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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2: 소유와 신뢰의 문제(삼하 24:18-25 행 4:32~5:11 눅 14:25-35)주현절 여덟째 주일(2월24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9.02.21 22:03

1. 어결전? 어결평!

지난주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땅의 문제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땅을 떠나서는 살 수 없기 때문에, 땅의 문제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창세기에 나오는 처음 인간, ‘아담(Adam)’도 ‘흙(adamah)’이라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그 만큼 땅은 우리 인간과 땔 수 없는 관계인 것입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도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지난주와 달리 오늘은 하나님 나라가 소유와 신뢰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소유와 신뢰의 문제를 잘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 있습니다. 남미 칠레에 있었던 일입니다.

1970년 남미 칠레에서 살바도르 아옌데(1908-1973)가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아옌데는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로 집권한 사회주의 정당인 칠레 사회당 출신이었습니다. 아옌데의 원래 직업은 소아과 의사입니다. 어린아이들의 건강에 관심이 많았겠죠? 당시 칠레는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특히 유아기 어린이들이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는 비율이 세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따라서 아옌데는 우유에 관심을 가집니다. 단백질과 지방, 칼슘과 비타민이 고루 함유된 우유가 어린이들의 건강을 지켜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칠레 국민들이 가난해서 자녀들에게 충분한 분유와 우유를 사 먹일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옌데는 15세 이하의 모든 칠레 국민들에게 매일 하루 0.5리터의 분유와 우유를 무료로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정책이 잘 되었을까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왜냐구요? 이 정책을 반대한 세력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네슬레(nestle)’입니다. 잘 아시죠? (세계 최대의 식음료 기업으로 2015년 12월 기준 전 세계 약 200여 개 국가에 진출해 있으며, 직원은 33만 9,000여 명, 연매출은 916억 스위스 프랑(약 110조 원)에 달합니다.)

<야엔데와 그를 환호하는 군중, 네슬레 상표>

스위스의 다국적기업인 네슬레는 커피와 우유를 주품목으로 하는 기업입니다. 그런데 네슬레 입장에서 보면, 칠레 정부가 분유와 우유를 무상으로 공급한다는 것 자체도 문제지만, 칠레에서의 성공사례가 다른 중남미 국가들로 번져갈 경우에는 더욱 큰 골칫거리가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중남미의 우유와 분유시장을 장악한 네슬레는 1971년 아옌데 정부에 협력을 거부합니다. 아옌데 정부가 네슬레에 우유 판매를 요구했으나, 이 요구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아옌데 정부는 키신저를 비롯한 미국 정부와 네슬레를 축으로 하는 다국적기업에 의해서 고립되고, 결국 1973년 CIA와 결탁한 피노체트 국방장관의 쿠데타로 인해 무너지게 됩니다. 아옌데는 사살 사살됩니다(군사정권은 자살로 조작합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칠레의 어린이들은 다시 영양실조와 배고픔에 시달리고 굶어 죽어 갑니다.  

미국의 경제학자로 독점 자본의 폐해를 이론적으로 규명한 폴 스위지는 『독점자본』 (1966)이라는 책을 통해 ‘생산력 증가에 따른 거대기업의 출현→만성적인 과잉생산과 저소비 발생→과잉생산의 해소 필요성 대두→군수산업 확장→자본주의 국가의 군국주의(軍國主義)화’로 자본주의를 분석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독점자본은 이익을 챙기기 위해 전쟁도 불사한다.” 어결전! 어차피 결론은 전쟁이라는 말입니다. 독점자본주의는 자국에서 벌어진 과잉 생산을 타국의 국민들을 억압함으로 해결한다는 것입니다. 소유욕은 이렇게 무섭습니다.

