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브이 지젝(Slavoj Žižek)은 기독교의 참된 본질은 신의 무능한 실재를 드러내는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1) 그렇기에 구약성서에서 율법과 제의를 통해 어떤 사항들에 대한 금지를 명령하는 유대교의 신 야훼의 모습은 지젝에게 전능한 대타자로 간주되어 실재로서의 신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다가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구약(신론) – 실재와의 대면을 가로막은 대타자

하지만 지젝은 구약의 아버지인 신과 신약의 구원자인 신을 대립시켜 “창조주인 신에 대해서 이원론적인 모독을 저지르는”(2) 마르키온적인(Marcionic) 영지주의의 덫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지젝은 구약의 신 또한 신약의 신과 같이 자신의 전능을 드러내는 대타자로서의 신이 아니라 무능한 신으로 나타나 있으며 유대교는 이러한 신의 무능을 계속적으로 은폐하려 하였기에 기독교가 출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이야기한다.(3)

구약 성서라는 동일한 텍스트 안에서 신의 무능함을 은폐하는 유대교뿐만이 아니라 이와는 정반대로 그 무능함을 드러내는 기독교가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유대교에서 부인당한 유령적 서사” 안에 참된 구약의 신의 모습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이 유령적 서사를 살펴보기에 앞서 필자는 신명기의 텍스트가 유대인들에게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는 나그네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약속된 땅을 향해 나아가는 최종적인 준비를 하는 상황에서 신명기를 통해 모세의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사회적 좌표에 고정된 상징계 안의 존재로서의 삶이 아니라 실재를 대면하며 끊임 없이 방황하는 나그네의 정체성을 새로운 땅에서도 계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나안 정복 이후 유대인들은 점차적으로 그들의 유목민 전통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솔로몬에 이르러서는 성막이 아닌 성전을 중심으로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해감으로서 가나안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과 같이 그들만의 외설적인 환상에 갇히는 존재로 전락해 버리게 된다.

▲ 라캉, 헤겔, 마르크스를 연결해 새로운 철학적 담론을 주도하고 있는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이 지젝 ⓒGetty Image

이러한 맥락에서 앞에서 언급한 유령적 서사인 구약의 지혜 문학에 나타난 신정론의 위기를 해석하는 지젝의 관점은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는 욥기에 나타난 신의 무능함을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예표로 해석함으로서 유대인들에 의해 대타자의 모습으로 왜곡되었던 구약의 실재로서의 신이 결과적으로는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무능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밝히고 있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신을 상징계 안에서의 최고 권력자(alpha male)인 대타자로 이해하고 있었기에 토라의 상징들이 메꾸지 못하는 상징계의 구멍을 통해 실재가 드러나자 전능한(absolute) 신과 무능한(dissolute) 신이 공존하는 모순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구약의 신을 대타자로 오해하며 그에 대한 무언의 불평을 하고 있는 욥의 모습을 통해 은연중에 드러나는 메시지는 유대인들이 만들어 놓은 대타자로서의 신의 죽음에 대한 요청이다. 세속적인 대타자에 의해 신의 이미지가 이미 심각하게 왜곡되었기 때문에 구약의 신은 자신의 실재를 급진적으로 드러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 대타자와 동일시되고 있는 자신의 이미지를 스스로 파괴해야만 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실재로서의 신을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않기 위해 중간에 환상이라는 스크린을 놓았다. 그렇기에 그들이 대타자의 너머에 있는 참된 구약의 신의 모습을 바라보려고 했을 때 실재로서의 신의 이미지는 상징계 안에서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되는 것으로 규정되는 어떤 흉측한 모습(사랑 없는 폭력을 행사하는 야훼의 모습)으로 이 스크린을 통과하게 된다. 지젝은 이러한 이미지의 변형이 관점의 시차적 전환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여기서 신을 대타자의 이미지로 바라보는 유대교의 입장과 끊임없이 실재로서의 자신을 드러내는 신의 입장이 서로 긴장 관계에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즉, 실재로서의 신이 자신을 어떠한 방법으로 드러내든지 간에 유대교는 신을 대타자의 이미지를 통해서 바라보고 있기에 신의 자기 계시는 그들에게 일종의 억압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가부장적인 세속 담론 안에서 사랑 없이 막연한 억압을 행사하는 무능한 신의 실재를 은폐하려는 유대교의 기획은 근본적으로 신에 대한 왜곡된 이해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결국 구약의 신은 이들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실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방법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복음서(기독론) – 실재로서의 신의 자기 계시

