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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방(五放) 최흥종(1880-1966)조선교회의 뿌리를 찾아서(7)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 승인 2019.02.16 20:42

최흥종 목사의 본명은 최영종이다. 1880년 전라도 광주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던 시기는 조선왕국의 패망의 시기로 일본, 미국, 러시아, 영국 등등의 외세의 힘이 밀물처럼 들이닥치던 시기였다. 5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새어머니 밑에서 자라다 19세 때에 아버지마저 여의게 되면서 방황의 시절이 시작된다.

광주의 무쇠주먹이라고 불리는 이른바 건달로 20대의 초반을 보낸다. 25세가 되던 해는 일본이 청나라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미국과의 <가츠라ㆍ테프트> 비밀협약을 통해 조선 식민지 지배의 문을 연 을사늑약이 일어났다.

이때 그는 이 해에 대한제국 광주경무청 소속의 순검이 된다. 말이 대한제국이지 실상은 일본인 상관의 지시를 받은 일종의 매국적인 행위였다. 당시 그에게는 이러한 민족감정은 부족했던 것이다.

두 길 사이에서

그런데 그가 순검으로 발령을 받기 직전 이런 일이 있었다. 그는 양림동 언덕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교회를 짓는 모습이 아니꼽게 보여 패거리를 이끌고 건축현장에 와서 방해를 한다. 이때 공사 책임자인 김윤수을 만나게 되는데, 최영종은 20세 연상의 그의 기품 있는 모습에 고개를 숙이고 그의 걸어온 길, 그가 기독교인이 된 이유와 왜 교회당이 필요한지에 대한 얘기를 듣고 마음이 크게 흔들린다. 그해 성탄절 예배에 참석을 하기도 한다.

당시 선교사 부인이었던 유진 벨 여사는 그들이 온 건 호기심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순검이 되는데 그 이유를 유진 벨 목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 각지에서는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반대하는 투쟁이 한창입니다. 그래서 일본군들은 의병들을 잡아 들리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순검이 되어 의병들에게 도움이 되어주고자 합니다.”

처음부터 그런 생각이 전연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순검 직을 그만 둔 직후 일본은행에 취직한 것을 보면 출세 욕망이 컸던 것 같다. 그런데 순검 생활을 하면서 심정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래 그는 의병 12명을 호송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순사를 따돌리고 이들을 풀어주었으며, 잠복중인 의병장에게는 내통하여 도망치게 하였고, 감방 안에 갇힌 의병장 백난구와는 남의 눈을 피해 부둥켜안고 통곡하였다.

최영종을 의심하던 일본인 경무 고문은 그에게 광주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의 주모자들을 잡아 오라는 명령을 내리자 사직서를 내고, 이어 일본계 농공은행 토지조사원으로 3개월을 일하다 이 또한 그만 둔다. 인생의 진로를 놓고 고민하였던 시기였다.

영종이 흥종이 되다

그러다 그는 기독교에 귀의하여 양림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이때 최흥종으로 개명을 한다. 바울의 뒤를 따른 것이다. 회고하기를, “이제부터 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예수님을 위하여 살리라. 사도바울을 나의 삶의 표상으로 삶으리라. 광주의 깡패, 최영종과 사라지고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최흥종이 새롭게 태어나리라.”

사실 예수를 핍박하던 사울이 예수의 전도자 바울로 회심하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극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바울에 못지않은 중요한 회심 사건이 있는데, 그건 시몬 베드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회심에 대해서는 별로 전해지는 바가 없습니다.

▲ 오방 최흥종 목사님 ⓒGetty Image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그냥 베드로가 그물을 집고 있을 때에 지나가시던 예수께서 그를 보고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하자 즉시로 배와 그물과 가족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나선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사실이라기보다는 후대의 해석이 가미된 이야기라고 봅니다.

반면 누가복음 본문이 조금 더 사실에 가깝게 들립니다. 하루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호수가에서 그물을 씻고 있었는데, 예수께서 그의 배에 올라오신 후 말씀을 전하십니다. 말씀을 마치자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시몬은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 하고 그물을 던졌는데, 엄청나게 많은 고기가 잡혀서 다른 배 한 척을 불러 고기를 담았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베드로가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하고 말합니다. 이 부분에 논리의 비약이 있습니다. 예상을 깨고 고기가 많이 잡혔다는 사실과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 사이에는 논리적인 연관성이 없습니다.

