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말씀과 성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그의 부활을 기념하는 공동체였다(고전11:24-26). 그런데 이 공동체가 유대교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와 뚜렷이 구별되는 정체성을 지닌 새로운 종교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초대교회, 실재를 대면하는 바람의 공동체

지젝에게 있어서 사도 바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확인한 이후 기독교 공동체라는 새로운 조직을 형성하는 과업을 떠맡는 인물이다.(1) 하지만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 공동체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서신서를 통해서 나타난 바울은 정작 예수의 삶 자체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젝은 제도 기독교의 창시자인 바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예수의 삶을 구체적으로 조명하지 않는 바울의 태도는 지젝에게 있어서 일종의 배신 행위로 간주된다. 하지만 이를 통해 제자들의 그룹에 속하지 못한 외부인이었던 바울은 상징적인 의미에서 기존의 제자들 중 배신자 유다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3)

예수를 배신함으로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는 이러한 역설이 성립될 수 있는 이유는 바울이 기존의 담론으로부터 투영되는 예수의 삶에 대한 기표들의 연쇄가 아니라 다메섹 도상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되는 실재와의 대면(행9:3-18)을 통해 예수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박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믿었던 자신의 상징계가 깨지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기에 새롭게 도래한 상징 질서인 성령에 붙들리는 삶을 살 수 있었다. 바로 여기서 지젝은 성령에 대한 라캉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집고 넘어간다.

라캉이 이야기 하는 성령

외부인이었던 바울이 기존에 있던 예수의 제자 유다의 자리를 상징적으로 대체 했듯이 ‘새로운 기표인 성령’은 언어라는 상징 시스템 안에서 세속의 질서를 통해 유대인들의 삶을 이끌어갔던 대타자의 자리를 대체한다. 이렇게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성령은 욕망의 원인인 대상a 대신에 삶의 새로운 동인으로 작동하며 주체를 성화(sanctification)의 삶으로 이끈다.

그러나 새로운 삶의 동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성령은 결국 또 다른 의미에서의 대타자를 불러오지 않은가? 삶을 형성하는 것은 의미이며 이 의미는 언어라는 상징 시스템 안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기에 욕망이라는 의미를 제공하는 대타자 없이 삶을 지속하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으로 보인다.

지젝이 본 초대교회의 특성

하지만 역설적으로 지젝의 논지는 바로 이러한 모순을 통해 드러나는 상징계의 균열 안에 위치한다. 상징계가 작동하지 않는 그 메워지지 않는 틈새만이 우리가 실재로서의 신에 대한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기 때문이다. 지젝은 기독교의 이러한 역설적인 본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며 자신의 저서 『죽은 신을 위하여』(2007)의 요점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필자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게 삶의 새로운 동인으로 작동하였던 성령이 “대타자의 지원을 박탈당한 공동체”라는 점에서 라캉이 비전체의 영역을 통해 규명하고자 했던 “기표의 결핍에 대한 기표”(the signifier of the lack of a signifier)(미주 6)인 빗금친 여성(Woman)과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그 새로운 동인이란 언어라는 환상 안에서 왜곡된 만족을 주입하는 남근적 주이상스(Phallic jouissance)를 초월하는 만족인 몸의 주이상스(Jouissance of the body)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 초대교회에 임한 성령 하나님 ⓒGetty Image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신의 애무에 의한 만족”(미주 7)을 획득하기 위해 환상 안에서의 만족을 추구하도록 유혹하는 “남근적인 욕망을 횡단”(주판치치)하는 것이 바로 성령이라는 기표가 새로운 삶의 동인으로서 작동하게 되는 메커니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 내러티브를 통해 나타난 기독교 공동체의 정체성은 성령이라는 기표를 통해 새롭게 도래한 상징계 안에서의 삶을 유지하는 것에 있다. 중요한 것은 성령에 의해 작동하는 이 상징계는 세속적인 대타자를 위해 봉사하는 담론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대타자들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실재로서의 신을 대면하게 하는 매우 혁명적인 담론이라는 사실이다.

