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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3: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지는!주현절 아홉째 주일(3월3일, 잠 3:1-12; 골 1:24-29; 마 16:21-28)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9.03.01 18:54

1. 주현절에서 사순절로

이제 주현절 아홉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주현절기 동안 예수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베푸셨던 사랑과 겸손, 나눔, 그리고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에 관해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말씀의 참된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절기는 다음 주 부터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사순절기로 이어집니다.

오늘 세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세 번째 말씀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죽음과 부활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성취입니다. 복음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심판으로 이어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제자들의 각오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예수님의 말씀으로 잘 보여주고 있으며, 서신서는 그러한 수난(受難, 버티기 힘든 어려운 일을 의미하나, 신학 용어로서 예수의 재판과 처형의 정신적 및 육체적인 고통을 의미)의 의미를 잘 깨달은 바울 사도의 각오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까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각오를 잠언의 말씀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2. 하나님 나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

신약 본문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 16:21)”, 곧 수난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길은 고난과 죽음을 당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인 부활과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 16:24-28)

이 땅에 임할 하나님 나라를 맞이할 때, 우리는 우리의 행한 대로 되갚음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오늘 신약의 본문 말씀 이전에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시몬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반석)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8-1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항변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마 16:22). 베드로는 죽어서 부활하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길을 막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바로 전까지 천국의 열쇠를 맡겼고, 교회를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탄’으로 언급합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 하는 도다 하시고.”(마 16:23)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롬 8:2)’이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자 하지만,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따라갑니다. 베드로는 이 두 법 모두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 나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죽어서 부활한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볼까요?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4-26)

장재현 감독의 영화 <사바하>(2019)가 있습니다. <검은 사제들>(2015), <곡성>(2016)의 흥행 계보를 잇는 미스터리 스릴러입니다. 신흥 종교 집단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이 탄탄하고, 기독교와 불교(대승불교 및 티벳불교)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있어야 재미도 있고, 읽어내기가 쉽습니다. 영화는 ‘사슴동산’이라는 신흥 종교 집단을 쫓던 극동종교문제연구소 소장 박웅재 목사(이정재 분)가 의문의 인물과 사건들을 마주하게 되면서 시작됩니다. (크리스마스에 대한 정치적 의미, 고난 받는 현실에 과연 신은 어디계신가에 대한 신정론, 숨어계시는 하나님, 뱀과 발꿈치 등 기독교적 주제와 선/악의 이원론을 넘어 선-악 연기설, 영생의 욕망, 부처와 사천왕, 미륵, ‘성불’을 육체의 한계를 이기는 불사로 보는 티벳 밀교 등 많은 종교적 주제들이 뒤섞여 있어서 흥미를 자아냅니다.)

영화 제목 ‘사바하’란 ‘원만한 성취’를 의미하는 불교 용어입니다. 기독교의 아멘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그 내용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16년 전인 1999년 강원도 영월에 쌍둥이 자매가 태어납니다. 동생 금화(이재인 분)와 언니 ‘그것’입니다. 동생의 발을 깨물었던 언니는 온 몸에 털로 가득한 괴물로, 의사 말대로 오래 살지 못할 것으로 생각해, 이름도 지어주지 않고, 주민번호도 없어 ‘그것’으로 불립니다. 이 괴물이 태어난 후, 아버지, 어머니가 죽습니다. 금화는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키워지고, ‘그것’은 창고에 갇혀 삽니다. 그리고 ‘그것’은 손가락이 여섯 개, 즉 육손이입니다.

6은 불교에서 ‘완결’을 뜻합니다. 선이거나 악이거나. 그리고 양손가락의 합은 12개입니다. 12는 ‘지상의 모든 것, 곧 창조된 세계를 의미’하는 4를 3번 반복한 것으로 기독교적인 의미로는 ‘완전성과 충만한 전체’를 나타냅니다.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는 3을 삼위일체의 수로, 영혼 또는 정신에 관련된 것으로 보았고, 4는 육체 또는 물질에 관련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의 수인 3 더하기 4가 7인데, 행운의 수, 럭키 7입니다. 여기서 1이 모자란 6은 불교와 달리 기독교에서는 불완전한 수, 부족한 수이고, 이것이 3번 연속으로 쓰이게 되면 666, 곧 짐승의 수, 사탄의 수가 됩니다.

