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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할 양식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빚용서와 간구(마 6:9-13)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19.02.10 17:48

지난 주부터 저희는 예수님께서 어떤 삶을 사셨고, 어떤 말씀을 전해주셨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실 각각의 복음서에 나타난 차이점과 공통점을 비교하고, 이에 따라서 예수님께서 실제로 어떤 삶을 사셨고,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를 살펴보는 일은 역사적 예수 연구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지만 저희가 살펴보려는 것은 단지 2000년 전 이스라엘 땅에서 실제 살아 숨 쉬셨던 예수님의 행적을 더듬어보는 일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과 말씀에 대해서 복음서를 기록한 교회 공동체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지금의 우리는 또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되짚는 일입니다.

우선 지난 주에는 딱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만,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서 무작위로 선택해서 말씀을 전하는 건 아닙니다. 우선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복음서에서 가장 큰 예수님의 말씀 묶음인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을 기본으로 해서 산상수훈에 나타난 순서대로 말씀을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마태복음을 기본 본문으로 놓고, 산상수훈 전체를 살펴보려는건 아닙니다. 지난 주에도 산상수훈의 첫 말씀인 팔복을 마태복음이 아닌 누가복음의 말씀으로 살펴보았던 것처럼 공관복음서에서 동일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본문만을 살펴볼 것이고, 산상수훈 본문은 거의 다 전해드렸지만, 가장 최근에 말씀을 전해드린 본문은 건너뛰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마태복음 5장은 이미 너무 자주 살펴봤기 때문에 6장으로 넘어가서, 우리가 매주 외우고 있는 주기도문을 보려고 합니다.

마태와 누가의 주기도문 차이점

주기도문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도 조금의 차이가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마태복음이 조금 더 길고, 누가복음이 짧습니다.

이에 대해서 마태복음이 본래의 기도에 내용을 추가한 것인지, 누가복음이 삭제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두 복음서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전하신 말씀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수는 있을 듯 합니다.

먼저 주기도문 본문 자체에서 보이는 차이점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리말로 번역된 주기도문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사이에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실제로 헬라어 원문 역시도 두 본문은 대동소이 합니다. 다만 마태복음에는 약간의 설명이 첨가된 느낌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없고 마태복음에만 기록된 부분을 살펴보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렇게 세 부분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세 부분은 의미 확장을 위해서 사용되는 부분으로 볼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마태복음의 조금 긴 기도문이 예수님의 본래 기도문이건, 누가복음의 조금 짧은 기도문이 본래 기도문이건, 의미에 있어서 아주 미세한 차이가 발생할지언정, 본질적 의미는 크게 변한다고 보이지 않습니다.

두 복음서의 주기도문 사이에는 이렇게 있고 없고의 차이도 있지만, 사용된 단어가 서로 다른 경우도 두 군데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의미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도록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헬라어 성경에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 Johannes Wierix, Maarten van Heemskerck, Philips Galle. 1569-1573 ⓒGetty Image

둘 중에서 그나마 크게 다르지 않은 부분은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간구에서 나타납니다. 마태복음은 ‘오늘(세메론 σήμερον)’ 일용할 양식을 주시길 간구하지만, 누가복음은 ‘날마다(카트 헤메란 καθ᾽ ἡμέραν)’ 일용할 양식을 간구합니다. ‘지금 이 순간’과 ‘지속성’의 차이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부분은 ‘죄 사함’에 대한 간구입니다. 새번역 성경에서는 이 차이를 명확하게 명시해놓았습니다만, 개정개역이나 공동번역에서는 차이를 표시하지 않습니다.

12절은 헬라어 원문에서 ‘죄 지은 사람’이 아니라, 성경의 각주에도 달려있듯이 ‘빚진 사람(오페일로 ὀφείλω)’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빚진 사람을 용서하여 주었습니다.’로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하지만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에서 차이가 생깁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우리의 ‘빚, 채무(오페일레테스 ὀφειλέτης)’를 탕감해달라, 또는 용서해달라고 쓰고 있는 반면에, 누가복음은 하나님께 우리의 ‘죄(하마르티아 ἁμαρτία)’를 용서해 달라고 말합니다.

만약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을 원문 그대로 주기도문만 읽는다면, 12절은 죄 사함을 위한 간구가 아니라 채무에 대한 대리 변제를 위한 간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14절에서 ‘잘못(파라프토마 παράπτωμα)의 용서’라는 말과 연결되면서 이러한 오해는 해소됩니다. 어쩌면 누가복음은 청중들이 갖게 될 이러한 오해를 미리 없애기 위해서 ‘빚’을 ‘죄’로 바꿔 사용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채무’가 ‘죄’로 연결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내용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이에 대해서 마지막에 조금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대신 우리가 살펴볼 마지막 차이점은 주기도문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6장 14-15절은 ‘잘못에 대한 용서’를 말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할 때, 하나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신다.’ 이것이 마태복음의 저자 또는 저작집단이 주기도문 안에서 발견한 핵심 내용이라고 생각됩니다.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11장 5-13절에서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본문이 이어집니다. 누가복음의 저자 또는 저작집단은 주기도문에서 ‘필요한 것을 간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공통점

두 복음서에서 주기도문에 바로 이어지는 말씀이 서로 다르다는 점은 분명 두 복음서가 주기도문의 핵심을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는 이해로 연결되더라도 무방하리라 봅니다.