이번 주 27일과 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립니다. 한반도 평화에 있어서 중요한 한주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힘, 곧 군사력과 핵무기를 의지했던 두 정상이 이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을 봅니다. 폴 스위지의 예언이 이번만큼은 어긋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어결평, 어차피 결론은 평화가 되어야겠죠? 노벨상은 트럼프 대통령이 가져가시고, 평화가 한반도에 정착되기를 바랍니다. 아무튼 개인이나, 공동체, 국가 모두 눈에 보이는 소유의 유혹이니 탐욕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3·1절 100주년 기념주일이기도 한데, 일본 제국주의는 그들의 야심으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전체를 소유하려고 했습니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여기서 대동아란 동아시아에 동남아시아를 더한 지역)’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서구열강의 식민지 지배를 타파하고, 아시아 여러 민족들을 해방한다는 명목으로 대동아공영권 결성을 주장하면서 침략정책과 전쟁을 정당화했습니다. 이것은 메이지(明治)시대 이래, 일제의 대외침략이론인 ‘아시아 주의’, ‘아시아 연대론’을 계승한 침략주의 사상이었습니다. 경제적 측면에서 대동아공영권의 본질은 전시 국가독점자본의 폭력적인 블럭 경제체제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황군환영(오른쪽 부터)일본군대는 신병, 영미가 우리를 속였다, 일본만세>

결국 일본 제국주의는 대동아공영권을 태평양전쟁의 궁극적 목적으로 선전하였고, 이 전쟁을 ‘서양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하여 동아시아 보위를 위한 자위전쟁’, 혹은 ‘미국과 영국 세력으로부터 동아시아 민족을 이탈시키려는 해방전쟁’, ‘새로운 세계질서를 구현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식민지 혹은 점령지의 민족독립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합니다. 그러나 대동아공영권은 점령지였던 조선의 저항과 연합군의 총반격으로 인해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3·1운동은 일제의 그 소유욕과 탐욕, 야만에 평화적으로 저항한 보기 드문 인류 역사의 고귀한 유산입니다. 어쩌면 하나님 나라의 외침이라고 할까요? 성서의 역사는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2.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유형

하나님 나라에 관해 성서의 역사를 통해 잘 설명해준 책 가운데, 죠지 V. 픽슬레이의  『하느님 나라』 (한국신학연구소, 1987)라는 책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구체화된 하나님 나라의 모습 6가지 단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시편과 예언자들의 작품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께서 왕으로 등극하는 축제의 모습을 통해서입니다.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으며 주변 민족들의 신앙과도 비슷한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궁정 제의에서 왕으로 찬양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용맹스러운 능력을 발휘하여 악한 바다의 세력을 물리치고 세상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의 보좌에 오른다고 고백됩니다. 이러한 제의를 담고 있는 본문들과 시편들은 유대교과 기독교에 오래도록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왕권을 제사 영역에 한정하여 추상화시켰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왕국 이전 시대입니다. 출애굽 백성과 가나안 고지대 농민들의 연대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라고 볼 수 있는데, 픽슬레이는 이것을 하나님 나라의 표준적인 모습이라고 봅니다. 픽슬레이의 말을 들어 보겠습니다.

“초기 이스라엘에서의 야훼의 왕권이란 정치적으로 모든 인간적 지배를 거부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 인간적인 왕권의 거부야말로 이스라엘을 주변국들과 다르게 만들었던 점이다. 만약 야훼가 이스라엘의 왕이라면 인간 지배자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은 야훼에 대한 반역이 될 것이다.”

힘과 권력을 가진 인간이, 약하고 힘없는 다른 인간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이 세상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생각은 전혀 다른 가치관을 우리들에게 던져줍니다. 따라서 초기 이스라엘의 역사적 실천은 인류 역사의 위대한 실천인 것입니다. 픽슬레이는 이후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이 왕국 이전 시대의 이스라엘의 원초적인 하나님 나라 개념과 비교하여 평가되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기원전 10세기에서 6세기까지, 곧 다윗왕국의 공식 국가 이데올로기가 되었던 하나님의 나라 개념입니다. 사울과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은 주변 도시 국가처럼 왕을 세우게 되는데, 다윗은 이스라엘의 국가부정적인 전통과 대립하여 영속적인 군대와 국가를 건설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솔로몬 시대로 이어지면서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 성전은 지배를 정당화시켜 주는 산실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전의 가나안 군주들의 바알 제의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심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왕들이 백성을 관리하고 통치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전락되었습니다.