아무튼 ‘그것’과 똑같은 여섯 손가락을 가진 사람이 100년 전인 1899년에도 태어났습니다. 동방교 교주인 김제석(유지태 분)입니다. 일제 시대에는 조선총독도 스승으로 삼을 정도로 득도한 사람, 곧 ‘신이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선하고 인자하며 복지사업도 하고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김제석이 1985년 티벳 승려 네충텐파의 예언을 듣고 눈빛이 변합니다. 승려의 예언은 김제석이 태어난 100년 후, 강원도 영월에서 김제석의 천적이 태어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에 김제석은 즉시 동방교를 해체하고, 경전 집필에 몰두합니다. 그리고 그 경전의 내용은 부처인 김제석을 지키는 4천왕이 그의 천적이 될, 뱀 곧 1999년 영월에서 태어난 아이들 81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영화는 그 과정을 보여줍니다. 한 선한 인간이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살인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 사천왕은 우리나라 사찰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의 천왕문에 이 4천왕상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동쪽을 수호하는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쪽을 방어하는 광목천왕(廣目天王), 남방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입니다.

▲ 영화 <사바하> 포스터 ⓒCJ엔터테인먼트

김제석은 득도한 사람입니다. 그는 수행을 통해 인간 한계의 마지막인 불사(不死), 곧 영원한 삶에 이릅니다. 티벳 불교인 밀교가 일본으로 건너가 변형되는데, 변형된 불교에 따르면 성불, 곧 부처가 되는 것은 육체의 한계를 이기는 것입니다. 마지막 육체의 한계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김제석은 성불이 되어 젊음을 간직한 채, 116년 넘게 살아온 것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삶을 누리기 위해 김제석은 천적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1999년에 태어난 ‘그것’을 죽이러 간 마지막 남은 4천왕 광목천왕 나한(박정민 분)은, 털을 벗어버리고 부처가 된 ‘그것’으로부터 김제석이야말로 뱀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한에게 김제석을 제거하라고 말합니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영원한 삶을 원하는 한 득도한 인간을 봅니다. 그는 선하고,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가 만든 종교 단체도 복지사업을 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선한 단체입니다. 그러나 득도한 김제석은 천적이 태어난다는 소리를 듣고, 변했습니다. 헤롯왕이 유대인의 왕인 예수께서 이 땅에 태어났을 때 그 시대 어린 아이들을 다 죽여 버린 것처럼, 인간의 욕망은 이렇습니다. 아무리 득도한 인간이라도 이러한 욕망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죽음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 앞에 베드로도 김제석도 항변하고 다른 이를 죽여서라도 자신이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부활하는 나라입니다. 영생을 누리고자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성불, 미륵, 득도한 신이 된 사람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는 말씀의 의미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가장 잘 이해한 이가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3. 하나님 나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향하여

바울은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서 3년 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전도했습니다.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지방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바울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에바브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울의 가르침을 받고 자기 고향인 골로새에 돌아가 골로새 교회를 세웁니다(골 1:7-8참조). 에베소는 당시 소아시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였고, 골로새는 쇠퇴하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이런 골로새에 세운 교회에 이단 사상이 침투하게 됩니다. 따라서 에바브라는 바울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바울은 62년경 로마 감옥에서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보냅니다. 이것이 골로새서입니다.

골로새 교회에 침투한 이단은 먼저 유대교를 따르는 자들로, 음식 규정과 안식일 준수, 할례 의식을 강조하고 중보자로서 천사 숭배를 행하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부류는 당시 헬라 철학 사상의 영향으로 지혜, 또는 지식을 강조하는 영지주의 이단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그리스도 예수님과 기독교의 위대성을 언급하며 오직 완전한 지혜와 지식은 유일하신 중보자 그리스도께만 있고, 주는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우주의 모든 세력을 이겨 자신에게 복종시켰다고 말합니다. 본문 말씀이 나오는 1장의 말씀은 만물의 으뜸이신 예수님을 소개하며(골 1:17-18 참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거하고, 그 터 위에 굳게 서라고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기독론(Christology)’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영지주의 이단들이 잘 사용하는 말은 ‘영적지식(γνῶσις)’, ‘충만(πλήρωμα)’, ‘지혜(σοφία)’, ‘비밀(μυστήριον)’ 같은 말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원초적인 영적 세계인 ‘충만(완성 혹은 가득 찬 것)’으로부터 자신들이 흘러 나왔고, 자기들만이 구원의 비밀을 간직한 영적인 지식을 소유하여 영적 세계인 ‘플레로마’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단들이 사용하는 그 말이 모두 예수님께 해당된다고 반박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6-27)

