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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족보를 쓸 것인가마태 족보의 비밀(마 1:1-17)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 승인 2019.03.02 18:10

복음서에는 예수 족보가 두 곳에 나온다.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이다. 이 두 복음서는 마가복음과 함께 같은 시각에서 기록되었다고 하여 ‘공관(共觀, Synoptic)복음서’라고 불리지만, 두 족보의 차이는 매우 크다. 마태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에로, 곧 과거에서 오늘로 내려오는 전통 방식을 따르지만, 누가는 반대로 오늘에서 과거에로 거슬러 올라가는 혁명적인 방식을 선택한다.

그리하여 예수로 시작하여 아브라함, 여기에서 그치질 않고, 노아, 무드셀라, 에녹, 아담, 심지어는 하나님까지 족보에 포함한다. 이런 차이를 신학적으로 마태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누가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서를 기록하였다는 차이로 설명한다. 곧 마태는 예수를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 이해하는데 반해 누가는 세계(‘로마제국’)인의 한사람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브라함과 예수 사이의 족보에 있어 여러 조상들의 이름이 다를 뿐만 아니라 대수조차 상당한 차이가 난다. 우리는 공관복음서라 하더라도 같은 사건에 대해 세 개의 복음서가 차이가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족보의 차이를 서로 다른 신학의 차이 곧 독특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인류 기원과 역사 그리고 인류학에서 말하는 인류 기원과 역사에 엄청난 괴리가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이 또한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서로를 보완하는 신학과 과학의 독특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신학은 왜(why)를 질문하지만, 과학은 어떻게(how)를 질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족보를 ‘사실로서의 역사’(Historie, 독)가 아닌 ‘해석된 역사’(Geschichte, 독)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마태가 족보를 쓴 첫 번째 이유는 예수가 정통 유대 가문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예수시대에 갈릴리 출신이라고 하는 것은 하류계층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장에서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오늘 나사렛 출신의 예수를 만났는데, 그분이 우리 조상들이 기다려온 분이시다. 같이 가보자.” 나다나엘이 반문하기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마태는 예수가 아브라함의 후손일 뿐만 아니라, 다윗의 후손임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는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그건 이 족보의 대수가 정확히 40대라는 것이다. 우리는 족보 마지막 절에 “그러므로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에서 바빌론으로 끌려갈 때까지가 십 사대이며 바빌론으로 끌려간 다음 그리스도까지가 또한 십 사대”라는 이 구절 때문에 쉽게 42대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다윗과 바빌론이 앞뒤로 두 번 반복되기에 42에서 2를 빼면 40이 되고 실제로 대수를 세어보아도 40대이다.

40과 광야

성서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출애굽을 한 히브리 노예들이 광야에 머문 기간이 40년이고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십계명을 받기 까지 기도한 날이 40일이다. 선지자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아합왕과 이세벨 왕비의 거짓 예언자들을 물리친 후, 이세벨의 칼날을 피해 호렙산에 이르기까지 광야를 걸어간 기간이 40일이다. 예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광야에 나아가 금식하며 기도한 날이 40일이다. 변화산상에 등장하는 세 명의 인물이 모두 광야 40일 기도와 직접 연계된다.

광야(廣野)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mdbr)이다. ‘미’(m)는 장소를 뜻하는 접두어이다. 히브리어 어근 dbr은 ‘말씀’ 혹은 ‘언약’을 뜻하는데, 특히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dbr)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단어이다. 곧 ‘dbr’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하늘의 말씀이다. 곧 우리말로 ‘광야(廣野) 혹은 빈들’로 번역된 히브리어 ‘므드바르’는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허허벌판이 아니라, 인간 역사에 변혁을 가져오는 하늘 말씀이 임하는 시공간(時空間)을 뜻한다. 모세, 엘리야, 예수는 모두 40일간의 광야 기도생활을 거쳐 새 역사의 주역으로 나섰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애굽 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난 히브리 노예들이 광야 40년을 머물었다는 말 또한 단순히 고통스러운 훈련 기간이 아니라 새 역사 창조를 위한 새 인간이 되는 은총의 기간으로 이해해야 한다. 노아 홍수가 40주야 계속 되었다는 말 또한 단순한 물의 심판을 넘어 노아 가족을 통한 새 역사 창조에 이야기의 방점이 있는 것이다. 마태는 예수의 족보를 40대로 정리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역사가 시작하고 있음을 묵시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미투(#MeToo)