네 번째 단계는 다윗왕조 몰락 이후, 하나님의 나라가 사제관료제 사회에 부속된 개념으로 전락한 시대입니다. 바벨론 포로 귀환이후, 페르시아는 정책적으로 페르시아 제국 정부와 생산 담당자들인 유다 주민 사이의 완충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사제계급을 후원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백성들을 지배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성전체제는 유다 왕조가 아니라, 페르시아 제국의 정치적 권력을 통해 유지됩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신약 시대 예수님 당시의 하나님 나라 개념인데, 젤롯당은 하나님 나라를 팔레스틴과 갈릴리 농민들의 정의와 자유의 실현으로 이해합니다. 노예사회라는 새로운 상황 속에서, 다시 하나님 나라를 힘없고, 소외된 가난한 자들을 위한 희망으로 육화시키려는 시도였습니다.” 이것은 두 번째 단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 개념에 대한 성서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단합시켜 제국의 수탈 이념에 충실한 사제 계급이 장악한 성전권력에 대항하려고 애썼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보다도 오히려 사제권력과 성전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억압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성전이 본래의 목적대로 빈민을 위해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이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7:11)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야를 인용하시면서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막 11:17-18)

마지막 여섯 번째 단계는 예수님 이후, 바울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픽슬레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교사 바울의 지도 아래 하나님 나라는 영적인 나라가 되었고, 그로 인해 수세기를 통하여 교회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 변화는 구체적인 땅의 문제, 노예 해방의 문제인 하나님의 나라가 영적이고 관념적인 나라로 변질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픽슬레이의 견해에 모두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어느 정도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지평을 잘 보여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3. 하나님 나라: 큰 잔치와 제자도

오늘 신약 복음서의 본문 말씀은 큰 잔치 비유(막 14:15-24) 이후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큰 잔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초청을 받았으나, 일상적인 이유들로 초청을 거부한 이들의 불신앙을 경고하고, 역으로 잔치에 초청을 받고 참석한 자들에게는 풍성한 은혜를 베푸신다는 내용입니다. 본문은 이후 예수께서 무리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 볼까요?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5-27)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곧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길에 온전한 헌신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헌신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도의 모습을 계속해서 들려주십니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눅 14:28-30)

동일한 비유를 한번 더 언급하십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눅 14:31-32)

그럼, 이러한 비유는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께서 그 비유의 의미도 말씀해 주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눅 14:33-35)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길을 떠나는 이들에게 전적인 헌신도 필요하고, 제자도도 있어야 하는데, 그 핵심은 논리적 계산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깨닫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신의 소유를 버리는데 있다는 역설적인 명령으로 제시됩니다. 앞서 큰 잔치에서 잔치를 거절 한 사람들을 살펴볼까요? 그들이 잔치를 거절한 이유는 ‘밭을 사서 나가보아야 하며, 소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야되고, 장가들었으니 가지 못하겠다(눅 14:18-20)’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유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큰 잔치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한 소유의 문제에 있어서 자유로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4. 하나님 나라: 소유의 문제 (삼하 24:18~25)

구약 본문 사무엘하 24장 말씀은 다윗이 인구조사를 실시하여, 하나님보다 군대의 수를 더 의지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군사력과 무기, 힘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윗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선견자된 선지자 갓을 통해 다윗에게 세 가지 징벌을 제시하면서 그 중 하나를 택하라고 명하십니다. 곧, ‘칠년 기근’과 다윗이 ‘원수에게 쫓겨 석 달 동안 그들 앞에서 도망 다니는 것’, 그리고 ‘사흘 동안 온 땅에 전염병’이 있는 것입니다(삼하 24:13).