즉, 세속의 담론인 ‘문화’(cul-ture)가 말하는 세계가 아니라 기독교의 담론인 ‘성서’(scrip-ture)가 말하는 세계 안에서 살아가게 될 때 우리는 대타자의 환상 안에서 작동하는 ‘리비도의 질서’에서 벗어나 ‘신의 질서’ 라는 하나님의 나라(Βασιλεία του Θεου) 안에 거할 수 있게 된다. 지젝은 이러한 기독교의 탈-대타자적인 특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성령의 공동체를 형성한 ‘새로운 상징계’(scrip-ture)는 결국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을 계기로 하여 세속적인 대타자와 결탁하였고 이에 다시 ‘제도적 조직’(cul-ture)이라는 환상 안으로 녹아 들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지젝은 우리가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기독교라는 형식적인 제도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이 그리스도라는 상징적 신체의 죽음에서 완성되었다(요19:30)는 사실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령의 공동체를 묘사하는 로마서 6장 11절의 텍스트를 지젝의 관점을 통해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빛을 던져준다.

성령의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함으로서 기독교는 그 구성원들이 대타자의 억압에서 벗어나 실재를 대면할 수 있게 한다. 그렇기에 초대교회는 가부장적인 담론의 관점에서는 꺼림칙하게 보이는 사회적인 약자들에 대한 거짓된 환상을 걷어버리고 그 동안 숨겨져 있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그들의 실재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바울 서신의 이러한 탈-대타자적인 측면은 야고보서에서도 나타나 신약의 서신서들이 공유하는 공통적인 기반을 우리들에게 제공한다.

필자는 여기서 세속이라는 제도에 물들지 않음으로써, 즉 제도적 껍데기를 버림으로써 실재를 대면하는 새로운 삶으로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 서신서 가운데 공통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에토스임을 발견한다. 이 시대에 우리가 회복해야 할 기독교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대타자의 종이 되는 것에 저항하는 혁명적인 기독교의 본질을 되살리기 위해 우리들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은 성령 안에서 도래한 이 새로운 상징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새로운 상징계는 기존의 상징계와는 달리 기표가 세계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기에 우리가 환상이 아닌 실재를 대면하며 살 수 있도록 하는 동인이 된다. 말씀이 육신 되신 그리스도와 같이 세상에 들어온 기표인 성령은 우리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부활에서도 그와 연합하여 거듭난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확증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들은 더 이상 실재를 피해 달아나며 대타자의 욕망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이제는 실재와 대면하며 세상의 거짓된 환상들을 걷어내는 죄에 대해 승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에클레시아는 실재와 대면하는 바람과 같은 공동체이다. 대타자의 욕망을 따르지 않기에 주체는 특정한 사회적 좌표에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방황하게 되지만 이 방황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를 바람과 같이 어디로든지 흘러갈 수 있게 하는 진정한 자유를 의미한다.

욕망이라는 기표의 연쇄가 아니라 성령이라는 바람에 자신을 맡길 수 있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구원의 길(Ordo Salutis)에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그렇기에 에베소서의 말씀이 증언하고 있듯이 구원은 은혜에 의하여(by grace) 믿음을 통해(through faith)받는 하나님의 선물(엡2:8)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라캉을 통해 다시 드러난 삼위일체론의 가치

지금까지 우리는 환상으로서의 ‘전체’(whole)와 실재로서의 ‘비전체’(not-whole)로 나뉘어지는 라캉의 준거틀을 통해서 구약, 복음서, 서신서라는 기독교 내러티브 안에 놓여진 실재가 지젝의 빛의 도움을 받아 드러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기독교 신학이 영지주의적인 세속 담론에 물들지 않고 실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성서적인 담론에 기초하여 세워질 수 있다면 우리는 현실(reality)을 통해서도 실재(the Real)를 대면하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무신론자인 지젝과 급진정통주의 신학자 밀뱅크가 『예수는 괴물이다(The Monstrosity of Christ)』(2009)라는 책에서 대화가 통할 수 있었던 것은 성서 전반을 걸쳐 흐르고 있는 ‘종교 철학’(Religious Philosophy)이 라캉의 분석 담론과 구조적으로 공통의 기반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필자가 경계선 상의 신학자인 폴 틸리히의 신론을 통해서 기독교 신학과 라캉의 이론 사이의 접점을 찾고자 했었던 것도 내용이 아닌 구조의 차원에서 서로 다른 담론들 사이의 유사성을 찾기 위해서였다.