그런데 마태의 족보에서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이 족보에 여성의 이름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도 그러했지만, 2천 년 전 유대 사회에서 여성은 온전한 사람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의 숫자를 셀 때에 여성은 빼고 세었고, 랍비들은 성전에서 하루 세 번 기도하면서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음을 감사했다.

그런데 이러한 남존여비의 사회에서 마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메시야로 칭송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여성의 이름을 넣었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닌 네 사람을 넣었다. 게다가 이들은 평범한 여성들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커다란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여인들이었다.

첫 번째 등장하는 여성은 다말이다. 다른 여성은 몰라도 다말만은 결코 예수의 족보에 그 이름이 나와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다말은 결혼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은 것이 아니라, 시아버지 유다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창세기 38장에 보면 유다에게는 엘, 오난, 셀라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유다가 이주를 하면서 가나안 여인 다말을 며느리로 맞아 큰 아들 엘과 결혼을 한다. 그러나 성서에는 그 이유가 나와 있지 않지만, 야웨의 분노를 산 나머지 자식이 없이 죽는다. 그러자 당시 풍습에 따라 둘째 아들 오난이 형수와 결혼을 하였는데, 그 또한 야훼의 분노를 사는 바람에 자식이 없이 죽는다. 그러자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마저 죽음을 맞이할까 두려워 셀라가 장성한 후에 주겠다는 말을 하고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보낸다.

그러나 시아버지 유다는 장성한 셀라를 다말에게 줄 의향이 없었다. 그러자 창녀로 분장을 하고 유다와 관계를 맺어 아들을 낳게 된 것이다. 배후 역사와 과정 이야기를 읽어보면 전연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불륜 관계이다. 설사 어찌어찌하여 일어났다하더라도 필사적으로 감추어야 할 사건이다. 그런데 마태는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서 자식을 얻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두 번째 여성은 라합이다. 라합은 본래 여리고성의 기생이었다.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을 보호하여준 대가로 그의 일가족이 죽음을 면했을 뿐더러 예수 족보에 그 이름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의 여인은 룻입니다. 룻은 모압 여인으로 유대 땅에 기근이 들어 모압 땅으로 피난을 온 한 유대인 가족의 며느리로 들어간다. 그런데 남편이 죽자 고향으로 돌아가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까지 와서 보아스를 만나 다윗왕의 아버지가 되는 이새를 낳는 축복을 받는다. 그런데 룻기를 읽어보면 보아스와 정식 결혼을 하고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라, 추수 때에 (술에 취한) 보아스가 혼자 자고 있을 때에 살며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후에 정식으로 결혼을 하긴 하였지만, 19금(禁)에 속하는 이야기이다.

네 번째로 등장하는 여인은 다윗왕의 후처로 솔로몬왕의 어머니가 된 밧세바이다. 그런데 밧세바라는 이름이 마태 족보에 나오지는 않는다. 대신 ‘우리아의 아내’라고 나온다. 다윗 왕이 자신의 충성스런 부하 우리아 장군이 전쟁터에 나가 나라와 다윗 왕을 위해 전투를 하는 동안에 권력의 힘으로 그의 아낸 밧세바를 겁탈한 사건이다. 물론 이 부정한 행위는 후에 나단 예언자의 우회 비판을 통해 그 죄를 회개한다.

