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교계·교회 칼럼
“보여 주신 삶의 행적, 기억하고 따르겠습니다”문동환 목사님을 추모하며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 승인 2019.03.13 18:34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고등학교 1학년으로 기억한다. 당시 ‘하이Y’(YMCA 고등학생 모임) 활동을 하던 시절, 어느 토요일 오후 책가방을 들고 YMCA 건물을 들어섰는데, 강당에 사람들이 모였는데 문밖에 까지 사람들이 서 있었다.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를 보니 <남미의 해방신학>이 주제였고 강연자 이름 뒤에는 ‘신학대학 교수’와 ‘목사’라는 직함이 붙어있었다.

난 당시 부모님의 기도 희망을 따라 목사를 지망하고 있었기에 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그래 어른들의 틈을 비집고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도 사람들이 빽빽이 들이 차 있었다. 한참을 헤맨 후에야 비로소 강연자의 얼굴이 보이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굴곡의 역사 속에서 만난 문동환 목사님

그런데 강연자의 모습을 보자말자 난 충격을 받았다. 강연자가 아주 빨간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당시 박정희의 독재정권은 (조작) 간첩단 사건을 심심치 않게 터뜨리고 있었고, 반북멸공 빨갱이몰이가 심하게 일어나고 있었기에 뒷골목에서 노는 사람이 아니라면 빨간색은 금기였던 시절이다. 그런데 신학대학 교수 신분에 더구나 목사라는 분이 빨간 넥타이를 매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신학>이라는 용어도 그랬지만, 그 모습이 충격이었다. 강연 내용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신학공부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내용이었고 목소리 또한 아름다운 고음에 매우 정열적이었다. 여러 차례 박수도 나왔다. 그리고 2년 후 한국신학대학 입학 면접을 하면서 그때 그분이 문동환 목사님인 것을 알았다. 난 당시 다른 교수님들은 잘 몰랐고, 이분 한분만으로도 학교를 제대로 선택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 1983년~1984년 김대중의 2차 미국 망명시기, 대화를 나누는 고 전 김대중 대통령(사진 왼쪽)과 문동환 목사(사진 제일 오른쪽). ⓒ 연세대학교 김대중 도서관

이후 1학년 첫 학기 문동환 교수의 필수과목 강의가 있었다. <자아확립>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과목이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목사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갖도록 하는 당시로서는 매우 특이한 과목이었다.

졸업 후 선후배 동기들을 만나 학교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 과목이 각자의 삶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었다. 당시 남한 사회는 2년 전에 박정희의 삼선을 허락하는 임시국회가 한밤중에 여당 국회의원만이 비밀리에 따로 모인 장소에서 1분 만에 통과가 되었다. 한국신학대학 설립자이자 학장을 역임했던 김재준 목사와 함석헌 선생이 <삼선개헌반대 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를 역임하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아직 본격적인 시위는 없었지만, 형사들이 드나들고 있어 학내 분위기는 팽팽한 긴장 속에 있었다. 그때 난 금서목록에 들어간 사상계를 도서관에서 빌려 김지하의 <오적>시를 다른 종이에 옮겨 갖고 다녔다. 검열로 인해 여러 면이 그냥 하얀 백지로 되어 있는 <씨ㅇ·ㄹ의 소리>를 갖고 다니곤 했는데,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발각이 될까봐 경찰서 옆을 지날 때마다 가슴이 두근두근했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에는 교수들의 강의 내용 또한 검열의 대상이었다. 아마 이 시기였다면 문동환 목사님의 YMCA 해방신학 공개강연을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곤 1972년 12월 유신헌법 1호 발포와 함께 2학년 1학기부터 졸업 때까지 3년 내내 학내 시위가 계속되었다. 휴업령은 물론 휴교령까지 받았다. 당시 휴업령을 연속해서 받은 학교로는 최초의 대학이었고, 휴교령을 받은 학교로는 한국신학대학과 고려대학교가 있었다.

고려대학교야 학생 수가 수천 명에 이르니 어쩌지 못한다고 하지만, 당시 한국신학대학은 전체 학생수가 200명에 불과했는데도, 데모가 치열했다. 그래서 박정희유신독재정권은 조작 <한국신학대학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을 만들어서 학생들을 잡아가고 폐교까지 시도를 했다. 그러나 세계교회로부터의 압력 때문에 시행하지는 못했다.

