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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너희더러 죄인이라 하더냐죄를 사하심(마 9:1-2)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19.03.03 17:22

한동안 저희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생각해보았기 때문에 오늘은 예수님께서 어떤 행동을 하셨는지를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행동이라고 해도 어떠한 동작에 관한 이야기, 치유, 기적과 같은 움직임으로 인해 발생되는 어떠한 현상을 말씀드리려는 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행하셨는가? 어떠한 사건을 일으키셨고, 그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죄사함의 선언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이야기입니다. 공관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 이야기로,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핵심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라고 말씀하신다는 점입니다. 이 이야기를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중풍병자가 병에 걸린 이유는 그가 죄인이었기 때문이고, 예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하셨을 때에 그의 병이 낫게 되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석해버린다면, 요한복음 9장에 나타난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의 이야기, 그가 맹인인 이유는 부모의 죄도, 자신의 죄도 아니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상충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병의 원인이 ‘죄’가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그에게 ‘죄사함’을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공관복음서는 그 이유에 대해서 바로 뒤에 덧붙이고 있습니다.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마 9:6; 막2:10; 눅5:24)” 예수님께서 사람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설명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도 ‘병=죄’라는 도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에 걸린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는 점에서 동일한 의미가 됩니다.

왜 죄사함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굳이 ‘죄’를 언급하고 계신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이 죄인가?’라는 질문이라기보다 ‘왜 하필 죄인가?’라는 질문이 맞을 듯 합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 봐야 합니다.

▲ 이웃들의 도움으로 지붕을 뚫고 예수께 다가가는 중풍병자 ⓒGetty Image

본래 순서상 오늘 함께 살펴봤어야 할 본문인 마태복음 7장의 첫 번째 말씀은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비판하다’라는 말은 헬라어 ‘크리노(κρίνω)’인데 이 단어는 ‘심판하다’라는 의미로 가장 많이 사용되고 ‘구별하다’, ‘분리하다’라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은 마태복음 7장 1절을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 성경은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남 욕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군가를 향해 죄인이라고 심판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라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에게 질문하는 내용들은 한결같습니다. “저들은 죄인입니까?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신 이유도 그들이 항상 사람들을 향해 ‘죄인이라는 낙인’을 찍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일(추수, 치유 등)을 한 사람도 죄인, 병에 걸린 사람(나병환자, 맹인, 중풍병자 등)도 죄인, 귀신 들린 사람도 죄인, 창녀도 죄인, 이들은 어떠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자신들이 해석한 법의 기준에 따라서 누군가를 죄인으로 만들며, 그들을 낮은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들과는 반대로 ‘죄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선포는 ‘내가 너의 죄를 용서했다’가 아닙니다. “너는 죄인이 아니다”라는 선포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 의해서 ‘죄의 낙인’이 찍힌 사람들을 향한 선포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더 이상 움츠리고 있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인이라는 낙인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당당하게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낮아지라고 하셨는데, 우리 스스로 죄인임을 자각하는 게 낮아짐 아닙니까? 우리 눈에 있는 들보를 깨닫는 게 낮아짐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낮아지라’고 하신 말씀(마18:4; 막9:35; 눅9:46)도 사실은 우리가 ‘낮아져야 한다’, ‘스스로를 비천한 존재로 여겨라’라는 말씀으로 읽어서는 안됩니다. 이는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서기관들을 향한 경고와 연결해서 읽어야 합니다.(마23:1-36; 막12:38-39; 눅20:45-47)

그들은 항상 누군가의 위에 서려고 합니다. 누군가의 위에 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 이외의 사람을 낮은 자로 만드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죄인으로 낙인’ 찍으면서 높아지려고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들을 향한 경고이지, 우리를 향해서 “비천한 무리들”이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읽는다면 예수님과 바리새인, 서기관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죄인의 강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과거의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기보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방식을 따랐습니다. 성도님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낙인을 찍고 예수님의 권능으로 죄사함을 받지 않으면 천국에 이르지 못한다는 점만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라고 선포하셨음에도 교회는 죄를 강조했고, 우리는 낮고 천한 죄인임을 강조했습니다. 지금도 어떤 교회들에서는 이를 무한히 강조합니다.

저는 감히 예수님의 말씀을 빌어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여러분은 이미 죄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성도님들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생각을 조금 더 넓혀보려고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에 있어서 누군가를 낮추는 방식은 그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 방식을 택해서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어떨까요?

지금 시대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며칠 전이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3.1운동 이후 일본은 우리나라에 대한 정책을 바꿉니다. 이전에 일본이 행했던 방식을 ‘무단통치’라고 부른다면, 3.1운동 이후에는 ‘문화통치’ 방식을 채택합니다.

겉으로는 우리나라를 인정해주는 척하면서 검열의 강도는 더욱 심해졌고, 일본의 문물을 전해주는 척하면서 자신들의 은혜를 입은 친일파를 늘려나가는 정책을 펼칩니다. 이는 나중에 문화 말살 정책으로 이어집니다.