주체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분열된 자신을 인식할 수 밖에 없다(파편화된 신체[7])는 실존적인 상황으로 인해 항상 대타자에 의해서 사로잡힌 삶을 살아가는 운명에 놓여있다. 하지만 구약성서의 텍스트가 형성하는 내러티브는 상징계 안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방황하는 아브라함의 후손들’과 세속 문화와 결탁하여 ‘대타자의 욕망을 추구하는 이방인들’의 대립을 분명하게 드러내면서 신앙 공동체에게 이 ‘분열된 주체’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한다.

신은 유대인들이 스스로 이러한 방황을 지속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여 특정한 삶의 양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주체를 고정시킨다는 점에서는 세속 담론과 동일하지만 주체가 실재를 대면하도록 이끈다는 점에서 그것과 명확히 구별되는 특수 계시로서의 율법을 그들에게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를 붙드는 기능을 수행하는 구조적인 유사성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신의 법인 율법을 세속적인 대타자의 법과 동일시해 버리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신의 말씀에 대한 이 교묘한 뒤틀림을 다시 바로 잡기 위해서 신은 자기 자신을 육신으로 계시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기독교가 신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계시의 종교라는 지젝의 주장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세속적인 대타자의 관점에서 실재로서의 신의 자기 계시는 우리의 가부장적인 상징 시스템 안에서 허락되지 않는 어떤 꺼림칙한 것, 즉 철저한 무능이라는 이미지의 스크린에 투사되어 우리들의 눈에 들어온다.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은 실재와의 대면을 요구하는 구약에서의 신의 말씀(상징계)이 신약에서는 한 인물의 육신(실재)이 되었다는 점에서 실재로서의 신이 상징계의 균열을 뚫고 자기 자신을 현실(Reality) 가운데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이러한 신의 자기 계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가장 적나라한 방법으로 나타났으며 바로 이 십자가 위에서 자기 계시를 통한 신의 목적은 이루어진다(요19:30, “다 이루었다 하시고”). 십자가에서 신의 목적이 완성되었다는 요한복음의 증언은 신의 가장 무능한 모습이 드러난 바로 이 십자가의 자리에 기독교 신학의 핵심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지젝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신의 이러한 전략이 ‘기독교적 동일시’(요14:20, 갈2:20)를 가능하게 하게 하는 필요조건이 된다고 설명한다.

지젝의 주장은 결핍의 차원을 지닌 욕망의 구조에 주체가 스스로를 동일시 할 수 있듯이 인간은 신의 처절한 결핍이 드러나는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신과의 연합인 기독교적인 동일시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신이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무능한 상태로 계시해야만 했던 이유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렇게 자신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신의 계시가 세속적 대타자와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기독교만이 지닌 매우 독특한 특징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신은 스스로 자신의 무능을 드러냄으로써 그 무능 안에서 우리가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다른 말로 하자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실재에 대면함을 통해 대타자의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렇기에 그리스도는 실재로서의 신인 동시에 우리가 실재로서의 신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하는 그 자체의 방편인 중보자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키르케고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지젝의 말은 옳다. “우리는 믿음 자체를 믿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위해 믿는 것이라는 키르케고르는 주장은 적절한 것이다.”(11)

하지만 대타자라는 기표의 연쇄에 휩쓸리지 않는 자유를 통해 얻는 만족은 언어 밖의 영역에 위치해 있기에 그 자체로는 어떠한 삶의 의미도 생성해내지 못한다. 영지주의가 기독교의 가장 위협적인 이단으로 나타났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 자체를 그 목적으로 하고 있기에 영지주의는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기독교는 에클레시아(Ecclesia)라고 불리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공유하는 공동체 안에서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살아가야 함을 강조한다. 그런데 대타자로부터 해방된 주체들이 어떻게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낼 수 있었을까? 라캉의 관점에서 문화란 ‘말하는 존재’(speaking being)에 고정된 ‘사회적 연결’(social link)로 기능하는 ‘담론’(discourse)이기에 어떤 상징 시스템을 전제하지 않고는 작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대타자로부터의 해방 또한 필연적으로 새로운 상징계의 도래를 수반하고 있음을 전제해야하는 것이다.

김태호(감리교신학대학)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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