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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통해 말씀하셨던 예수예수님의 죽음(막 10:33-34)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19.03.10 20:21

지난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을,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가슴 아파하는 기간으로만 여겨서는 안되겠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사순절 첫째 주일에 저희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한동안 저희가 읽고 생각해왔던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폭력의 사용을 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금하셨던 폭력은 물리적인 폭력 뿐만 아니라 강압에 의한 노동력, 재물 등의 착취도 포함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폭력에 노출되어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빼앗고 빼앗겼던 사람들에게, 한편에게는 “당신들은 폭력을 행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고, 다른 한 편에게는 “당신들은 폭력에 당하고 있습니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땅에 얼마나 많은 폭력이 퍼져 있었는지를 폭력을 쓰는 이들과 당하는 이들 모두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폭력을 조장하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 죄인을 규정하는 사회 시스템을 비판하셨습니다. 위에 앉은 사람들이 정한 해석에 따라 누군가를 죄인으로 만드는 일이 가능했기에, 죄인으로 규정된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일이 편해졌고, 폭력을 통한 착취도 수월했습니다. 또 이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동안 그들은 높은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사회 시스템을 비판하십니다.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시스템을 부정하시고 오히려 죄인으로 규정된 사람들에게 “너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해석은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편지들에 의해서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음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죄인을 규정하는 사회 시스템을 부정하신다.’는 이야기는 당시 랍비들에 의해 해석된 율법을 부정하는 일이고, 율법을 넘어서 자유를 주신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으심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한 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선언하셨다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갖게 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지금 우리들이 ‘예수님의 죽음이 무슨 의미인가?’를 고민하지만, 사실 우리보다 더 많은 고민을 가졌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따르던 선생님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십자가에 처형된 사건은 그들에게 엄청난 고뇌를 안겨주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고뇌의 흔적들은 복음서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복음서의 표면에서는 이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고민을 끝낸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사도행전을 통해서 보게 되는 제자들의 모습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게 합니다.

사도 바울이 쓴 서신들을 비롯한 많은 서신들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완벽하게 동일한 한 가지의 의미를 읽어낼 수 없는 이유도 그들이 여전히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고민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연결시켜서 생각해 본다면, 부활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죽음이 이 땅에서의 끝이 아님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나 베드로전서는 그런 맥락에서 죽으심과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소망은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신앙 요소이지만, 예수님의 죽으심을 그저 부활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이 죽음을 기다리고, 죽음을 향해 가도록 만드는 위험이 발생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서 어디에서도 부활하니까 ‘죽어도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죽으심에는 부활의 소망을 주시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꼭 그것만이 목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앞선 질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함이 아닌가?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서두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갈1:4)

물론 여기에서 ‘대속’이라는 말은 원문에는 없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악한 세대의 죄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셨다는 의미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대속물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말은 ‘대속’입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과 마가복음 10장 45절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대속물’로 오셨다고 말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신학을 조금이라도 접해보신 분들이라면 이때 사용된 ‘대속물’이라는 단어가 헬라어 ‘뤼트론(λύτρον)’이고 이 단어의 의미는 ‘포로나 노예에 대한 몸값’임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포로의 몸값’을 의미하는 ‘뤼트론’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속’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대속’의 의미에 대해서 ‘죄를 담당하기 위해 대신 죽는 존재’를 생각하게 됩니다. 서신들에 나타난 ‘희생 제물’이라는 말과도 연결시켜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셨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표현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에서 예수님께서 ‘유월절 양’이시며 ‘희생되셨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만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맡으셨다는 생각을 갖게 되겠지만, 고린도전서 5장이 전하고 있는 이야기는 우리의 누룩을 제거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와 ‘뤼트론’의 본래 의미를 연결시켜서 해석해보자면, 예수님의 죽음, ‘대속’은 그 의미를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해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사회 체계에 대해 비판하셨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이 체계 속에서 폭력에 의해 고통 받고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이러한 잘못된 체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유월절을 언급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해방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본래 유월절에 먹을 재료가 충분하지 않았기에 무교병을 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무교병 자체에 의미가 부여됩니다. ‘빵을 부풀게 해서 커보이게 만드는 누룩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무교병이다’라는 의미가 생깁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이나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6:6; 막8:15) 사도 바울도 동일한 의미에서 이야기합니다. ‘자신을 자랑하는 누룩을 벗어버리고’(고전5:6)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고전5:8)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지금 시대의 체계는 사람들이 누룩을 찾게 만든다. 누룩으로 자신을 부풀리도록 만들고 있다. 우리는 이 누룩을 벗어버리고, 잘못된 체계가 주는 고난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이 주는 의미입니다.

