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Junger Prediger
착각하기 쉬운 것들에 대하여무엇을 보는가?(마 6:22-23)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19.02.24 19:13

지난주에 오늘은 말씀드렸다시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라는 마태복음 6장 21절 말씀부터 34절까지의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우선 지난주에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하셨던 말씀 속에서 하늘에 보물을 쌓는 방법을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를 함께 생각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제’를 통해서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 재물을 쌓는 삶의 방식은 잘못된 방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누가복음 12장 13-21절에 나타난 부자의 비유가 가장 적절한 설명이 되리라고 봅니다.

누가복음에만 나타나 있는 비유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실제 하신 말씀인지, 누가복음의 공동체가 쉬운 설명을 위해 첨가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자신의 재산을 끊임없이 불려나가며 창고를 넓히던 부자를 하나님께서 어리석다 말씀하시며 그의 영혼을 데려가 버리신다면 그가 지금껏 모은 재산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는 이 비유의 말씀은 이 땅에 쌓은 재물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보았던 마태복음 6장 19-20절의 말씀과 21절의 말씀은 한 단락 안에서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제가 지난주와 이번 주로 나눠서 말씀드리는 이유는 두 이야기의 맥락이 약간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는 말씀은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는 말씀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말씀이라고 봅니다. 그렇기에 그 이후의 말씀들과 연결시켜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눈이 등불이다

오늘 읽은 말씀은 일반적인 격언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을 정도로 간단하고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약간은 생각해봐야 할 점들이 있습니다.

▲ 그리스도인들은 흔히들 재물이 있어야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생각들에 대하여 단호히 거부하십니다. ⓒGetty Image

마태복음의 경우에 6장 19절 이하의 단락에 포함되어 재물과 관련된 이야기로 오늘의 본문이 다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의 경우에는 11장 34-36절에 이 본문이 나타나고 있는데, 마태복음 5장 15절에 나오는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5:15)”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눅11:33)”

이 말씀과 연결시켜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두 이야기는 ‘등불’이라는 주제로 묶일 수 있지만 별개의 이야기입니다. 앞의 본문에 나타난 ‘등불’은 ‘다른 사람에게 비춰지는 빛’입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에 나타난 ‘등불’은 ‘나 자신을 비추는 빛’입니다. 물론 본질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같은 의미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표면적으로 서로 상이한 역할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한 번에 선포하신 말씀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다른 사람에게 비춰지는 빛’인 등불은 신앙인이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행해야 할 행동지침입니다. 반면에 ‘나 자신을 비추는 빛’은 우리 마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실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꼭 재물과 연결시켜서 하신 말씀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 격언에도 ‘눈은 마음의 창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그저 일반적인 격언조의 말씀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은 이 말씀을 21절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따라서 마태복음의 공동체는 예수님의 이 말씀,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말씀을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재물만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의 문제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을 통해서 우리 마음이 드러나게 되고, 우리의 삶이 변해간다는 간단한 해석 위에 ‘우리는 세상에서 재물을 모으려고만 노력하며 살아간다’는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엇이 예수님의 실제적인 말씀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일반적 격언을 하신 것인지, 마태복음 공동체의 해석처럼 재물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신 것인지 정확하게 “이거다” 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지금까지 저희가 읽어온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보자면, 예수님께서는 분명 이 말씀을 하시면서 재산을 모으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들을 생각하셨으리라고 봅니다.

이어지는 말씀들

그렇기에 오늘 본문 이후에는 24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는 말씀이 바로 이어서 나타나게 됩니다. 이 본문은 누가복음 16장에서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와 연결되어 나타나는데, 누가복음의 말씀에 대해서는 예전에 말씀드렸던 적도 있지만, 따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기 때문에 오늘은 자세한 이야기를 드리지 않겠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재산 축적이냐? 하나님이냐?’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이 선택지를 던진 후에 마태복음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본문을 연결시켜놓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누가복음에서는 하늘에 보물을 쌓는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25-34절의 말씀은 전에 저희가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25절의 번역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원문 말씀을 직역해보면,

‘너희의 생명, 영혼을 염려하지 마라 무엇을 먹을까, 또 너의 몸을 염려하지 마라 무엇을 입을까’

이렇게 됩니다. 이는 누가복음 12장 22절에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이 본문을 전해드리면서 우리 성경에 나오는 ‘목숨을 위하여’에 ‘위하여’란 단어는 원어에 없다고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제가 굳이 그 이야기를 드렸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야기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과 ‘몸’을 염려한다는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한다는 데에 중점을 두고 말씀하셨습니다.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31절의 본문도 ‘염려하여 이르기를’이라고 번역했기 때문에 마치 사람들이 목숨과 몸을 걱정하고 있는 것처럼 읽히지만, 새번역과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같은 말 아닌가?” 싶지만 다릅니다. 걱정의 대상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의 방식으로 읽으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목숨’과 ‘몸’에 대한 걱정, 여기서 더 나아가서 ‘음식’과 ‘옷’에 대한 걱정 일체를 하지 말라는 의미로 읽히게 됩니다.

하지만 원문의 맥락에서 이해하자면, ‘목숨’과 ‘몸’에 대한 걱정은 해도 됩니다. 다만 ‘음식’과 ‘옷’에 대한 걱정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 됩니다. 또한 ‘음식’과 ‘옷’에 대한 염려의 ‘말’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 됩니다. 바꿔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얻게 되는 재물에 대한 걱정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 됩니다.

