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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란 무엇인가라캉을 곱씹다
손성현(감리교신학대학) | 승인 2019.03.07 18:41

라캉에 관한 책을 읽었다. 왜 라캉과 관련된 책을 읽었을까? 내 안에서 꿈틀거렸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에 대해 알고 싶었고, 무엇을 알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일까?

▲ 자크 라캉이 저술한 『욕망이론』(권택영 옮김[서울: 문예출판사, 1998])

내가 계속해서 책을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라캉에 관해 무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봤을 때, 역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라는 속담이 떠올라 실소가 흘러나온다. 그렇다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그리고 정말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는 걸까?

그렇다면, 그 시간은 나에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무의미한 시간으로 남는 것인가? 그건 앞으로의 행보를 통해 알게 될 것이다. 시간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읽고 있는 책이, 글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난관에 부딪힌 나에게 있어서, 라캉에 대해 알려고 떠는 내 모습에 절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절망이라는 감정이 올라왔을 때, 그에 맞춰서 굴복한다면, 그것이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일까?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은 넘어 서는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으면, 흐르지 않으면, 안 된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는다. 이 말을 나는 단순히 자연 속에 관찰되는 것으로만 이해를 해왔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문장이 좀 다르게 보인다. 흐르지 않는 물이 고착된 것, 죽음 충동으로 보인다.

욕망의 기원

사람은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 있다. 흔히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용기가 필요한 시점은, 바로 이 선택이 필요한 시점에 서 있을 때다.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분명히 용기가 필요하다. 다만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나의 경험으로는 말 할 수 있겠다.

내 삶에 변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용기를 냈다. 되는대로 해보자고. 물론 그 끝이 행복한 결말을 맞게 되는 지는 불명확하지만, 아마도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죽기 전까지는 그 마지막을 알 수 없지 않을까?’라고 말하겠다.

그리고 내가 죽는 때는 내가 만족을 느끼는 때가 바로 그 때일 것이다. 나는 죽기 전까지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죽는 순간에도 나는 ‘더 살고 싶다.’는 갈증을 느낄 것이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원하고, 찾는 것이 바로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가 되 줄 것이다.

선택을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행동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에 기준을 가지고 우리는 선택을 하는가? 손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가? 있다면 그 사람은 그것을 정말 손해 보고 싶어 하고 있는 건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 손해를 보고 싶어 할까? 손해를 봄으로서 남에게 동정심을 얻기 위해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는다.” 이게 필요한 것일까? 그렇다면 손해 보는 것을 통해서, 이미 얻으려 한 것을 얻게 된 것이 아닌가? 그러면 그것이 손해라고 말 할 수 있는가? 그렇다, 손해 보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선택을 통해서 유익을 얻기를 바란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 무엇인가를 얻으려 선택을 한다. 그리고 우리가 선택을 하는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손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얼마만큼 얻었는지에 대한 정도의 차이만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통해서 원했던 것을 실재로 얻을 수는 없다. 이미 그것을 얻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실재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에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참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을 알 수 없을 것 같은 터널 속을 달려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닿을 수 없다는 생각에 이미 정신이 아득해진다. 분명히 보이는 것 같은데, 저기 멀리 아른아른 거리는데, 아무리 달려도 가까워지지 않는 사막의 신기루처럼, 나를 놀리듯이 닿지 않는 술래와 술래잡기를 해야 하는 것에 갈증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왜 이런 허망해 보이는 것을 원하게 되었을까? 나는 왜 그것을 원하는가? 무엇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그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채우고 싶어 하는 것이다.

욕망이 생기는 이유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에서도 이야기 되고 있지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빼놓을 수 없다. 라캉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재구성한다. 팔루스와 음경은 동일시 돼서는 안 된다. 세 가지 범주(1)에서 기표로서 다른 기능을 하는 것이다.