저는 이 논리의 비약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 베드로는 그냥 보통의 어부가 아니라 혹 어쩌면 최영종마냥 갈릴리 지역의 소문난 깡패는 아니었을까? 깡패 최영종이 김윤수 집사나 유진벨 선교사 앞에서 고개를 숙였듯이 시몬 또한 예수 앞에 고개를 숙였던 것은 아닐까?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시몬에서 베드로로 그 이름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니면 로마제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어떤 조직의 우두머리였는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길을 지나가다 “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다.”라는 말 한마디에 배와 가족을 다 버렸다고 사실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 나이브한 일이다. 서로의 생각을 깊이 나누는 만남이 여러 차례 있었을 것이다.

개과천선(改過遷善)이라는 말이 있듯이 최흥종은 예수를 믿고 유진벨 선교사의 지도로 성서를 공부하면서 교회 전도사의 일과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광주기독병원의 전신인 제중원(濟衆院)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구면이던 포사이드 선교사가 길가에 쓰러져 있는 여성 나환자(한센씨병)를 보자 자기 외투를 벗어 덮어 나귀에 태우고 자신은 걸어서 오는 일이 있었다. 

에 이 사건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어 당시 많은 한센씨병 환자들이 광주로 몰려오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최흥종은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흉측한 나환자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부축하고 들어오는 포사이드 선교사와 마주치게 되었다. 마침 그때 환자가 떨어뜨린 지팡이를 최흥종에게 집어주기를 부탁한다.

최흥종은 순간 주저한다. 그 여인은 썩은 송장과 다름이 없었고 남은 두 손가락마저 문드러져 있었으며 떨어뜨린 지팡이에는 피고름이 범벅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선교사가 재촉한다. 당시 사람들은 나병환자의 몸에 닿거나 물건을 만지면 감염이 된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그때 최흥종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덥석 지팡이를 집어주고 나서 한동안은 그 자리에 얼이 빠져 서 있었다. 그때 일을 이렇게 회상한다.

“나도 알 수 없는 뜨거운 감동이 내 마음을 뒤흔들어 땅에 떨어진 지팡이를 주어서 환자에게 쥐어 주었습니다. 그 당시 교회 집사로 있으면서 제법 믿었다 하던 나였는데 사랑이라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동포인 환자를 같은 동포인 내가 꺼려하고 저 멀리 천만리 이역에서 온 외국인이 오히려 따뜻한 손길을 펴주고 있으니 예수님의 박애 정신은 고사하고 동포애조차 결여된 인간으로서 무슨 신앙인이냐는 자책이 나를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최흥종 집사는 나환자들과 함께 기거하며 저들을 업어 나르기도 하게 된다.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 되었습니다. 가족들도 부모들도 꺼려하는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게 된 것이다.

(개인) 회개에서 (민족) 소명으로

저는 이 경험을 이사야가 성전에서 경험한 신비한 경험에 비유하고 싶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기도하는 중에 하느님의 거룩함을 접하고는 자신은 죽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새롭게 태어났고, 그래 하늘에서 '내가 누구를 보낼꼬' 하는 소리가 들리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답한다. 곧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변화의 과정을 말한다.

사울이나 시몬이 자신의 과거의 죄를 깨닫고 돌아서는 회개(悔改)가 첫 번째 과정이라면, 새로운 미래를 향해 삶을 바치는 소명(召命)은 두 번째 과정이다. 이때부터 그는 선교사보다 앞장서서 나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으며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 천 평을 내놓고 거기에 나환자 병원을 세웠던 것이고 이후 이들을 돌보는 일에 전 생애를 다 바쳤던 것이다. 물론 이로 인해 가족들과 친지들로부터는 심한 외면과 구박을 받았다.

그런데 최흥종 선생의 삶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의 위대한 생애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개인영혼구원의 영역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사랑과 정의는 동전의 양면이다. 그는 사랑 한쪽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이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당시 미국 선교사들은 조선민중의 복지를 위해서는 매우 헌신적으로 일을 하였지만,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에는 반대하고 있었다. 그건 이미 미국 정부가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동의를 하였을 뿐더러 미국 또한 쿠바나 필리핀 등등 여러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미국 선교사들은 영혼구원과 예수천국을 외치면서 조선교회가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비신앙적인 활동으로 가르쳤다. 이는 예수의 정신에 어긋나는 가르침이었다. 지금도 남한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당시 미국선교사들이 심어놓은 잘못된 기독교 신앙관을 갖고 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되는데 태극기부대가 대표적이다.

