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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질서를 거부했던 여자 제자의 탄생말씀을 따르는 삶(눅 10: 38~42)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19.03.05 18:51

오늘 우리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말씀을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익숙하다는 것은 이 말씀을 자주 대하기 때문이오, 낯설다는 것은 그 의미를 생각하자면 익숙한 통념으로 쉽게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빈번히 선포되는 말씀인 만큼, 본문말씀을 접하는 순간 이미 그 핵심적인 의미를 파악하고 어떤 결론을 내렸습니까? 아니면 과연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말씀일까 새삼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까? 어떤 마음과 기대를 갖고 있든, 말씀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살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말씀을 환기하고 그 뜻을 음미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우리에게 익숙한 말씀이라 할지라도 다시 한 번 깊이 새기는 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다가 한 마을에 들렀습니다. 마침 그 동네 살던 마르다와 마리아라는 자매가 예수님 일행을 모셔 들였습니다. 본문말씀의 문맥을 보면, 이미 예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널리 알려진 상황이었으니, 예수님을 모셔 들인 자매에게는 큰 영광이었을 것입니다. 두 자매는 모두 기쁘고 설레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본문말씀을 읽었고, 또 익숙한 본문이어서 다 알고 있다시피 이렇게 환기하지 않아도 그 줄거리는 다 알고 있지만, 본문말씀은 이 첫 대목부터 이례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여성들이 외부 손님을 집안으로 모셔 들이는 일 자체가 평범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마르다라는 이름이 ‘여주인’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남성 가부장이 없는 상태에서 여성이 외간 남성들을 손님으로 맞아들이는 경우는 드물었고 어떤 거리낌을 일으키는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도 이 두 여성 주인공이 예수님 일행을 맞아들인 것은, 당시 통념과는 다른 예수님의 여성들에 대한 시선을 보여줌과 동시에 예수님의 행적 가운데서 여성들의 적극적인 역할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매우 특별한 관계를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만큼 두 자매는 더더욱 각별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일행을 맞이하였을 것입니다.

언니 마르다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정성스럽게 대접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분주합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음식을 마련합니다. 당연히 들뜨고 신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참 일하다 보니 음식 준비로 바쁜 사람은 자기 혼자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합니다.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 곁에 착 달라붙어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앉아 있고 자기 일은 전혀 거들어 주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 Jan van Kessel(1626–1679), “Christus bei Maria und Martha” ⓒWikimedia Commons

그래서 아주 노골적으로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님, 저만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동생은 전혀 거들떠보지 않은 게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마리아더러 제 일 좀 도우라고 말씀해 주실 수 없나요?” 하고 외칩니다. 마르다의 이와 같은 이야기는, 자기가 하는 일, 자기가 생각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내세우는 말입니다.

마리아의 이러한 생각은, 단순히 개인적 불평이요 주장이 아니라, 여자라면 마땅히 음식을 만들고 손님을 대접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당대의 상식적인 생각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마르다의 분주한 행동은 충분히 정당성을 갖는 것이었고, 따라서 마르다의 주장 역시 정당성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상식적인 생각과 주장을 한마디로 잘라 거부하고 계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너무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다. 오히려 네가 그 몫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마르다가 바쁜 게 바로 당신을 정성껏 대접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일의 가치를 묵살하고 당신의 말씀을 듣고 깨우치는 일이야말로 꼭 필요한 일이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이 말씀은, 선교여행을 자주 하였던 사도들이 자신들을 대접하는 가정과 여인들에게 교훈적인 이야기로 자주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호화로운 음식으로 사도들을 대접하는 것보다는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믿고 따르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일이며 절실한 일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말씀으로 자주 인용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가만 보면, 마르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께 참 불공평하다고 불평하는 것이 정당하게 보일 만합니다. 특별히 오늘날 성평등의 관점에서 볼 때, 지금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 형태가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다면 우리의 마음이 덜 불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컨대 마르다와 마리아뿐만 아니라 다같이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까지 마치고 난 다음 함께 말씀을 나누었다면 이 이야기를 대하면서 우리가 갖는 불편함이 사라질까요?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선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상황, 그리고 당대의 상식적인 성분업적 관념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통념과는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점을 주목하여야 할 것입니다.이 이야기는 두 가지 차원에서 당대의 상식, 또한 오늘 우리의 상식을 넘어섭니다.

첫 번째로, 본문말씀은 반복되는 일상의 일보다는 특별한 기회에 누릴 수 있는 일의 의미를 강조합니다. 먹을 것을 준비하며 접대하는 마르다의 일보다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일을 강조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가 신중하게 그 의미를 헤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엄밀히 말해 비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접대하는 일 ‘보다’ 말씀 듣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식사’ 준비하는 것보다 ‘설교’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거나 여자의 일보다 남자의 일이 더 중요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말 그 자체를 보면 접대하는 일 그 자체를 무시해버리고 말씀 듣는 일만 정작 필요한 일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몸을 가진 인간으로서 먹는 일,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으로서 대접을 하는 일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이니 당연히 식사를 해야 하고, 또 손님으로 남의 집을 찾았으니 당연히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 아는 일이요 평범한 일상사입니다. 특별히 그 의미를 강조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말씀을 듣는 일은 특별한 기회에 특별한 선택을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일상사를 팽개쳐버리고 그 특별한 기회만을 누리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일상을 관통하는, 그래서 그 일상을 다시 구성하는 유일한 일을 강조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살 것이다” 하는 이야기와 같은 의미입니다.

