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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독립을 도왔던 캐나다 사람들3.1운동 100주년 기념전시회 “한국의 독립운동과 캐나다인”
이정훈 | 승인 2019.02.23 23:36

지난 해 모 방송사에서 방영된 드라마에서 재현되어 유명세를 타기도 했던 사진이다. 국사 교과서에도 내부적 모순과 약해진 국력과 제국주의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어나 활동했던 의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으레 등장하는 사진이기도 하다.

▲ 프레드릭 맥켄지라는 캐나다 출신의 영국 기자가 1907년 양평에서 직접 의병을 만나 촬영한 사진 ⓒGetty Image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색다른 전시회

하지만 정작 이 사진을 촬영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기자 머리속에는 기억이 없다. 참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솔직한 고백이다.

그런데 오늘 이 사진을 촬영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이 사진의 촬영자는 영국 런던 Daily Mail의 종군기자로 두 차례 한국을 방문했던, 프레드릭 맥켄지(Frederick A. Mckenzie, 1869-1931)였다. 맥켄지 기자는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일어난 의병을 취재하기 위해 이천, 충주, 제천을 방문해 일제의 학살과 방화를 목격했고, 양평에서 의병을 직접 만나 그들의 사진과 기록을 남겼던 것이다.

▲ 맥켄지 기자가 촬영한 의병 사진이 그림으로 묘사되어 전시되고 있었다. ⓒ이정훈

이후 맥켄지 기자는 The Tragedy of Korea(1908), Korea’s Fight for Freedom(1920)을 발간해 일제의 침략성과 한국의 독립운동을 알리는데 공헌하기도 했다. 또한 1920년 10월 영국에서 한국친우회를 조직해 한국의 독립운동을 후원했다고 한다.

전시장을 둘러보던 중 맥켄지가 촬영한 의병 사진 앞에서 고애린 선교사는 기자에게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사진 촬영을 하고 있는데 의병들은 왜 총을 겨누고 있을까요?”

농담처럼 건넨 말이었지만 어쩌면 이방인들을 대하는 조선 사람들의 심리가 반영된 아픔이 묻어 있는 사진인지도 모른다. 조선을 침범했던 이방인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 사람들 편에서 조선의 독립을 도왔던 이들이기도 했다.

뜻하지 않게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캐나다연합교회 파송 선교동역자로 한국기독교장로회 해외선교부에서 2010년부터 2017년까지 8년여를 활동하고 고국 캐나다로 돌아가 은퇴한 고애린(Catherine Christie) 선교사의 초청 덕분이었다. 작년에 이어 다시 한번 한국을 찾으며 기자를 초청한 것이다.

처음 고애린 선교사가 약속 장소를 시청으로 정한 이유를 잘 몰라 어리둥절 했었다. 하지만 전시회장을 둘러보면서 만남 장소를 이곳으로 정한 이유를 전시회장에 들어서자마자 깨닫게 되었다.

조선말 조선에 들어와 있던 캐나다 사람들 중 조선의 독립을 도왔던 인연과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였다. 서울시청 지하 1층 ‘시티 갤러리’에서  2019년 2월23일부터 3월31일까지 이어질 “한국의 독립운동과 캐나다인” 전시회이다.

▲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서울시청 지하 1층 ‘시티 갤러리’에서 2019년 2월23일부터 3월31일까지 “한국의 독립운동과 캐나다인” 전시회가 이어진다. ⓒ이정훈

또한 전시회장에서 만났을 때 고애린 선교사의 표정은 기쁨과 감격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 표정이 의미하는 이유를 처음에는 몰랐지만, 맥켄지 기자를 제외하고 이 전시장을 채운 캐나다 사람들은 모두 캐나다 선교사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그 표정의 의미도 알게 되었다.

로버트 그리어슨(Robert G. Grierson, 1868-1965), 아치발드 바커(Archibald H. Barker, ?-1927), 스탠리 마틴(Stanley H. Martin, 1890-1941),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1889-1970).

고애린 선교사는 대화 중에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캐나다 선교사들은 대부분 평신도이면서 의사인 선교사가 많았습니다. 지금 말로 하면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선교사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서도 의사가 많았습니다.”

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세브란스 병원을 설립한 올리버 에비슨(Oliver R. Avison) 박사도 캐나다 선교사였다.

