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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돛을 내리고 날개를 펴다”Vladimir Kush의 「날개 단 배의 출항」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19.03.01 19:16

봄을 환영해주는 꽃들은 정작 열매를 보지는 못한다. 한껏 피어나 온 세상을 들뜨게 하고는 떨어질 뿐이다. 꽃 진 자리마다 열매가 자라난다. 꽃은 아직 맺히지 않은 열매를 보여주는 계시이자, 보지 못한 여름과 가을을 믿게 하는 예언이다.

100년 전 식민지 지배 아래 독립을 선언한 이들 역시 꽃이 아닌가. 눈앞에는 제국의 억압만 가득한데, 온 존재로 독립을 선언했다. 그들 자신이 이미 자유로 피었다. 총칼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 잠시 피었다가 졌다. 그들 서로가 독립의 증거였을 뿐 독립을 보지는 못했다.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맺히듯 그들의 빈자리에 후일 독립의 열매가 맺혔다.

맨 몸으로 독립 만세를 외친다고 세상이 바뀔까? 무력하게 죽어갈 뿐 다 소용 없는 일이라는 냉소가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거센 바람을 역류해 나갔다. 권세와 폭력의 거친 바람을 의지하고픈 두려움으로 돛을 올리지 않았다. 돛은 바람에 맡기고 끌려갈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서는(獨立) 자유를 향해 날개를 폈다. 바람을 거슬러 날아오르는 날개를. 이제, 자유를 누리고 있는 우리에게는 그 날개가 있는가? 권세와 폭력의 바람에 맞서 거슬러 오르는 날개가.

러시아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초현실주의 화가 블라디미르 쿠쉬(Vladimir Kush, 1965~ )의 「날개 단 배의 출항」(Departure of the Winged Ship)은 돛 대신에 나비를 달았다. 열두 마리 나비의 날개를 의지해 떠나고 있다. 돛이 있어야할 자리에 나비가 가득하다.

그 의외성이 익숙함을 허물고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쿠쉬는 자신의 작품을 은유적 사실주의(metaphorical realism)라 이름 한다. 익숙한 것들을 은유로 비틀어, 실재를 새롭게 보는 눈을 열어준다. 바람을 타려는 돛을 걷어내고, 나비의 날갯짓을 따라 떠나는 항해는 어떤 세계를 향하는가?

▲ Vladimir Kush, 「날개 단 배의 출항」 ⓒ출처: http://vladimirkush.com

돛은 바람을 의지해 떠밀려가려는 의지다. 세상은 끊임없이 바람을 타라고 세뇌한다. 무엇을 해야 성공하고, 어떻게 해야 안락한지를 주입한다. ‘조금만 참아, 명문 대학에 가기만 하면 돼.’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도 그 다음은 취업, 그 다음은 결혼, 다음은 자식 교육, 성공적인 자영업…

타야할 바람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바람이 떠미는 대로 착실하게 따라간다고 약속한 성공과 안락이 보장되던가. 낚이고 또 낚이는 기분은 착각일까? 사실 이젠 낚일 것도 없다. 1등만이 살아남는 1:99의 피라미드 세상에서 더 이상 속을 게 없다. 게다가 너무 빠르게 돌변하는 바람을 읽어낼 수조차 없다. 어느 바람에 돛을 올려야할지 아무도 모른다.

쿠쉬는 전혀 다른 항해를 그린다. 세상의 바람을 의지하려는 욕망과 두려움의 돛을 걷어낸다. 그 자리에 나비의 날개를 달았다. 나비가 날개 치는 곳을 향해 나아가는 항해다. 나비는 수많은 신화, 시, 소설에서 영혼을, 마음을 상징한다. 나비의 날갯짓을 따르는 항해는 곧 영혼의 날갯짓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세상의 바람이 어디로 떠미는지는 상관이 없다. 어떤 바람이 어디로 부는지도 상관없다. 맞바람이 불어도 거슬러 가고, 무풍지대여도 나아간다. 나비를 믿고 나비가 안내하는 곳을 따라간다.

작품 앞에 서면 함민복 시인의 「나를 위로하며」가 떠오른다.

삐뚤삐뚤
날면서도
꽃송이를 찾아 앉는
나비를 보아라

마음아

나비는 여린 날갯짓으로 휘청인다. 바람에 날려갈 듯 삐뚤삐뚤 난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자신을 부르는 꽃을 찾아 앉고야 만다. 꽃에 앉으면 거센 바람이 불어와 꽃대가 흔들려도 떨어지지 않는다.