당시 3학년 2학기 때(1975년) 난 처음으로 기숙사에서 생활을 했다. 어느 날 밤 기숙사 학생들끼리 조직을 하여 형사들의 눈을 피해 아침 9시에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기습거리데모를 했다. 출근시간 잠시나마 광화문 거리를 혼잡하게 했던 이 시위는 이후 대학생 사회에서 유행이 된 거리기습데모의 효시가 되었다. 내 기억에 약 40여명이 참여를 했는데, 당시 늦게 도착한 두세 명의 학생들은 이미 출발한 경찰 트럭에 올라타는 뜨거운 동지애(?)를 보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말해 3년 동안 수업이 제대로 진행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문동환 교수님은 교육과 과목을 가르쳤기에 신약신학에 관심이 깊었던 나는 같은 학교 내에 있었지만, 1학년 1학기 이후로는 수업에서의 만남은 없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문동환 목사님

1학년 수업 중에 기억나는 얘기가 있다. 하나는 익환 형 때문에 열등감이 많았다고 한다. 어려서 우물가 근처를 지나가다 보면 동네 사람들이 형을 칭찬하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 얼굴도 잘 생기고, 노래도 잘 부르고, 행동 또한 시원시원하고, 당연히 여성들로부터 인기가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형에 대한 깊은 열등감이 생겼고 이를 극복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어쩌면 이 때문에 교육과를 선택했을 것이다.

또 하나의 다른 얘기는 사모님과의 만남의 얘기이다. 미국 하트포드 시절 학내 캠퍼스를 같이 걷다가 방구가 나와 힘차게(?) 꾸었는데, 결혼 후에 얘기를 들으니 사모님께서는 그 힘찬 방구 소리에 신뢰가 생겼다고 한다. 결혼 전 젊은이들은 새겨들을 만한 얘기이다. 졸업 직후 1976년 31절 명동성당 성명서 사건 이후 여러 교수들이 감옥에 갇혔을 때, 부인들의 항의 데모는 유명한데, 그때 문혜림 사모님은 푸른 눈의 백인이었지만, 머리에 검은 물을 들이고 한복을 입고 거리 시위를 하곤 하여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졸업 후 난 군대를 마치자 바로 미국으로 갔기에 사실 문동환 목사님과의 만남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한참의 세월이 흐르고 나서 워싱톤에서 이민목회를 할 때, 목사님께서는 은퇴를 하시어 뉴저지에서 사셨는데, 그때 몇 번 동창회 모임에서 만나곤 했었다. 이후 향린교회를 섬기면서 두 번 설교자로 모시면서 스승과 제자로서의 인연을 이어갔다. 다른 제자들에 비하면 별로 내세울게 없는 만남이다.

그러나 내면에서 문동환 목사님이 내게 끼친 영향력은 매우 크다고 말할 수 있다. 99세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갖고 계셨던 끊임없는 탐구욕과 교육의 열정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항상 궁금했다. 우리나라에 해방신학을 전파한 선구자였고 토착화 신학의 일부인 <아리랑신학>을 주창하셨다.

이후 민중신학과 함께 <민중교육론>을 주창하였으며, 90세가 넘어서는 <예수와 바울> 책을 출판하여 바울을 비판하기도 했다. 물론 중간에 문동환 목사님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참여하여 <518광주민주화운동 특별조사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전두환과 노태우의 군사쿠테타의 마각을 세상에 드러내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셨다.

길을 보여주신 스승, 문동환 목사님

사람이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진정으로 존경할만한 스승을 만난다는 일은 하늘이 허락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문동환 목사님을 기억하는 모든 분들은 하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시편 기자가 읊었던 “복에 겨운 몸”이라는 시구가 떠오른다.

향린교회를 은퇴하고 나서 자주 뵙고 싶었지만, 내성적인 성격이다 보니 마음만 갖고 있었지 실행은 하지 못했다. 작년에 편찮으시다는 얘기를 듣고 한번 찾아봬야 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따님에게 연락을 드려 언제가 좋은지 묻기도 했다. 그럼에도 혼자 가기가 뭐해 지방에 사는 동료 목사와 함께 가지고 약속을 했는데, 서로의 시간이 맞지 않아 이래저래 한해가 흘러가고 말았다. 그러다 올해 1월 2일 죽재 서남동 목사 기념사업회 동지들과 함께 누어 계시는 목사님을 찾아 뵙고 세배를 드렸다.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세배였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어머님 만90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잠시 미국 방문 중에 목사님의 부음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래 이 지면을 빌려 목사님께 마지막 하직 인사를 드린다.

‘스승님, 고맙습니다. 보여 주신 삶의 행적 기억하고 따르겠습니다. 평안히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마지막 길은 나에게도 곧 찾아 올 것이다, 그리고 하늘나라 가면 목사님을 다시 뵙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부끄러운 모습 보이지 않도록 자신을 경계하면서, 그러나 스승께서 남기신 청년의 뜨거운 정열을 갖고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한다.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choshalom@gmail.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서대문구 경기대로 55(충정로 2가)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 생명의집 204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9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