▲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족보에 밧세바라는 이름 대신 우리아의 아내라는 말을 씀으로 다윗왕의 행태를 고발하고 있다. ⓒ에큐메니안

그러나 불륜 죄의 댓가로 둘 사이에 태어난 첫 번째 아들은 죽음을 맞이한다. 중요한 것은 마태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성인으로 추앙받는 다윗의 죄를 보다 확실하게 만들기 위해 앞의 세 경우와 같이 ‘다윗은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낳았고’라고 기록하지 않고, ‘우리아의 아내에게서’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요즘말로 하면 미투 고발이다.(#MeToo, ‘나도 당했다’) 국내에 미투운동을 촉발한 사람은 서지현 검사인데 그는 이 고발 사건으로 인해 4월에는 ‘젊은 지도자상’을, 5월에는 ‘들불상’을 그리고 11월에는 환경재단에서 주는 ‘세상을 밝게 만든 사람들’의 ‘진실상’을 수상했다. 들불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자신이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나서게 된 이유가 8살 때 경험한 광주민주항쟁 때문이었다고 고백했으며, ‘진실상’ 수상 자리에서는 “어둠을 물리치는 방법은 어둠 속에서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촛불 하나를 켜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촛불 하나를 켰다. 그런데 작은 촛불 하나 켜는 일은 곧 온몸을 불살라야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고백을 했다.

미투운동은 2006년 미국의 여성인권운동가 타라나 버크가 시작을 했다. 그러나 진짜 창시자는 마태이다. 마태는 시아버지로부터 출산의 권리를 박탈당한 다말, 남성들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한 기생 라합, 떨어진 이삭을 주워 먹고 살아야 했던 가난한 과부 룻, 다윗왕의 육적 욕망의 희생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로인해 남편의 비참한 죽음까지도 받아들여야 했던 밧세바, 이렇게 네 명의 여인들의 이름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지는 40대(代)의 역사 속에 일부러 집어넣음으로 성폭력을 고발하고 있다.

화해와 포용의 새 역사를 향하여

더 나아가서 이 여인들은 이방족속 출신의 여인들이었다. 다말과 라합은 가나안 사람들이었고, 룻은 모압 사람, 밧세바는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였다. 예수 이전부터 유대인들은 모세 율법을 준수하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할례를 받고 예루살렘 성전 예배를 통해 야웨를 따를 때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유대민족 선민사상을 굳게 붙잡고 있었다. 당시 유대 사회를 떠받드는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였다.

마태는 아브라함의 순수한 혈통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허위에 찬 것임을 폭로하고 있다. 이방 민족은 유대민족과 단지 종교적으로 구별될 뿐만 아니라 저들은 정치군사적으로는 적대적 관계이다. 따라서 마태는 네 명의 문제 많은 이방 여인들의 이름을 아브라함과 예수의 족보에 삽입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역사는 아브라함의 자손과 비-아브라함의 자손을 구별하고 차별하는 배타의 역사가 아닌 서로 다른 것들이 하나로 뭉쳐지는 화해와 포용의 역사임을 말하고 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는 기도 환상 중에 여러 동물들이 담긴 바구니가 내려오고 이를 ‘잡아 먹으라’는 하늘의 음성을 듣는다. 그런데 거기에는 율법이 부정하다고 규정한 동물들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먹기를 꺼려하였다. 그때 하늘에서 다시 음성이 들리기를, “하나님께서 깨끗케 한 것을 더럽다고 하지 말라.” 베드로는 이 같은 일을 세 번 경험한다.