마음 역시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어디로 향해 나아가야 행복한지 아는 것만 같다. 허무와 공허는 마음의 신호다. ‘저것만 이루면 돼, 그것만 소유하면 돼’라고 믿었지만, 결국 성취하는 순간 허무가 밀려온다. 그것은 영혼의 목소리다.

‘여기가 아니야, 이것은 진짜 꽃이 아니야. 나를 믿고 다시 떠나자.’ 여기가 아니라는 직감은 어디로 가야할지를 암시해주는 신호다. 어거스틴이 고백하듯 영혼은 하나님 품에 안길 때까지 평안을 누릴 수 없지 않던가. 여운이 긴 위로로 들려온다. ‘삐뚤삐뚤 나아가도, 흔들리며 나아가도 마음의 길을 따라가면 결국 꽃송이에 닿을 거야.’

물론 반드시 꽃에 가 닿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삶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영혼의 목소리를 따라 날개를 편 삶은 오히려 더 힘겨운 과정을 겪기 쉽다. 그런 냉혹한 현실에 쿠쉬의 작품은 작은 틈을 낸다. 그 틈새로 다른 현실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 그려진 나비가 그 틈새다. 쿠쉬 스스로 이 나비들이 모나크왕나비라고 밝힌다. 모나크왕나비의 신비를 만날 때, 새로운 현실이 드러난다.

모나크왕나비는 불가사의한 생명이다. 모나크왕나비는 숲속 여기저기 꽃을 찾아다니는 나비가 아니다. 수천에서 수억 마리가 함께 멕시코에서 캐나다까지 4~5천km를 이동한다. 나비의 날갯짓으로는 그 먼 거리를 한 번에 갈 수가 없다. 캐나다까지 갈 때는 3~4세대에 걸쳐 대를 이어 이동한다. 한 세대가 죽고 다음 세대의 나비가 이어서 이동하는 식이다. 쿠쉬의 작품에도 돛대 위에 애벌레들이 함께 타고 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멕시코로 돌아올 때다. 그때는 한 세대가 한 번에 돌아온다. 돌아오는 세대는 이전 세대 수명의 열 배 가까이를 산다. 왜 이런 대이동을 하는지, 어떻게 세대에 걸쳐 길을 잃지 않는지, 멕시코로 돌아오는 세대는 왜 수명이 더 긴지 신비에 가려져 있다. 

▲ 『경이로운 자연의 세계: 나비의 왕 모나크왕나비』 ⓒEBS캡쳐 이미지

왜 모나크왕나비를 그렸을까? 영혼의 날갯짓을 따라 세상의 풍파를 거슬러 가는 여정, 그것이 그저 낭만적인 동화가 아님을 보여준다. 애벌레에서 번데기, 번데기를 찢어 날개를 펼치는 부활의 은유를 순례의 여정으로 펼쳐 보여준다. 죽음을 뚫고 다시 순례를 이어가는 신비를 보여준다.

마음속에서 울려오는 음률을 따라가는 삶은 소풍이 아니다. 영혼의 날개를 따라 살아가는 삶은 죽음을 겪는다. 죽음 같은 좌절과 고통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 날개를 펴고 나아간다. 자기 생에서 결국은 꽃에 가닿지 못해도 누군가 그 길을 이어 날아간다.

작품 오른쪽 하단, 어둡게 대비된 육지의 사람들이 있다. 육지에서 안전하게 머문다. 나비를 소유하려고 잠자리채만 휘두르고, 나비를 연구할 뿐이다. 그들을 등지고 날개를 단 배가 떠나고 있다. 육지를 떠날 수 있는 이유는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풍파를 거슬러 나아간 모든 삶은 영혼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것이다.

알아듣게만 되면 사람을 사람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모든 폭력과 억압의 풍파를 역류하고야 만다.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자유와 불가능해도 멈추지 않는 사랑은 영혼의 양 날개다. 실패가 불 보듯 뻔해도 멈출 수가 없다. 욕망과 두려움의 돛을 내리고 영혼의 날개를 편다. 때로 하나님께서 왜 버리시는지 알 수 없어도 십자가로 날아간다. 들을 귀 있는 자만이 알아듣는 부르심이 오늘도 날개를 펴게 한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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