▲ 자크 라캉이 이야기한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도식화 ⓒGetty Image

아버지를 현실에 존재하는 개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기표와 은유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이름은 어머니와 아이의 결합을 분리한다. 그렇게 아이에게 아버지의 이름은 결여와 욕망의 상징계 안으로 도입하게 되는 기표가 된다. 따라서 아버지의 기능을 통해서 초자아가 형성 된다. 이 초자아의 형성은 아버지를 내재화한 결과인 것이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가장 깊은 욕망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복잡한 개념은 아이의 양가적인 감정을 살펴보기 위한 방법일 것이다. 경쟁자인 동성의 부모의 죽음에 대한 욕망이 이성의 부모에 대한 성적인 욕망과 더불어 표현된다.

반대로 동성의 부모에 대한 욕망과 이성의 부모를 향한 증오로서 표현되기도 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이 두 가지 형태의 표현 모두를 가진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해서 아이는 부모에 대해서 양가적 감정을 조정하고 해소 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라캉은 아동의 초기단계를 ‘거울 단계’를 통해 들여다보고자 했다. 아이가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보고 총체적이고 완전한 것으로 가정하고 뛸 듯이 기뻐한다는 사실은 주체가 이미 상징계 속에 던져져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거울 단계의 ‘나’는 타자와의 변증법적 동일시에 의해 객관화되기 이전의 주체이며 언어가 그 보편구조 속에서 주체 기능을 부여하기 이전의 주체이다.(2)

이때의 ‘나’의 형태는 “이상적인 자아”이지만, 자신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이상적 자아와 현실의 자신을 동일시하게 하는 접점은 바로 “신체의 통일적 형태”로서, 이를 통해 아이는 자신을 거울 속의 고정된 이미지로 생각한다. 거울 속의 이미지의 타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타자의 욕망으로 동일시하게 된다. 그래서 라캉은 거울단계를 동일화하는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거울에 비친 이상적인 상에 도달 할 수는 없다. 혼란스러운 동작과는 대조적으로, 고정된 이미지로 그리고 전도된 대칭적 형태로 아이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3) 여기서 의식은 처음부터 ‘거울에 비친 이미지의 전체성’을 욕망하면서, ‘오인의 구조’로부터 출발하게 된다. 이 동일화 하려는 과정을 통해서 허구적인 것을 쫓으려 하는 허구적 성향을 갖도록 해준다.

이상적인 것과의 동일시를 하고 싶어 하는 그 욕망이 있지만, 동일화 될 수는 없다. 충족 될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충족되지 못한다는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무능력함을 경험하게 된다. 이상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해서 아버지가 되고 싶은 아이가 아버지가 되지 못하는 경험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거울단계는 자신과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상적인 나)을 통해서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아버지의 이름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에게 좌절을 경험하게 해준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거울단계에서의 좌절과 아버지의 이름으로의 좌절의 경험은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거울단계에서의 좌절만 있다면, 자신의 이상적인 상에 대한 욕망이므로,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일어나는 욕망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통한 좌절만 있다면, 정말 타인에 의해서만 자신을 확립하게 되는, 타인의 욕망으로서만 욕망하게 되는 모습을 가지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울단계를 통해서도 아버지의 이름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은, 자신에게는 무엇인가 결여된 것이 있다는 것을,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닿을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그것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상태를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채우려고 하는 욕망이 생겨나는 것이다.

아버지가 될 수 없고, 이상적인 내가 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되려고 하는 것이 욕망이다. 만약에 이것이 멈추고 고착된다면 그것은, 죽음충동이고 정말 말로서가 아니라 죽음을 대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말을 한다. 그리고 수많은 말을 듣는다. 읽기도 하며 쓰기도 한다. 이러한 언어를 하는 행위 즉, 언어놀이가 이미 욕망덩어리인 것일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언어의 대상은 정말로 그 언어의 대상을 뜻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해 봐야 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 개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 말이 뜻하는 바가 정말 개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개는 무엇인가? 개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개를 본적이 없는 사람에게 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개에 대해서 설명을 할 때 다른 것들에 빗대어서 설명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것들의 집합이 될 수 있지만, 개는 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이미 언어를 구사한다고 하더라도 이 언어는 실재를 그대로 드러낼 수 없다. 그저 그 주위를 맴도는 것일 뿐이다. 이미 언어행위를 하는 것을 통해서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전달하려고 하는 대상에 대해서 어떻게 해서든 전달하려는 그 노력에 이미 욕망이 들어가 있다. 욕망은 닿을 수 없는 것을 꿈꾸는 것이다. 그 꿈은 신기루 혹은 환상이다.