왜 죽으셔야만 했는가?

그런데 저는 항상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꼭 죽으셨어야만 이를 이루실 수 있는가?’ 이런 고민들 속에서 한 가지 발견한 것이라면,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회에 대한 고발이 된다는 점입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이 체계의 폭력성 속에서 죽임 당할 수 있음을 보여주신 사건이 됩니다.

또한 이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아도, 또 다른 방식의 폭력을 휘두르지 않더라도 그들의 잘못을 드러낼 수 있음을 보여주신 사건이기도 합니다.

▲ 70년대 발생한 전태일 분신 사건에서 민중신학자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보았다. 사진 오른쪽이 전태일 열사 ⓒGetty Image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 학자가 안병무 선생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안병무 선생님이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과 그 이후로 이어진 집회를 보면서 이렇게 말하셨다고 합니다.

“저곳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

다들 아시겠지만, 70년 전대일 열사의 분신은 단 한 가지를 위해서였습니다. ‘근로기준법 준수’ 그의 죽음은 이 땅에서 노동자들이 얼마나 착취당하고 고통당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는 보여주었고, 또한 고통 받던 사람들이 해방을 꿈꾸며 일어설 수 있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얼마나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시는 사건이었고, 또한 우리가 이로부터 해방을 꿈꿀 수 있도록, 해방을 위해 일어설 수 있도록 만드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일어서라’라는 외침이라면, 예수님의 부활은 ‘해방되리라’라는 증거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가 지금의 잘못된 체계를 향해 일어서고 이 체계를 고치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는 불의한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우리를 낙인찍고 있는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해방될 수 있다는 외침이며 증거입니다.

지금의 우리

▲ 전태일 열사의 사건 속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가장 먼저 발견한 안병무 교수. 이로부터 민중신학은 태동하게 된다. ⓒ김인준 화백

계속해서 말씀드리고 있지만 우리는 지금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폭력의 체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일들, 폭력이라고 여기지 않는 생각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최근 북미대화로 인해서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됩니다. 지금 아이들은 모르겠지만, 저희 세대까지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학교에서 배웠기 때문에 ‘아름다운 통일’을 꿈꾸는 세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통일’은 현실적으로 가능합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통일은 일반적으로 북한의 체제가 붕괴해서 우리나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로 남과 북이 융합된 사회를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의 ‘적화통일’을 막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정확히 어느 나이 또래까지 통일교육을 받아왔는지 모르겠지만, 통일교육을 받은 세대들은 우리나라의 체계 안에서 하나가 된 남과 북을 꿈꿉니다. 그리고 이런 형태가 가장 이상적이고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북한에 의해 이루어지는 통일은 미사일과 핵에 의한 폭력적 통일, ‘적화통일’이라는 말은 그저 인공기의 색인 붉은 색으로 이 땅을 하나로 합친다는 의미이지만, 북한에 의한 통일은 이 땅을 피로 물들이는, 붉은 피가 강이 되어 흐르게 되는 통일로 인식하게 됩니다. 솔직히 그런 의미가 아님을 알고 있더라도 ‘적화통일’이라는 말은 왠지 꺼림직 하고 폭력적으로 느껴지는게 사실입니다. 그렇게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적화통일이던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로의 융합이던 한 쪽이 무너져야 한다는 인식은 동일합니다. 아름다운 통일을 말하면서 그 안쪽에는 누군가의 붕괴를 원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누군가의 붕괴를 원한다는 이야기는 폭력성을 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를 전혀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내가 행하는 일은 전혀 폭력적이지 않고, 상대방만이 폭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여전히 잘못된 폭력의 체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째 주일이면서 청년주일입니다. 청년들이 일어서는 일도 중요하지만, 어른들이 폭력의 체계에서 벗어나는게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이 체계에 물들어 있었고, 우리의 자녀들에게 이런 세계를 강요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폭력에서 벗어난, 해방된 세계를 우리의 자녀들에게, 청년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죽으신 사건의 의미를 깨닫게 되기를 원합니다. 끝까지 우리의 해방을 원하셨던,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길 원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길 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통해 이 땅에 해방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외치셨던 그 해방이 여러분을 통해 일어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시고 힘주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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