특별히 기독교 내러티브 안에서 나타나는 성부(구약), 성자(복음서), 성령(서신서)의 삼위일체적인 구조가 각각 라캉의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에 대응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 거듭나지 못한 유대인들의 하나님인 대타자로서의 성부는 상징계(요3:3)를, 성자를 통해 계시된 신의 무능함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거울단계에서 이상적 자아(ideal ego)를 생성하는 상상계(요3:5)를, 그리고 세계에 들어온 기표인 성령은 거듭난 주체를 방황하도록 이끈다는 점에서 실재계(요3:8)를 드러내고 있다.

바로 여기서 필자는 삼위일체(Trinity)의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하고자 했던 고대 기독교 공동체가 영지주의의 이원론을 극복하고 주인 담론인 정통신학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서로 연결된 삼항(상상계-상징계-실재계)을 사용하는 포스트모던적인 라캉이 서로 독립된 이항(정신/물질)을 사용하는 모던적인 데카르트보다 인간의 실존을 더 설득력이 있게 설명한다는 사실은 결국 이원론에 대한 삼위일체론의 승리를 다시 한번 확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실재계의 차원을 강조하며 라캉의 삼항을 동등하게 고려한 지젝은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하는 영지주의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단으로부터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 ‘삼위일체론을 정립하여 나갔던 반영지주의적 교부들’(9) 의 자리를 상징적으로 채우고 있다. 그렇기에 필자는 우리가 정신분석학의 해석학적인 공헌을 기독교에 적용하고자 한다면 인류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분석 담론적 텍스트인 성서를 종교 철학의 토대를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자료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환상에 기반을 두는 문화(cul-ture)가 아니라 실재에 기반을 두는 성서(scrip-ture)를 가지고 현실에 대한 분석을 시도할 때 비로소 우리는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시키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회의 필요를 위해 봉사하는 신학”(10)을 세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오직 성서’(Sola scriptura)라는 종교개혁의 슬로건이 13세기 종교지도자들의 물신주의를 뒷받침하는 종으로 변질되었던 중세 신학의 상징계를 무너뜨렸던 것처럼 지금 우리의 신학도 다시 성서로 돌아가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

이렇게 라캉과 지젝의 이론은 오늘날 사회 전반에 만연한 물신주의라는 대타자의 환상을 해체하고 다시 기독교의 본질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여는 빛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비록 그들은 종교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이 말하는 주장의 에토스는 기독교 전통의 에토스와 크게 공명하고 있기에 신학자들은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도움닫기의 차원에서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웨슬리가 강조한 성서, 전통, 이성, 경험 중 ‘이성’이라는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성적인 통찰이 사변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삼위일체론과 같은 기독교 ‘전통’의 빛과 사역의 현장에서 얻는 ‘경험’의 빛의 도움을 받아 궁극적으로는 ‘성서’ 텍스트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내놓기 위해 끊임없이 씨름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철학적인 종교’(Philosophical Religion)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교적인 철학’(Religious Philosophy)으로서의 신학을 세워나갈 수 있다. 세속 문화의 담론이 아니라 기독교 내러티브에서 추출된 공리들을 기반으로 하여 우리 삶의 전반적인 이론적 틀을 구축해나갈 때 우리는 지금 이 시대의 기독교가 잃어버린 기존의 부조리한 세상을 혁명할 수 있는 급진적인 영향력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김태호(감리교신학대학)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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