계속해서 욕망하는 것에서 미끄러진다. 욕망하는 것에 닿았다 싶어도 그것은 더 이상 내가 원하던 욕망이 아니다. 욕망은 계속해서 끝없이 변화하며, 최종의 장이 없는 순환의 연속으로 이끌어 갈 뿐이다.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에서부터 이미 끝없이 닿을 수 없는 것을 욕망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미끄러지면서 그 욕망 주위를 맴도는 데, 그 욕망이 변하기 때문에 항상 다른 욕망을 따라다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오이디푸스에 근거한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가 되려는 몸부림이다.

욕망은 실현될 수 있는가

현시대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나’는 민주주의 속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자유시장경제체제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에서 살고 있다. 자본주의는 우리의 욕망이 계속해서 바뀌도록 유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계속해서 변하는 세계의 경제 속에서 끝없는 자본으로 우리의 욕망을 채우려한다. 욕망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말도 나오는 것일까?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 하지만 이 말에는 아마 이런 말이 어울리는 답일지도 모른다.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없다면, 돈이 부족한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욕망을 채우기에 100이라는 돈이 필요했을 때, 100이라는 돈을 달성을 했다고 해보자, 하지만 이미 100이라는 돈을 채운 나에게 있어서 100으로 필요한 욕망은 더 이상 내 욕망이 될 수 없다. 125라는 욕망이 존재하는 것이다.

▲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이어 정신분석학의 새로운 장을 펼친 프랑스의 정신의학자이자 철학자 자크 라캉 ⓒGetty Image

그렇다, 돈이 부족한 것이다. 그렇다면 또 125만큼의 돈을 달성한다면, 이미 두 번째 단계의 욕망을 달성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150이라는 욕망이 또 존재할 것이다. 저 말은 계속해서 돈을 채운다면, 욕망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지만, 저 자본이라는 놈이 끝없이 욕망을 채워줄 수 있다고 여기게끔 만들 수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봤을 때, 아마 자본주의 또한 종교처럼 절대 망하거나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교가 끊임없이 무궁무진한 초월적인 존재를 통해서 끊임없이 부어 주는 것이라면, 자본주의는 끊임없을 자본(주식, 신용거래 등)을 통해서 욕망이라는 주머니에 부어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돈이 많으면, 돈을 과시하고 싶어질 것이다. 돈이 많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서 자신이 아버지 같은 존재처럼 보여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권력을 가지려고 할 것이다. 권력을 잡는 것으로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을 충동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적극적이게 보여지고 싶어 한다. 아니 보여지게 만들고 싶어 할 것이다. 사실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욕망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비춰질 ‘나’의 모습이 아버지 같은지에 대해서 훨씬 많은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돈이 많은 것으로 권력을 잡은 것으로 아버지를 누르고 자신이 아버지가 되려고 하는 이러한 부친 살해의 욕망의 표출은 문화를 이루어 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루어지는 문화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역사가 된다. 그렇다면 역사라는 것은, 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만든 문화의 나열이라고 볼 수 있다.

돈이 많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이런 것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할 지라도 지식인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은 ‘혁명’을 통해서 이것을 이루어 낸다. 그렇게 다시 역사에 한 줄 추가 된다. 이 역사에 한 줄 추가 된다는 것을 보았을 때, 사실은 텍스트를 쓰지 못하고 텍스트 주위를 맴돌면서 텍스트에 각주만 달고 있는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온다. 어느 누구도 텍스트(역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그저 한줄, 한줄 더해 갈 뿐이다.