다윗은 전염병을 택합니다. 따라서 이 전염병으로 이스라엘의 백성 중 죽은 자가 칠 만명이었습니다(삼하 24:15). 다윗은 자신의 소유욕 때문에 죽어가는 백성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회개합니다. 따라서 다윗은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삼하 24:17).”라고 외칩니다. 회개하는 것이죠. 오늘 본문 말씀은 그 이후의 말씀입니다.

“이 날에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아뢰되,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소서 하매, 다윗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바, 갓의 말대로 올라 가니라. 아라우나가 바라보다가 왕과 그의 부하들이 자기를 향하여 건너옴을 보고 나가서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이르되,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하니, 다윗이 이르되 네게서 타작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라 하는지라.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아뢰되, 원하건대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 나무에 대하여는 마당질 하는 도구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 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아뢰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삼하 24:18-23)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은 예루살렘 성 밖 북쪽 모리아 산에 위치합니다. 모리아 산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친 장소입니다(창 22:2). 다윗은 자신의 성에서 그곳을 내려다 볼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이 타작마당에 성전이 세워집니다. 역대하 3장 말씀을 볼까요?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아라우나와 동일 인물)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대하 3:1)

자, 여기서 아라우나의 믿음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제단을 위해 자신의 소유를 다 내어놓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윗 왕도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삼하 24:24-25a)

그렇습니다. 탐욕과 소유욕 때문에 벌을 받았는데 다시 탐욕을 부릴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삼하 24:25b).”다고 말씀하십니다.

참 아름답죠? 자신의 소유를 포기하고, 내어 놓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에 내리는 재앙을 멈추신 것입니다. 여기 번제와 화목제가 나옵니다. 번제(올라)는 ‘올라가다’라는 뜻으로 가죽을 제외한 모든 제물을 태워, 향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속죄하기 위해 피 흘려 죽으심을 의미합니다. 화목제(쉘렘)는 ‘온전하다, 끝내다’는 의미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평과 친교를 위해 드리는 제사로서 자원제에 해당이 됩니다. 주로 콩팥과 기름을 불로 태워 드리는 제사입니다.

<아라우나(오르난)의 타작마당>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과 그 사랑으로 인한 화평과 친교의 화목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소유를 온전히 내려놓고 나갈 때 가능한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았습니다. 따라서 초대교회는 자신의 소유를 내려놓고 함께 공유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로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5. 하나님 나라: 신뢰의 문제

사도행전 본문 말씀은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자신의 소유 없이 모든 것을 나누고 함께 하는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행 4:32-35)

이러한 나눔에 앞장 선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회심한 바울을 처음으로 사도들에게 소개하였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참조 행 9:26-27).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 4:36-37).” 그러나 사건이 생깁니다. 잘 아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이야기입니다. 말씀을 같이 읽어볼까요?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행 5:1-11)

 

<바나바와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

여기서 문제는 땅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는데 땅을 판 값을 감춘 것도 있지만, 신뢰의 관계가 깨어진 것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를 사탄이 마음에 가득하여 성령을 속였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서로 신뢰할 때 믿음을 갖고, 의지하고 소유의 문제에 있어서도 자유롭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소유를 함께 하는 나라입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가 그러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떤가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소유와 신뢰의 문제입니다. 우리 안에 서로를 신뢰하는 믿음이 없으면 이 교회당이 바로 지옥입니다. 신뢰를 하지 못하기에 내 것과 네 것, 내 편과, 네 편으로 나누고 끊임없이 분쟁합니다. 그러나 신뢰가 있을 때, 미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을 때, 이곳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리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소유를 함께 합니다.

제가 병원에 있을 때, 장로님들과 재정부에서 의논하여 저의 병원비를 책임지겠다고 의논하셨나 봅니다. 김영기 장로님께서 병원에 심방 오셔서 그 결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돈의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목회자를 이렇게 생각해주는 장로님과 교인들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마음이 고마워 감사 헌금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또 아동부, 학생회 아이들 세뱃돈으로 아름답게 썼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서로 신뢰하고, 서로 소유를 나눌 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교회로부터 시작되어, 이 지역을, 그리고 부산 남구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일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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