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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창문 혹은 부르심”살바도르 달리의 「지중해를 바라보는(觀照) 갈라」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19.02.16 20:35

“인생은 가까이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 보면 비극이다.”

한번쯤은 들어봤을 채플린의 명언이 이처럼 두 가지로 회자된다.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말이다. “인생은 가까이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시선을 비극에서 줌아웃 하여 희극으로 끝낸다. 비극에서도 희극을 발견한다. 고개가 끄덕여 진다. ‘당장 눈앞에 경험하는 비극도 세월이 흘러 추억할 때쯤에는 희극으로 보일 수 있겠지.’ ‘그래, 한 걸음이라도 떨어져 바라보면, 비극에서도 희극적인 측면을 발견할 수 있지.’

그러나 두 번째는 희극에 줌인하여 비극으로 끝난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 보면 비극이다.” 희극에서조차 비극을 찾아낸다. 끝이 다르면 작은 차이가 아니다. 두 번째 경우도 고개 저어 부정할 수가 없다. 마냥 행복해만 보이는 삶도 가까이서 깊은 속 깊이 들어다보면, 저마다 고통이 다 있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 희극적이기만 한 일도, 비극적이기만 한 일도 없다. 삶은 줌인, 줌아웃으로 다양한 측면이 드러나는 신비다.

살바도르 달리의 「지중해를 바라보는 갈라」(1976) 역시 인생처럼 거리에 따라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그것을 통해 삶의 신비를 알아보는 시선이 열린다.

▲ Salvador Dali의 「지중해를 바라보는 갈라」(1976), 부제는 20m에서 보면 아브라함 링컨의 초상화 (Second Version) ⓒhttp://archive.thedali.org

작품 앞에 서서 바라보면, 묘하고 어수선한 풍경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복잡한 모양의 창문, 그 앞에 창밖을 바라보는 여인 갈라의 뒷모습이 있다. 갈라는 달리의 아내이자 예술적 영감의 뮤즈다. 「지중해를 바라보는 갈라」의 두 번째 버전인 위 작품에는 창밖 하늘 위쪽에 십자가를 진 예수 그리스도가 보인다.

달리의 작품, 「십자가 성 요한의 그리스도」(1951)에 있는 십자가상이다. 그러나 부제에 설명된 그대로 20m 거리를 두고 보면 다르게 보인다. 아브라함 링컨의 초상화다. 멀리서 보거나 실눈을 뜨고 봐도 알아볼 수 있다.

▲ 사진 왼쪽은 인스타그램 @MegHereThere가 촬영한 Salvador Dali의 「지중해를 바라보는 갈라」가 전시되어 있는 모습과 Salvador Dali의 「십자가 성 요한의 그리스도」(1951)

갤러리에서 이 작품을 안내하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놀라워하고 신기해한다. 그저 복잡한 창문 앞에 서 있는 여인의 뒷모습이었는데, 좀 떨어져서 실눈을 뜨고 보니 거대한 남자의 얼굴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떤 관람객이 물어왔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링컨을 그렸어요?” 달리가 뭐라고 설명했는지는 모르지만, 짐작이 가는 점은 있다.

링컨은 암살당한 대통령이다. 그리고 링컨의 얼굴로 된 창문 너머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살해당한 구원자다. 창문의 모양도 실은 십자가 형태다. 이 둘의 연관성은 수많은 의미를 묵상하도록 이끌어 준다. ‘암살당한 링컨’과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링컨의 얼굴을 통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여인’ 이 세 가지 모티브를 연결시키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가만히 작품을 바라보면, 그림의 언어로 달리가 이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다. “링컨의 얼굴은 창문입니다. 링컨의 얼굴을 창문 삼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이 보입니다. 그녀의 영감어린 시선은 뒷모습조차 아름답습니다. 누군가의 얼굴보다 실은 그 시선이 그려주는 세계가 더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대상 속에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은 대상이 아니라 시선 속에 깃듭니다. 그 시선을 따라가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보입니다. 하늘 위에서 지금도 십자가를 지고 계신 사랑입니다.”

“얼굴이 창문이다.” 의미심장한 화두에 사로잡힌다. 십자가 모양의 창문이 링컨의 얼굴로 보이는 순간, 창문은 얼굴이 된다. 뒤집어 보면 얼굴이 창문이라는 뜻이다. 산속 갤러리에서 작품을 안내할 때도 처음 만나는 얼굴들이 그저 낯설기만 한 것이 아니다.