그렇다면 역사를 가부장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역사는 아버지라고 여기는 것들의 집합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모든 법 그리고 쥬이상스. 아버지의 법과 어머니의 칭찬. 이 서로 대립된 것들로 통해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욕망은 결국에 대타자의 욕망이다. 결과적으로 추론하자면 대타자의 욕망은 아마도 남자의 욕망일 것이다. 사회가 가부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실재에 도달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욕망에 도달하려고 할 때 마주하는 틈새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생각하면 내가 실재라고 생각하는 것도, 나의 몸과 내가 하나라는 것도 사실 없을 지도 모른다. 정말로 내가 나의 신체의 말을 듣고 있다면, 나는 이렇게 지내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사실 ‘나’라는 존재 자체도 ‘나’가 원하는 것을 알아주거나 이해해주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 또한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말까지도 실재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말도 그 말을 듣는 이의 욕망을 거쳐서 듣기 때문에 ‘내’가 말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온전히 전달 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비록 상호적이지만 무능하다. 그것은 사랑이 단지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망에 불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도 이렇게 보면,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려고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을 향한, 사랑의 욕망은 하나가 되고 싶은 욕망이지만 가부장제에 길들여진 사랑의 욕망은 가짜를 가짜대로 서있지 못하게 만든다. 가짜를 진짜라고 믿고 싶을 정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행복해 질 수 있을까? 욕망을 따르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인 것인가? 만약에 내가 욕망의 자리에 행복을 놓고 행복을 찾아서, 행복을 좇아서 간다면, 나는 계속해서 걸어가는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처럼, 행복의 꽁무니만 바라보고 행복해 질 수 없을 것이다. 행복이라고 하는 것의 겉만 빙글빙글 돌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을 즐기라는 압박이 우리에게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행복해 지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은, 욕망의 자리에 행복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행복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이루려고 노력한다면, 이미 행복은 함께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상징화에 저항하는 실재계를 향해서 끊임없이 움직여봐야 그 속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상징화의 붕괴가 바로 아버지 살해로 비춰질 것이다. 물론 이것이 실패 할 수도 있지만 분명히 시도해볼 가치는 있다. 우리는 매순간 용기를 필요로 한다. 용기야 말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주는 근원일 것이다.

마치며

이미 이 글을 적을 때, 나의 숨겨진 욕망이 알게 모르게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읽었던 글들에서도 또한 그 사람들의 것이 은연중에 나에게 전달이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내가 쓸 수 있는 글이라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이 글은 다만 환원된 욕망에 나의 욕망이 섞여진 글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텍스트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에 각주를 다는 것이다.’라는 말일 것이다.

이 욕망이 뭉친 덩어리에 불과한 글을 읽는 사람이, 이 덩어리를 어떻게 세공하느냐에 따라서 이 글이 쓰이는 용도와 의미전달이 확연히 다를 것이다.

이 글은 ‘어린 왕자’처럼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다른 느낌으로 읽혀지게 되기를 바란다. 만약 다시 이 글을 읽었을 때, 다른 것을 느끼거나 알게 된다면, 기쁠 것 같다.  그때는 더 많은 욕망을 받은 상태일 것이고, 어쩌면 더 큰 욕망을 바라보고, 그 욕망에 하염없이 다가가려고 허우적거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곱씹어 봐도 여전히 쓰고, 금방이라도 뱉어버리고 싶을 만큼 떫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때에도 다시 절망을 딛고 일어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슬럼프에서 벗어나는 방법의 첫 번째는 ‘하고 있던 것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것’이다.

미주

(미주 1)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미주 2) 자크 라캉, 『욕망이론』, 권택영 옮김(서울: 문예출판사, 1998), 40.
(미주 3) 자크 라캉, 『욕망이론』, 41.

손성현(감리교신학대학)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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