최홍종은 31세에 민족지도자 양성을 위한 광주 YMCA 결성에 적극 지원하였고 32세에는 김윤수 집사와 함께 북문안교회의 초대장로가 되면서 애국하는 길을 적극 찾게 된다. 그런 의도에서 33세에 시베리아 선교사를 자청하게 되는데 노회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차 요청하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여기서 우리는 왜 최흥종 장로는 환자를 돌보는 일이나 교회 일을 뒤로 하고 시베리아 선교사로 가려고 했던 것일까? 그건 그곳에 고통받는 형제들이 있기도 했지만, 독립투쟁의 참여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 이 일은 차후로 미루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의 길을 걷는다. 당시 신학교육은 3개월의 강의와 9개월의 현장실습으로 진행이 되었기에 전도에 열심을 내어 <북문밖교회>를 개척한다.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나라 사랑을 강조하는 열정적인 설교와 나환자를 돌보는 헌신적인 사랑으로 인해 교회가 크게 부흥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 복음은 나라를 되찾고 그 나라가 예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나라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그에게 광주지역 31독립만세 운동을 준비하는 책임을 맡게 된다. 거사일을 장날인 3월 8일로 잡았는데, 그는 현장을 직접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 인력거를 타고 가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쳐 일경에 체포를 당한다. 그가 광주의 독립만세항쟁의 주도자임을 안 일제는 중형에 해당하는 3년형을 언도한다.

최흥종 장로는 옥중에 있으면서 자신의 앞날에 대해 많은 것을 고민한다. 수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독립은 물거품이 되었을 뿐더러 사회지도자들은 일제의 회유와 압박 앞에서 돌아섰다. 설상가상 정신적인 기둥이었던 김윤수 장로가 죽고 벨 선교사 또한 갑작스런 아내의 죽음으로 인해 미국으로 돌아가고 만다.

14개월의 옥고를 마친 그는 41세에 목사 안수를 받아 자신이 개척한 ‘북문밖교회’의 담임목회자로 부임하여 교회를 성장시킨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여전히 시베리아에 있었다. 그래 다시금 지원하여 2년동안 시베리아에 머물게 된다.

이 당시의 활동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다시 광주로 돌아와 이번에는 <남문밖교회>의 목사로 봉직을 하면서 YMCA 운동은 물론 노동운동, 빈민운동 등등의 사회운동에 열심을 내게 되면서 교회 목사직을 사임하게 된다. 그러다 다시 시베리아 선교사로 갔다가 민족운동 혐의로 검거가 되어 3개월 만에 추방 명령을 받게 되는데,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어 총살직전에 독립군에게 구출을 받는다. 이후 광주 신간회 지회장의 역할을 맡아 좌우 협력의 길을 모색하면서 사회 각 분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지금의 여수 애광원 설립과 소록도를 한센씨병 환자 전용 거주지로 만든 일이다. 그는 관청의 협조가 미미하자 어느 날 이를 항의하기 위해 150명의 나환자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는데, 이 소식을 들은 전국의 많은 병자들이 함께 하여 도착할 당시에는 400명이 넘었다. 총독 면담을 통해 소록도를 나환자 전용주거지역으로 만들어 당시 100명 정도의 수용시설을 확충하여 6천명이 거주할 수 있게 만들었는데, 이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시설이었다. 당시 전국에는 약 만 오천 명의 병자들이 있었다. 또한 전남도지사와 총독 면담을 통해 걸인 수백 명이 집단으로 거주할 수 있는 움막 거주지와 경비 지원을 마련하기도 한다.

그런데 나이 55세가 되는 1935년 돌연 최흥종 목사는 지인들 앞으로 “사망신고서”를 보내고는 한동안 자취를 감추면서 모든 공직에서 벗어난다.

“1935년 3월 17일 이후, 나 오방 최홍종은 죽은 사람임을 알리는 바입니다. 인간 최흥종은 이미 죽은 사람이므로, 차후로 거리에서 나를 만나거든 아는 체를 하지 말아 주시기 바라오.”

사실 이때는 바야흐로 일본이 대동아전쟁을 일으키면서 내선일체와 신사참배가 강요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불의한 세상 속에서 자신을 지켜내고자 하는 마지막 선택의 길이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사망통지서를 내기 전 거세수술을 받기까지 하였다.

영원한 자유인

이때부터 자신의 호를 오방이라고 하였는데, 그 의미는 이러하다.

