14와 여러 곳을 보라.

최성일 교수(한신대 신학부/선교신학)  sungildab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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