한 번은 암투병 중인 여자분과 그 가족이 찾아온 일이 있다. 작품에 대해 나누다가 사연을 알게 되자, 그분의 얼굴에 다른 얼굴이 겹쳐왔다. 암으로 돌아가신 모친의 얼굴이다. 작품을 안내할 때 어머니에게 작품을 설명하는 것 같았다. 그 작품에 대해 어머니와 나누고 싶었던 말들이 꿈틀거렸다. 그분의 얼굴은 누구누구라 이름 붙은 기호 그 이상이 되었다. 얼굴이 영혼 깊은 곳에 무엇인가를 일깨우는 상징이 된 것이다.

일상을 살아가며 많은 얼굴을 본다. 그러나 진정으로 본 적이 얼마나 있을까? 어느 프로그램에서 낯선 사람을 둘씩 짝지어 무릎이 닿을 만큼 가까이 마주 앉게 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는 시간을 준다. 어디를 봐야할지 몰라 이리저리 방황하던 시선, 어색한 미소가 시간이 흐르면서 잔잔해 진다.

그리고 얼마나 바라봤을까,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낯선 그 얼굴, 그 어색한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자, 가슴 속에서 따스한 무엇인가가 솟아오른 것이다. 얼굴이 창문이 되어 무엇인가를 열어 보여준 게 아닌가. 서로의 영혼이 얼굴 너머의 무엇인가를 알아본 것이다.

달리의 뮤즈, 예술적 영감을 일깨워주는 여인이 창문을 통해 바라보고 있다. 얼굴을 창문 삼아 벽 너머의 세계를 관조(觀照, 원제목도 contemplate다)한다. 링컨의 얼굴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한다. 암살당한 이의 얼굴 속에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목격한다. 비극 속에서 희극이 보인다. 하나님의 사랑이 보인다.

지금도 십자가를 지고 있는 그 사랑은 부르심이 아닌가. 아무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랑은 자신에게로 초대한다. 사랑하도록 초대한다. 사랑의 삶에 동참하고픈 마음을 흔들어 깨운다. 그 얼굴이 아무 말하지 않아도, 강요하지 않아도 자신 안에 잠들어 있던 사랑을 일깨운다.

억울하게 죽어간 이의 얼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소리 없는 부르심이 들려온다. 링컨의 얼굴만 그럴까? 미웠던 사람의 얼굴은? 실망했던 사람도, 상처를 준 사람도 그가 중병에 걸려 고통 받고 있다면, 그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는 순간 영혼이 꿈틀거린다. 실망했던 일도, 상처 받은 일도 걸림이 되지 않는다. 위로가 되고 싶고 도움이 되고 싶다. 누가 강요한 것도, 의무감에 떠밀린 것도 아니다. 그저 얼굴을 바라봤을 뿐이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만 그럴까? 사랑할 수 없는 이의 얼굴에서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자신 역시 사랑 못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는 이의 얼굴에서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자신 역시 못 믿을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과 전혀 다르다 믿었던 이에게서 자신을 발견할 때, 바로 그때 하나님의 부르심이 들려온다.

사랑하지 못하는 그를 사랑하도록 부르신다. 그를 사랑함이 곧 자신을 사랑함이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는 그를 믿어주도록 불러주신다. 그를 믿어줌이 곧 자신을 믿어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의 얼굴도 눈이 열린 자에게는 하나님의 얼굴이고, 귀가 열린 자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영감을 일깨워주는 뜨인 눈, 들을 귀가 필요할 뿐이다.

예수님을 직접 봤으면 좋았을 텐데 … 아쉬울 때가 있다. 그러나 주님 당시에도 눈 뜬 이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오히려 눈 먼 이들이 다윗의 아들 메시야로 알아봤다(마태9:27~30). 보인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날이 밝았다고 낮은 아니다.

달리의 「지중해를 바라보는 갈라」에서도 십자가 위 예수님의 얼굴은 고개 숙여 보이지 않는다. 특정한 얼굴로 규정할 수 없게 감춰버렸다. 링컨의 얼굴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도록, 고통 받는 어떤 얼굴에서도, 미워하는 얼굴에서도, 추해 보이는 얼굴에서도 볼 수 있도록 감췄다.

앞에 있는 누군가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볼 수 없다면, 2,000년 전 주님의 얼굴을 본다 해도 알아볼 수 없다. 「지중해를 바라보는 갈라」 그녀가 뒤돌아보며 물어온다. “주님의 얼굴을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누구에게 귀 기울여 그 부르심을 들으려 하십니까?”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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