마태복음 6장 19-34절은 분명하게 재물에 관련된 예수님의 말씀 모음입니다. 어떻게 보자면, 예수님께서 하셨던 각각의 말씀들이 본래는 재물과 관련된 게 아닌데, 마태복음 공동체가 그렇게 이해하면서 모아놓은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본문 자체는 누가복음과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직접적으로 재물(맘모나스 μαμωνᾶς)과 관련된 단어들을 언급하신 말씀들의 모음인데다가, 이런 모음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예수님께서 재물과 관련된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는 반증이 되기 때문에 이를 의심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마태복음의 이런 모음 작업은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구제와 재산 축적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지난주의 이야기와 오늘의 말씀을 연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주에 저희는 ‘구제’라는 단어를 ‘도움’이라는 단어로 바꿔서 예수님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본래 단어인 ‘구제’는 분명 재산이 없으면 어려운 일입니다. 재산이 있어야 구제가 가능한 순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반대로 ‘재산’을 쌓으려고 노력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은 가난하게 살아가면서 남을 돕는 삶을 살라는 말씀이었을까요?

그건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 누가복음 공동체가 극단적인 구제 방침, 자신의 재산을 교회에 전부 바치고 자신들은 공동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방침을 내세웠고 또한 그것을 행하는 공동체가 되었을까를 생각해본다면, 그 행위의 근저에 분명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있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산을 교회에 모두 바치려면 우선 재산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재산 자체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일하고 돈을 버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열심히 버는 행위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재물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 자신을 위한’ 재물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예수님께서는 꾸짖고 계십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자신을 위한 재물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눔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나눔 자체가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닌데다가, 남을 위한 일을 하게 되면 자신의 재산에 손해가 가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위한 재물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남에게 손해를 끼친다거나 남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모든 행위는 자신의 재물을 축적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 지금 시대의 말로 바꾸자면 자본주의 경제의 지극히 당연한 경쟁 행위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서 폭력을 행함으로 자신의 재산을 축적했다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지 않게 됩니다.

재산만을 바라보는 세상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어떤가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제가 경제학에 대해서 전혀 모르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있는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가끔 지금 사람들의 모습이 이해가 안갈 때가 있습니다.

최근 부동산 문제에 대해서 종종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대부분의 집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집값이 오르길 원합니다. 그런데 집값이라는게 내 집값만 오르는건 아닙니다. 집값이 오른다는건 본래 땅값이 오르는 거고, 땅값이 오르면 자연스레 건물 임대료도 올라갑니다.

최저임금이 올라서 자영업자들 다 죽는다는 이야기를 합니다만, 예전에 신촌에서 대학생활하면서 신촌에 있는 가게들을 보면, 1년도 안 되어서 바뀌는 가게가 엄청 많았습니다. 왜 이렇게 가게들이 빨리 망하는지 주변 가게 사장님들께 여쭤보면 한결같이 하시는 이야기가 임대료였습니다. 거의 20년 전인데도 자영업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임대료였습니다. 지금은 더 올랐겠죠. 땅값이 계속 올라가고 있으니까요.

제가 이해가 안 되는 건, 지금도 자영업 하시는 분들은 다들 죽겠다고 이야기하시지만, 막상 땅값 오르는 건 본인들도 원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자기 건물에서 장사하시는 분들이야 당연한 얘기겠지만, 집 한 채 가지고 있으면서 가게는 임대해서 장사하시는 분들도 집값이 오르기를 바란다는 점이 솔직히 이해는 안됩니다. 집값 오르면 임대료도 오르는 거 아닙니까?

차라리 본인이 그냥 평생 살 집이라면, 전국적으로 집값 안올라서 보유세도 적게 내고, 임대료도 안올라서 가게 지출을 줄이는 게 장사 수입에는 더 도움이 되는거 아닙니까? 전 단순하게 이게 맞다고 생각합니다만, 워낙 아는게 없어서 이렇게 생각하는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요즘에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르신들 중에 돈 받고 집회에 참석하시는 분들이 있다는 언론 보도들이 예전에 있었습니다. 솔직히 이 분들이 조금의 돈을 위해서 집회에 참여하시는 것 자체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자신의 생각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집회에, 옳지 않은 이야기를 주장하는 집회에 단지 돈을 준다고 해서 참여하는게 옳은가의 문제는 다르다고 봅니다.

지금 사회가 왜 어려운 상태를 극복하지 못하는가? 저는 ‘자신만의 재산을 늘려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이 재산, 돈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 사회, 경제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잘 사는 사회’라는 슬로건은 누구나 다 고개 끄덕이며 근사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바라는건 ‘내가 잘 사는 사회’이기 때문에 아무리 발버둥쳐도 지금의 경제 상황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보물을 쌓는 방법, 구제의 첫걸음은 내 눈을 돌려 다른 사람들을 보는데서 출발합니다. 우리의 눈을 돌리는 일이 예수님께서 6장 33절에서 말씀하셨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우리의 눈이 내 자신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향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 안에는 분명 내 옆에 있는 사람과 함께 잘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이 마음이 우리 안에 생겨난 순간 하늘나라에 우리의 보물이 쌓여가기 시작합니다.

눈을 돌리시고, 보물을 쌓으시기 바랍니다. 조금 전에 우리 사회의 경제 상황은 해소될 수 없다고 말씀드렸지만, 지금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첫걸음은 그리스도인들이 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 내 재산 축적만 바라보지 않고 함께 잘 사는 사회를 꾸려가고자 노력하기 시작했을 때, 이 땅에 하나님 나라는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어쩌면 세상 속에서 우리는 미련하다고, 손해 보는 사람들이란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릅니다. 남들과 함께 걸어간다는 삶의 방식은 어리석어 보이고 자본주의 사회에 어울리지 않아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살아가고자 다짐하는 여러분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창고에 쌓아놓아야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라, 날마다 기쁘게 먹을 수 있는 양식으로, 솔로몬의 영화보다 더 아름다운 의복으로 채워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복을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9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