“다섯 가지의 얽매임으로부터 해방받는 것으로 첫째는 가사(家事)로부터의 방만(放漫), 둘째 사회에 방일(放逸), 셋째 경제에 방종(放縱), 넷째 정치에 방기(放棄), 다섯째 종교에 방랑(放浪)이 그것이다. 즉 혈육의 정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적으로 구속을 받지 않으며, 경제적으로 속박받지 않고, 정치적으로 자기를 앞세우지 않으며, 종파를 초월하여 정한 곳이 없이 하나님 안에서만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다섯 가지의 생활신조를 말함이다.”

물론 이는 비판받을 소지도 있고, 가족들로부터는 심한 반발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후에는 이를 새롭게 해석하기를 “가족에 대하여는 방만함을 버리고, 사회에 대하여는 안일함을 버리고, 경제적으로는 물질에 예속되는 것을 버리고, 정치에서는 무관심과 무책임함을 버리고, 종교에서는 신조 없이 옮겨 다니는 것을 버린다.”로 말했다. 이는 죽는 것이 곧 사는 것이다라고 하는 십자가의 도를 외친 예언자의 목소리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후 최 목사는 무등산 자락의 오방정에 은거하면서 낮에는 거지들과 한센씨병 환자들과 어울리고 밤이 되면 손수레에서 잠을 청했다. 이 당시 의재 허백련 선생과 함께 거하면서 성경과 도덕경을 읽으면서 기도생활에 몰입한다. 식사는 소나무잎과 생쌀가루를 먹었다. 일종의 도인의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세상과 단절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건 찾아오는 사람들과 예배를 드리고 전남 의전을 세우는 일에는 앞장 서서 일을 하기도 했다.

이후 해방이 되자 전남광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를 받지만, 17일 만에 이를 다른 이에게 넘겨주고 만다. 사실 이때도 미군정은 좌익 세력을 색출하는 일에 심혈을 기우리고 있었고 좌우 이념 대립이 점점 심화되던 시기였다. 최흥종 선생은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끼어들지 않고 한센씨병 예방협회 일과 농민지도자 양성학교(삼애학원)를 세우는 일 그리고 결핵환자 요양소인 송등원을 세운다.

이 시기에 김구 선생이 오방 선생을 찾았는데, 대화를 나눈 후 정치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알고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는 휘호를 써주었는데, 오광주 YMCA 사무실에 걸려 있다. 86세가 되던 해 최흥종 선생께서는 전국의 목회자들에게 유언장을 발송하고 금식을 시작하시어 95일째가 되던 날 하늘나라로 가셨다. 광주 사회장으로 지내는 장례식장에는 수많은 학생, 걸인, 한센씨병 환자들이 자리를 가득 매웠다.

생전에 가장 가까이서 따르며 존경했던 고 김천배 씨는 최흥종의 미완성 전기에 이런 글을 남겼다.

“그는 성자요, 투사요, 전도자요, 사회운동가였다. 한 사람의 인격 안에 이 모든 가지의 상충하는 가치가 하나로 묶여져 있다는 것은 하나의 경이가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범용(凡庸)의 자리에서는 선생은 하나의 괴벽, 하나의 모순, 하나의 호사의 권화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인격이 이 다면성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이름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목자’라는 명사일 것이다.”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면 교회 성장과 세상 성공이 곧 예수 신앙이라는 축복신앙으로 교회의 외형은 커졌지만, 결국 내부는 극도로 부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서 우리는 최흥종 목사의 민족의 미래를 위해 젊은 지도자들을 양성하고 가난하고 고통 받는 민중들과 함께 한 신앙이야 말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예수신앙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또 하나 기억할 것은 최흥종 목사는 도덕경과 성경을 함께 읽으면서 제도적 종교를 초월한 십자가의 도를 통한 사랑으로 하나 되는 진리를 터득했다. 여기에는 성자 이세종의 영향은 물론 류영모, 이현필, 함석헌, 효봉 선사 등등과 깊은 사상의 교류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교회가 다른 종교를 배척할 것이 아니라 남북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해 함께 손잡고 나아가야하는 진리의 동반자임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남북통일의 가장 큰 걸림돌이 교회라고 말한다. 사실 예수의 가르침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쳤지만, 남쪽의 그리스도인들은 북을 원수로 여기고 있다. 바라기는 남한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최흥종 목사님의 삶을 본받아 하느님 나라 건설이라는 대의(大義)를 위해 이념이 다른 북의 지도자들과 함께 손잡고 나아가기를 기도한다.

참고

오방기념사업회, 『화광동진의 삶: 오방 최흥종 선생 기념문집』, 2000.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choshal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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