두 복음서의 차이는 각각의 복음서가 처한 상황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그 상황을 파헤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왜 거의 동일한 주기도문에서 서로 다른 핵심을 발견해내었는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말 그대로 두 가지 이야기가 주기도문에 동일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간구’와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한 것처럼 우리를 용서해주시길 간구’하는 내용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이런 맥락은 마가복음에서도 나타납니다. 마가복음 11장 22-25절을 살펴보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성전 앞 무화과나무가 마른 사건에서 나타나는 말씀입니다. 사실 24절까지 ‘믿음과 간구’에 대한 말씀은 문맥상 이상하지 않습니다만, 25절에서 뜬금없이 ‘기도와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1장 내에서 문맥의 흐름은 이상합니다만, 말씀의 내용은 주기도문과 흡사합니다. ‘구하는 것을 주심’에 이은 ‘용서’의 흐름입니다.

정리해보자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나 저작집단이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간구의 이루어짐’과 ‘용서하고 용서 받음’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각각 취하고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이 두 이야기를 함께 말씀하시는 경우가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마가복음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유사한 예는 마태복음 5장 23-25절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물론 ‘간구’와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는 일’과 ‘용서와 화해’가 말씀 속에서 함께 나타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우리가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말씀하실 때에, 기도와 간구를 먼저 이야기하시고, 그 후에 사람들 사이의 용서와 이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를 말씀하신다는 점입니다.

각각의 복음서는 이 중에서 자신들의 상황에 맞는 주제를 예수님 말씀의 핵심으로 뽑고 그에 맞춰 자신의 복음서를 편집했지만, 예수님에게 있어서 이 두 가지 주제는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간구하면 주신다’에 중점을 두시지도, ‘용서한대로 용서받는다’에 중점을 두시지도 않고, 이 둘을 동일한 상태에서 말씀하신다는 점입니다.

빚짐과 용서

주기도문의 이러한 흐름은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통해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마태복음 18장 21-35절에 나타난 비유는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로 시작됩니다. 이 대화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만 달란트 빚진 종이 주인에게 간청합니다. 조금만 참아주시면 빚을 다 갚겠다고 애원합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서 그의 빚을 모두 탕감해줍니다. 빚을 탕감 받은 종은 나가는 길에 자신에게 돈을 빚진 사람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가 빚을 갚지 않는다고 감옥에 가둬버립니다. 이 이야기는 주인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고, 주인은 분노하게 됩니다. 그래서 빚을 탕감 받았던 종을 자신이 가둔 사람과 마찬가지로 빚을 모두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갇히도록 만듭니다.

우리가 매일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빚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간구해서 얻어낸 모든 것들도 우리에게 쌓여가는 하나님에 대한 빚입니다.

하지만 종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또다시 간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채무를 면제해주셨습니다.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당신이 주셨던 모든 것들을 그저 우리가 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받았던 모든 것은 은혜이고 복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빚을 청산해주셨음을 깨닫지 못하고, 혹은 알았더라도 곧 잊어버리고 나에게 빚진 사람들에게는 악착같이 빚을 받아내려합니다.

빚이라고 말하면 금전적인 이미지가 강합니다만, 조금 말을 바꿔보자면, 내가 도움을 준 사람, ‘도움’이라는 표현으로 바꿔도 나쁘지 않을 듯 합니다.

우리는 그런 표현을 가끔 사용합니다. ‘은혜도 모르는 놈’, ‘짐승도 은혜는 안다는데...’,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도 말랬는데...’ 이런 표현들을 쓸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내가 도움을 줬던 만큼, 그 도움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나에게 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얼마 전 인터넷 기사에서 그런 기사를 봤습니다. 학원 선생님이 학생에게 보낸 문자에 관련된 기사였는데, 문자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선생님이 너에게 돈을 빌려줬는데, 너는 그냥 그 돈만 갚았구나. 보통 이럴 때는 돈만 갚는게 아니라 작은 선물이라도 들고오는게 맞는거란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얘기다.’

뭐 이런 내용입니다.

별거 아닌 내용 같은데 기사화까지 된 이유는 이 선생님이 학생에게 버스비 2천원을 빌려줬고, 학생이 다음날 2천원을 갚으니까 그날 밤에 이런 문자를 보냈다는 겁니다. 도움에 보답한다는 말 자체는 다들 긍정적이지만, 2천원에 빌린 돈에 대해서 작은 선물을 한다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거 아니냐는 논란이 인터넷 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멀리 남의 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솔직히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아이를 위해서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면서, 먹이고 입히고 재우면서, 때로 애한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넌 아빠가 이렇게 먹이고 입히고 재워주는데 아빠한테 고따구로 할 거야?’ 제가 해 준만큼 아이도 제게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분명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이런 생각이 뿌리깊이 박힌 채로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잊어버린 채, 내가 받은 은혜는 잊은 채, 내가 받을 보답을 기다리며 살고 있지 않는가 생각해봅니다.

물론 은혜를 받은 사람이 그 은혜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을 품는 건 별개의 문제입니다.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향해, 당신도 하나님께 받은 게 있으니까 나에게 보답을 강요하지 말라는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주는 사람의 입장이 되라는 것입니다. 또한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답을 바라기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기도문은 단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완벽한 기도의 원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받기만 했던 우리에게, 받았던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에 대한 채무였음을 깨닫게 해주고, 하나님께서는 그 채무를 모두 면제해주셨음을 일깨워주며, 우리도 그와 같이 남을 도우며 살아가야 한다는 다짐이고 결단의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것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를 느끼고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받은대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매주 주기도문을 외우실 때마다 이 결단을, 이 결심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가 여러분으로 인해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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