빵도 먹고 말씀도 먹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빵으로 사는 그 삶이 말씀으로 사는 삶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물질적인 삶에 하나님의 정의가 깃들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꼭 필요한 한 가지 일’이란 그런 의미입니다. 대접을 하는 일이 말씀을 듣는 일과 무관해진다면 소용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마리아가 지금 그 사실을 깨닫고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높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먹고사는 일상사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일 가운데 선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한 일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 및 교회생활과 일상의 삶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말씀은, 깊이 헤아리자면, 그와 같은 중요한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두 번째로, 이 이야기는 그 말씀을 듣는 일에 몰두한 사람이 여인 마리아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당대의 상식을 무너뜨립니다. 한 여자가 한 선생의 발 가까이 앉아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 남자들은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할 정도였습니다. 여자는 일상의 정해진 질서 안에서 허드렛일만 감당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오늘의 시점에서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옛날에도 여자들의 교육은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을 뿐 아니라, 바로 지금 오늘의 시점에도 성차별이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 당시에는 더더욱 말할 것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여자가 예수님의 직접적 가르침을 받는 제자의 반열로 등장합니다. “마리아는 주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이 표현은 그저 친근함의 표현이 아닙니다. 이 표현은 선생과 학생,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성립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관계를 나타내는 전용적인 표현입니다. 당시 랍비들에게 여성 제자를 두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일상의 한계를 깨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일에 해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통념으로 자리잡고 있는 성적 역할분담의 논리에 매이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날 여성의 권리 신장이 이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가부장제 사회의 본질이 바뀌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성차별이 엄존하고 있고, 심지어는 여성혐오와 성폭력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는 신분제를 부정하고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처럼 이해되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삶의 방식은 과거와는 다른 형태로 기존의 차별관계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사회에서 가장 극심한 성별 임금격차가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심심치 않게 문제시되는 여성혐오 현상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더욱 강화된 차별의 현실, 그 차별을 완화하려는 조치로 어떤 상실의 위협을 느끼는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태도를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랜 역사를 통해 고정되어 왔고, 오늘날도 강고하게 지켜지고 있는 성적 분업과 역할이 결코 항구 불변하는 것일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성별의 사람들이, 아니 그저 사람들이 어울려 사회를 구성하고 그 안에서 진정한 인간성을 구현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성적 분업과 역할분담은 잠정적 방편에 불과할 뿐입니다. 동등한 파트너로서 서로 존중하고 각기 몫을 감당한다는 점이 모든 인간관계를 규정짓는 본질적 측면입니다.

본문말씀이 증언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사람들이 불변의 법칙으로 간주하는 성적 분업과 역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인간을 인간으로 존중하는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치는 일의 소중함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땅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이래 사회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것이 어떤 측면일까요?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평등의식입니다. 그것이 신분적 성적 위계질서를 무너뜨리고 각 개인이 저마다 당당한 삶의 주체로 인정받고 인정하는 근대적 의식의 기초를 형성한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선취되었고, 각 가정에서 선취되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소수의 미력한 존재로 강고한 기존의 사회질서를 변화시키고 향도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조선사회에서 초기 그리스도교가 민중들의 삶의 변화를 불러일으킨 면모를 전하는 흥미로운 기록이 있습니다. 선교사 게일의 편지의 한 대목입니다.

“한국인들은 어떤 점에 있어서는 내가 본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완전히 부패하고 강압적인 정부 치하에서 마치 무감각하게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기독교는 그들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들어왔고, 그들이 가장 필요한 것을 충족시키고 있습니다. … 국민들의 생활은 절망에서 어떤 예외를 받아들이려는 생생한 정의감으로 맹렬히 변하였습니다. 작고 어두운 토담집 안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던 말다툼과 싸움이 멈출 때마다 이웃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어쩌면 아무개는 예수쟁이임에 틀림없어. 그들은 아주 조용해졌거든.’ 내가 보기에도 그 집은 훨씬 깨끗해졌고, 4일이 더 지난 후에 나는 그 여자의 얼굴 표정에서 그가 기독교인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J. S. 게일, 『전환기의 조선』, 평민사, 1986, 94)

우리가 말씀을 받아들일 때 삶이 어떻게 변화되는가를 보여주는 생생한 일화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이 삶을 변화시키는 역동적인 신앙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기독교인의 세가 우월하기에 그 우월한 힘으로 뭔가 영향력을 끼치는 것에 훨씬 쉽게 유혹을 받는 오도된 신앙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말씀에 의한 삶이 아닙니다. 복음을 따르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직 상호간의 신의를 전제로 하여 서로 사이에 얽힌 문제를 풀어가는 데 익숙하기보다는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믿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아직! 너무 비관적으로 절망해서는 안 되겠지만,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한 사태는 그러한 삶의 실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입니다. 지금 우리 모두가 안타깝게 생각하고 충격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가장 극명한 사례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말씀의 의를 따르는 삶으로의 회복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허덕이게 만들고 부산하게 만드는 일상의 삶의 틀, 게다가 그것이 부조리하기까지 하다면 더더욱 그 삶의 틀을 무너뜨리고 말씀으로 새롭게 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취적인 정신이며 가치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 진실을 깨달아 새기며, 삶 가운데서 그 뜻을 구현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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