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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귀하에 여긴 까닭은?” - 古之所以貴此道者何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62
이병일 목사(광주무등교회) | 승인 2019.03.11 19:34
“도는 만물의 물굽이(물을 대는 것)이니, 선한 사람의 보배이고 선하지 않은 사람의 보호소이다. 아름다운 말은 시장에서 사고 팔 수 있고, 존경할만한 행위는 사람(위정자, 벼슬아치)에게 베풀(축하할) 수 있는데, 사람이 선하지 않다고 하여 어찌 버릴 수 있는가? 그러므로 천자(왕)를 세우고 삼공(벼슬)을 임명할 때, 비록 보배 구슬을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의 말 앞에 놓을지라도 앉아서 이 도에 나아가는 것과 같지 않다. 예로부터 이 도를 귀하게 여긴 까달은 무엇인가? (이 도를) 구하여 얻으면 죄가 있어도 사악함을 면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천하에 귀함이 된다.”
- 노자, 『도덕경』, 62장
道者 萬物之奧(注), 善人之寶, 不善人之所保, 美言可以市, 尊行可以加(賀)人, 人之不善 何棄之有, 故立天子 置三公, 雖有拱璧以先駟馬, 不如坐進此道, 古之所以貴此道者何, 不曰以求得, 有罪以免耶, 故爲天下貴

현실적 정치에서 아름다운 말이나 존경할만한 행동은 예법에 맞는 말과 행위이다. 아름다운 말과 존경할만한 행위를 하는 사람은 나라를 다스리는 지식을 잘 갖춘 사람이다. 그는 벼슬과 재화의 이익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착하지 않은 자, 즉 지식이 없는 자는 벼슬과 재화를 얻을 수 없어 삶이 고달프다. 선과 불선을 차별하는 정치는 동시에 빈부의 갈등을 가져오고 있다.

ⓒGetty Image

그러나 노자는 무위의 도는 예를 잘 아는 착한 자에게 보물이 될 뿐 아니라 착하지 않은 자도 보호해 준다고 한다. 도로써 나라를 다스리면 지식이 없다고 하여 버리지 않는다. 자연의 도는 만물을 차별하지 않고 먹을 물을 대주는 강이나 바다와 같다. 예법에 맞는 말과 행위를 할 수 있는 지식이 있는 자나 없는 자를 차별하지 않는 이 도가 천하에 귀하다.

어떤 강물이든 처음엔 맑은마음
가벼운 걸음으로 산골짝을 나선다
사람사는 세상을 향해 가는 물줄기는
그러나 세상속을 지나면서
흐린 손으로 옆에 서는 물과도 만나야한다
이미 더렵혀진 물이나
썩을데로 썩은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 세상 그런 여러 물과 만나며
그만 거기 멈추어 버리는 물은 얼마나 많은가
제 몸도 버리고 마음도 식은체
그러나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물을 보라
흐린 것들까지 흐리지 않게 만들어 데리고가는
물을 보라 결국 다시 맑아지며
먼길을 가지 않는가
때묻은 많은 것들과 함께 섞여 흐르지만
본래의 제 심성을 다 이지러뜨리지 않으며
제 얼굴 제 마음을 잃지 않으며
멀리가는 물이 있지 않은가
- 도종환, “멀리 가는 물”

역사상 노자의 주장이 현실 정치에서 적용된 사례는 거의 없다. 특정한 사람의 언행이나 좁은 지역에서의 공동체에서 간간이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웃 나라의 닭소리나 개소리가 들릴 정도로 작은 나라들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나 보다.

이미 큰 나라들은 아름다운 말과 존경할만한 행위를 하는 지식이 있는 사람만을 등용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지식이 없는 사람)을 다스리고 있다. 노자가 지식이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을 버리지 않고 보호해야 한다고 한 것은 극에 달한 복지국가의 모습이다. 성서의 약자보호법이 당연하게 실현되는 나라의 모습이다.

예루살렘 성과 그 곳에 있는 성전이 멸망한 것을 이러한 눈으로 바라보면, 새로운 역사를 위한 진통이라고 말할 수 있다. 평화의 터전이라는 뜻의 예루살렘은 이미 다툼과 억압과 착취의 장소가 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역사를 위한 단절의 대상이다.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권력을 위해서 싸우는 장소, 지식이 없어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지 않고 착취하는 곳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당연히 파괴될 것이라고 하였다.

“새로운 시대를 위한 이러한 진통은 초대교회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만일 이 땅에 예수님이 오면 목사들과 신부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길을 따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법정에 서야 하거나 멸시와 미움의 박해와 진통을 겪습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복음을 위해 일하다가 받는 고난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새로운 시대를 향한 해산의 진통입니다. 그 일을 하면서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진통을 한 후에 새 날을 낳는 것처럼 박해와 죽임의 위협에도 끝까지 견디는 사람이 구원, 진정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구원은 그 자체로서의 결과가 아니라 미래로부터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를 향한 구원입니다. 권력자들은 온갖 불법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국민들을 꼼짝 못하게 하면서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려 하지만, 짐짓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작은 희망을 놓지 않으면 이길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산 맞은편인 감람산에서 성전의 멸망과 함께 찾아올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 어떠한 위협도 견디라고 가르쳤습니다. 종말의 심판은 독재와 권력을 남용하는 사람들의 종말입니다. 그 이후에 새로운 시대는 우리가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야 합니다. 그날을 낳기 위해서 지금 당해야 하는 고통은 해산의 진통입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끝까지 견디는 사람” 중에서

이병일 목사(광주무등교회)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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