보이시나요? 바울이 비밀을 그리스도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있죠? 더 볼까요?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8-29)

지혜를 어떻게 말하고 있나요?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으로 말하고 있죠? 예수가 중심이 됩니다. 그러나 영지주의 이단들은 자신들의 영적 지식을 통해 스스로 신과 하나가 되어, 충만을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스스로 성불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성품이 충만하신 분이며, 이 예수님을 통해서만 ‘충만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합니다. 중요한 말씀이니, 오늘 본문에 없더라도 살펴볼까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9-20)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골 2:8-10)

따라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골 1:24-25)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수난과, 마침내 그것을 이기는 부활로 설명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이 교회의 일꾼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교회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4. 하나님 나라의 잠언

앞서 복음서의 말씀에서 베드로는 하나님 나라의 잠언을 깨닫지 못했으나, 사도 바울은 그것을 깨닫고 골로새 교회에 자신의 신앙, 곧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부활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말씀은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잠언을 우리들에게 들려줍니다. 물론 본문 말씀인 잠언 3장은 ‘지혜의 가치’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라, 그리하면”이라는 형식이 반복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에게 임할 축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장수, 평강, 영예, 부귀 등 복된 삶을 총망라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네가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잠 3:1-2) 말씀 순종의 복입니다.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3:3-4)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의 진리대로 살면 복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말씀이 이어집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이렇게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지혜의 말씀 이후에 세상에서의 삶에 관해 이야기 합니다.

먼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영적 지식을 자신들만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영지주의자들에게 주는 경고 같습니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잠 3:7-8) 그리고 ‘재물’에 관한 말씀입니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잠 3:9-10)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이 그저 고난과 죽음의 길이 아니라, 부활의 길이요. 생명의 길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기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과 진리 앞에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5. 단단하고 강한 자와 부드럽고 약한 자

베드로는 강했습니다. 동방교 교주인 김제석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불멸의 몸을 지니고 득도하여 성불하였으나, 그는 강했습니다. 부드럽지 못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죽어야 사는 참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강함과 부드러움에 관한 모습을 『도덕경』 76장 ‘강한 것을 경계한다’라는 「계강(戒强)」편이 잘 보여줍니다.

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强(인지생야유약, 기사야견강) “사람이 살아 있으면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고 나면 단단하고 강해집니다.”
萬物草木之生也柔脆, 其死也枯槁(만물초목지생야유취, 기사야고고) “만물과 초목도 살아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으면 말라 뻣뻣해집니다.”
故堅强者死之徒, 柔弱者生之徒(고견강자사지도, 유약자생지도) “그러므로 단단하고 강한 사람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사람은 생명의 무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영화 <사바하>에 나오는 것처럼 김제석은 자신의 영생을 위해 강해졌습니다. 그러나 강했기에 부러졌습니다. 마침내 비참한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인문학자 김경집도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시공사, 2013)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완고한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다. 완고한 사람은 자신의 편견과 우월감에 사로잡혀 오로지 자신만의 잣대로 세상을 재고 판단한다.” 그렇습니다. 자기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고통과 상처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불어 넣어주신 생명의 기운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이 강해지려고 하나요? 강한 사람은 편견과 우월감에 사로잡혀 세상을 자신이 보고자 하는 방식대로만 봅니다.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되었습니다. 강 대 강이 부딪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미에 부드러움을 남겨두어 희망의 불씨는 남겨두었다고 봅니다. 강함을 추구해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베드로에게 “사탄”이라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그것은 단순한 꾸짖음이 아니라, 사랑인 것을 오늘 잠언 말씀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 3:11-12)

오늘,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가시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의 징계를 받아들이시고, 죽는 길이 참으로 사는 길임을 깨닫고 날마다 자신을 십자가에 복종시키고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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