당시에 일본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교육했던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가 이것입니다. “한국은 미개하다. 그렇기에 발전된 일본의 도움이 필요하다.” 일본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미천한 존재’임을 세뇌시켰습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일제를 받아들이도록 만들려고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에서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어가며 높아지려던 모습과 동일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을 미개한 존재로 만들며 일본이 그 위에 있으려고 했던 노력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 경제 얘기가 나오면 항상 나오는 단어인 ‘낙수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기업이 잘 살아야 다 잘산다.’ 저는 이 역시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대기업 이외에는 다 능력이 없기 때문에 대기업이 더욱 높아져야만 다 잘살게 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대기업들은 끊임없이 위로 위로 올라가게 됩니다.

강요의 영향

이러한 강요가 문제이지만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강요 이후에 있습니다. 지금 시대에 이런 강요는 조금만 공부하고 생각해보면 자연스럽게 다 알게 됩니다. 누군가가 스스로를 높이기 위해서 우리를 낮게 만들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강요와 세뇌를 끊임없이 받아왔던 우리들 스스로가 우리를 미천한 존재로 여기게 된다는데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비하하는 일들을 서슴지 않게 된다는 점입니다.

일제시대 이야기를 드렸으니까 말씀드리지만, 지금도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했기에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발전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해외의 문화가 일제로 인해 유입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이를 실제로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조금만 생각하고 공부하면 다 알게 되는 문제입니다.

문제는 더 단순한 이야기들 속에 있다고 봅니다. 인터넷에 한동안 떠돌던 글이 있었습니다. ‘한국인을 열 받게 하는 방법’이라는 글입니다.

1. 라면 먹을때 김치를 안준다.
2. 인터넷 속도를 10mb 이하로 줄인다.
3. 식후에 커피를 못마시게 한다.
4. 버스가 완전히 정차하고 난 뒤 자리에 일어나 내리게 한다.
5. 삼겹살에 소주를 못 먹게 한다.
6. 요거트 먹을때 뚜껑을 핥지 못하게 한다.
7. 똥 눌때 핸드폰을 못 갖고 가게 한다.
8. 엘리베이터 문닫기 버튼을 누르지 못하게 한다.

솔직히 읽으면서 공감도 되고 재미로 읽었던 글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냥 넘길 수 있지만, 몇몇 문제들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해봐야 한다고 봅니다. 어느 순간 이런 이야기들은 한국인의 미개함으로 연결됩니다. ‘버스가 멈추기도 전에 내릴 준비를 하는 미개한 한국인’, ‘엘리베이터에서 남을 기다려줄 줄도 모르고 닫힘 버튼을 눌러대는 미개한 한국인’, 그러면서 ‘문화 후진국’이라는 말까지 사용하게 됩니다.

‘엘리베이터 문닫기 버튼을 못누르게 한다’는 이야기는 한국 사람들은 성격이 급해서 매너도 없고, 전기 절약도 못하고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항상 누르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해외 나가 보신들은 다들 아시겠지만, 외국 사람들 대부분 엘리베이터 타면 닫힘 버튼 누릅니다. 문화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유럽 사람들도 엘리베이터 타면 닫힘 버튼 누릅니다. 이건 오래전 경험도 아니고 몇 주 전에 일본에 갔다가 호텔에서 실제로 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오래전 경험도 있습니다. 제가 대학교 졸업하고 미국 갔을 때, 비행기에서 충격적인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어떤 이야기가 있었냐면, 한국인들은 매너가 없어서 비행기에서 발 냄새나게 신발을 벗고 있고, 서양 사람들이 이를 상당히 안 좋게 여긴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에서 비행기를 탔는데, 제 대각선 앞에 앉은 미국인이 비행기에 타자마자 신발을 벗어서 가지런히 의자 밑에 넣어두고 잠을 자기 시작하는 겁니다. 전 솔직히 충격이었습니다. 문화 선진국인 미국 사람께서 저런 몰지각한 행위를 하셨다는 점에서 충격이었습니다.

요즘은 장거리 비행기를 탄 적이 없어서 어떤지 모르겠지만, 장거리 비행의 경우에는 아예 항공기 내에서 신는 슬리퍼를 제공하는 경우도 많았고, 제가 유럽 다녀올 때나 미국 다녀왔을 때, 비행기 안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발을 벗고 있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별 신경 안 쓰는 일들인데, 우리는 스스로를 미개하다고 얘기하고 반대로 서양 사람들은 선진국 사람들이고 매너가 좋다고 말하면서 우리 스스로를 비하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런 인식들이 ‘미개함의 강요’, ‘죄인의 강요’에서 영향을 받아 지금까지 우리에게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충분히 선진국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선진국을 따라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특정 나라들에서 사람들이 행하는 행동들이 시민 사회에 도움이 된다면 이를 배우고 받아들일 필요는 있겠지만, 그들이 선진국이기 때문에 우리 같이 미개한 후진국은 꼭 받아들여야 하고 따라해야 한다는 생각은 버리자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죄인도 아니고 미개한 존재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이고, 택함 받은 존재이며,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바꿔 갈 귀한 성도님들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존귀한 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세우셨고, 그렇기에 힘을 주십니다. 그 존귀함을 잊지 마시고, 존귀한 사람답게 당당히 세상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여러분께 말씀하십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 안에서 작지만 미천하지 않은 존재, 작지만 존귀한 존재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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