이들 모두가 선교를 위해 조선에 입국해 의료와 학교를 설립하며 조선의 독립을 응원하고 지원했던 캐나다 사람이었다. 나라를 잃은 조선 사람들을 위해 수고한 벽안의 외국인들이 많지만 이렇게 캐나다라는 국가로 묶어 전시회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자그마한 규모의 전시회장을 둘러보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전시회장에 소개되어 있는 캐나다 선교사들이 조선의 독립과 이런 인연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기만 했다.

스코필드, 3.1절의 함성에 감격했던 선교사

특히 이번 전시회를 통해 중점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또 한명의 인물은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선교사였다. 스코필드 선교사는 1916년 캐나다 장로회 소속으로 조선에 들어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활동했다.

▲ 3.1절 만세운동을 카메라를 들고 바라보고 있는 스코필드 선교사를 묘사한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정훈

이 전시회를 기획하고 공동으로 주관하고 있는 “(사)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는 전시회 홍보물에 스코필드 선교사에 대해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념사업회는 스코필드 선교사가 이렇게 불리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스코필드 선교사는 “1919년 3.1독립운동 장면을 사진에 담아 이를 해외에 알려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렸으며, 화성 제암리와 수촌리 마을 학살현장을 직접 방문한 후 보고서를 작성해 일본의 비인도적인 행위를 해외에 폭로했다. … 소아마비를 앓았지만, 고학하며 세계적인 수의학자로 우뚝 선 스코필드는 한국의 가난한 학생들과 고아를 돌보는데 남은 일생을 바쳤다. 1968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수여받은 스코필드는 1970년 4월 12일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주로.”란 유언을 남기고 영면하여 국립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또한 전시장 한 켠 벽면에는 스코필드 선교사가 카메라를 들고 3.1운동 현장을 바라보는 모습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 아래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

“My, what a shout! On March 1, 1919, tens of thousands of Koreans shouted ‘Long live Korea.’ I will never forgot the day.”(아, 1919년 3월1일에 울리던 그 함성! 나는 그 날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이 문구를 보고 있으니 스코필드 선교사로 하여금 조선 사람들을 돕게 한 것은 조선 사람들의 나라를 되찾고자 했던 열망으로부터 터져나왔던 그 날의 함성이 아닐까 싶었다. 또한 조선 사람들의 독립 열망을 짓누르고 박해했던 일제의 학살 현장을 찾아다니도록 만들었지도 모른다. 그렇게 스코필드 선교사는 “민족대표 34인”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확인할 수 없는 추측들을 하게 만들었다.

계속되는 캐나다교회와의 인연

이렇게 조선말부터 인연을 맺은 캐나다 교회는 캐나다연합교회라는 이름으로 계속 그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고애린 선교사에 이어 기요한(John Egger) 선교사를 한국기독교장로회 해외선교부 선교동역자로 파송했다. 이날 전시회장에서 기요한 선교사도 캐나다 교회와 한국과의 인연을 살펴보고 있었다.

캐나다연합교회 파송으로 입국한 기요한 선교사는 캐나다 토론토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바울서신 중 갈라디아서를 전공해 신약박사학위를 받은 신학자이기도 한다. 하지만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 신학자이자 선교사이다.

▲ 캐나다연합교회 소속 선교동역자로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해외선교부로 파송되어 활동을 시작한 기요한 선교사(사진 왼쪽)와 8년여의 선교 활동을 마치고 고국 캐나다로 돌아가 은퇴한 고애린 선교사(사진 오른쪽) ⓒ이정훈

기요한 선교사의 이름을 어떻게 짓게 되었냐는 질문에 조금은 엉뚱한 대답이 나와 웃게 되었다.

“한국기독교장로회의 ‘기’를 성(last name)으로 썼습니다. 그리고 제 이름이기도 한 존(John)이 한국에서는 ‘요한’으로 불린다는 것을 알고 이름(first name)을 요한으로 붙였습니다.”

캐나다의 교회들도 서구 여느 나라의 교회들처럼 약화일로에 있다. 그럼에도 선교사를 꾸준히 파송하는 것은 남다른 인연의 표현으로 읽히는 부분이다. 앞으로 이런 인연이 얼마나 더 지속될지는 모를 일이다.

20세기 초 캐나다 선교사들이 멀고 먼 동양 땅으로 건너와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도왔던 것처럼 한국교회도 목회자 위주의 선교사가 아니라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고 선교지의 어려운 사정과 형편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한다. 이러한 이야기도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말이다.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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