베드로는 이 환상의 뜻이 무엇인가 생각하던 중에 가이사랴에 거주하는 로마 백부장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의 초대를 받는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가는 것이 하늘의 뜻임을 깨닫는다. 그리곤 집을 방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복음을 전할 때에 성령이 임하고 방언의 사건이 일어난다. 그러자 베드로는 세례를 베푼다. 이는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재현이다. 곧 예수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혹은 가난, 출신 지역에 따라 사람들을 차별하고 심지어는 혐오하기까지 한다. 피부 색깔로 사람을 차별하기도 한다. 동남아시아 출신 이주자들을 무시하고 난민들을 혐오한다. 탈북 동포들 가운데는 이 사회에서 받는 차별 때문에 기회가 된다면 북으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의 족보에는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부끄러운 역사가 드러나 있다. 이 여인들은 당시 사회의 가장 밑바닥 계층의 사람들로서 소외받고 차별받는 민중의 한 사람이었다. 다말은 시아버지의 부권(父權)에 눌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고, 라합은 남성들의 성노리개였으며 룻은 이방 여인 과부였으며 밧세바는 비록 아들 솔로몬이 왕으로 등극하게 되지만, 다윗에게 겁탈을 당하고 충직한 남편이 간교한 권력에 의해 죽임 당하는 일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한(恨) 많은 여인이었다.

이들이 아브라함과 예수의 족보에 포함된 일은 한마디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꼴찌가 첫째 되는 역사 뒤집힘’과 다름이 없는 혁명에 가까운 일이었으며,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해 외친, “이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은 능이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7-8)는 구절의 구체적인 예이다.

이들은 모두 이방 여인들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거룩한 핏줄을 타고난 유대인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선민(選民)사상에 사로 잡혀 있었다. 마태의 족보 고발 사건은 유대인들의 구원 신앙과 사회 이념을 뒤흔드는 폭탄선언이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되고 이룩되는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유대인들만이 아닌 다른 민족들 또한 함께 구원의 반열에 포함되어 있다는 신학적 선언이다. 차별과 배타의 역사가 아닌 화해와 포용의 역사 창출을 선포하고 있다.

이를 오늘에 적용한다면 어떤 이야기가 될 것인가?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지연과 학연 그리고 빈부에 따른 차별의 현실을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남한 사회에는 백만이 넘는 외국인들이 있다. 특히 동남아시아에서 온 피부색깔이 다른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같은 혈색을 지니고 있는 연변 동포나 북한 동포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가? 현재 남한에서 살고 있는 탈북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 사회로부터 받는 차별을 견디다 못해 기회가 허락된다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올해 들어 남북관계는 급변하고 있다. 판문점에서의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만남, 평양에서의 세 번째 만남 그리고 이제 서울에서의 네 번째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 남북관계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관계 개선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은 쉽게 바뀌지 않고 있다. 알게 모르게 교육받고 습득한 북한에 대한 적대감은 여전히 우리의 생각 속에 그리고 사회 안에 남아 있으며 특히 교회 안에 깊숙이 뿌리내려 있다. 무신론(無神論)을 주창해온 북한의 공산주의(共産主義)와 기독교 신앙은 함께 할 수 없다는 전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태가 족보에서 네 명의 여인들의 이름을 밝히 드러내지 않았다면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은 다른 신을 믿는 이방족속과는 함께 할 수 없다고 하는 고정 관념을 계속 유지하였을 것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은 한때 같은 형제나라였던 북쪽 사마리아 사람들을 아시리아의 혼혈점령정책으로 인해 피가 섞이자 이들을 개와 같이 여기며 상종을 하지 않았다. 이들과 대면하는 것은 율법을 어긋나는 일일 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더럽히는 일로 여겼다. 그러나 예수는 이 금단(禁斷)의 땅 사마리아에 들어가서 한 여인과 대화를 나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국가보안법을 어긴 것이다.

화해와 통일의 시대를 맞아 우리 기독교인들이 취해야 할 복음의 자세는 무엇일까? 변화의 21세기를 맞아 북 또한 변화하고 있다. 사회주의를 제창하고 헌법에 종교의 자유 조항을 삽입하였다. 물론 우리가 이해하는 종교의 자유와는 차이가 있다. 만약 우리가 마태가 족보에서 말하고자 했던 구원의 포용과 통합 사상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이런 차이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마태가 만약 오늘 이 한반도 땅에 다시 태어난다면 그는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시대를 바라보며 어떤 족보를 쓸 것인가? 상상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은 부풀어 오른다.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choshal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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