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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생 김지훈, 사랑하는 청년아!(전 5:10-20; 약 1:2-11; 막 10:17-31)사순절 둘째 주일(3월17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9.03.15 18:30
지난 주가 청년주일이나, 오늘 본문이 청년주일에 해당되기에 이번 주일로 지킵니다. - 필자 주

1. 92년생 김지훈이 82년생 김지영에게 말한다

▲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2000년에 태어난 이들이 2019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따라서 대학은 올해부터 21세기가 시작됩니다. 이들을 성공회대 사회학과 조효제 교수는 ‘밀레니엄 대학생’이라고 부릅니다. 밀레니엄(millennium)은 말 그대로 천 년의 기간을 뜻합니다. 조효제 교수는 밀레니엄 대학생들의 특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선, 밀레니엄 청소년들은 상충되는 두 흐름의 한복판에서 사회화를 거쳤다. 하나는 ‘이명박, 박근혜 시대’의 특징이었던 ‘경쟁’과 ‘실적주의’에 근거한 가치관의 내면화다. 모든 측면에서 ‘실력’과 ‘성적’ 순서로 보상이 주어지느냐를 면도칼처럼 따지는 것이 정당성의 기준이 되었다. 사회 전체에서 공정함이 제대로 발현될 수 있는 맥락이 소거된 채, 미시적이고 형식적인 공정성이 거의 이데올로기 수준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이들은 전체의 공정함보다 자신들에게 해당되는 작은 공정성을 중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특성은 또 있습니다. 조효제 교수의 말입니다.

“또 하나는 이들이 ‘세월호’와 ‘탄핵’을 거치면서 사회와 정치의 토대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하고 체험했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들은 형성기의 청소년들에게 집단적·감정적 트라우마와 권위에 대한 냉소, 정치적 분노와 열광을 동시에 경험하게 하였다.”

세월호를 통해 ‘정치가 소용없다는 것’을, 동시에 탄핵을 통해 ‘소용없는 정치가 무너지는 것’을 보았던 세대가 바로 밀레니엄 대학생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선배 세대들, 곧 ‘밀레니얼 세대(Millennial Generation)’가 있습니다. 밀레니얼이라는 말도 ‘천년의’라는 뜻입니다. 1980년대 초에서 2000년대 초 사이에 출생하여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사회생활을 시작한 세대를 밀레니얼 세대라고 부릅니다. 모바일 기기를 이용한 소통에 익숙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시대의 아픔 속에서 문화적으로 ‘모자람이 주는 충족감’, ‘불완전함이 갖는 미학’에 매력을 느끼며 ‘낡고 보잘것없는 것’에서 정신적 충족감을 얻습니다.

밀레니얼 세대를 좀 더 세분하여 90년대생들에 주목해볼까요? 임홍택은 『90년생이 온다』 (웨일북, 2018)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90년대생들의 의식은 기본적인 자아실현의 충족을 위해 힘쓰는 ‘유희 정신’에 기울어져 있다. 이념적 세계보다 연극적 세계가 더 중요하다. 물론 이들도 앞선 세대들과 마찬가지로 적자생존의 경쟁이 치열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전 세대들과 다른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 유희를 추구하며 살아간다는 점은 이들의 세계를 다르게 만든다. 이들은 스스로를 어떤 세대보다 자율적이고 주체적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갈 것이다.”

▲ 임홍택, 『90년생이 온다』

최근 이러한 20대 남성들이 보수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도전적이고 비판적이며, 진취적인 청년의 때와 보수 이미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실 지금의 20대 남성들은, 불공정에 극도로 민감해 ‘정유라 입시부정’으로 촉발된 사건을 촛불혁명으로까지 상승시킨 세대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 시스템을 공짜로 악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제주도 난민 신청자들을 거부하는 세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군대 문제(양심적 병력거부와 대체복문제 반대), 취업문제, 또한 ‘미투 열풍’의 흐름으로, 20대 여성들보다 20대 남성들이 공정성에 더 민감해진 것입니다. 기성세대의 잘못을 왜 자신들이 책임져야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럼, 20대의 말을 들어볼까요?

“우리 20대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정체성과 생각을 공유하는 세대이다. 과거 대한민국에는 그 세대들이 공유하는 시대정신이 또렷이 있었다. ‘나의 가난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라는 새마을 정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던 민주화 정신, ‘나를 희생해서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자’는 생각을 기반으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체제 극복을 이루어낸 금모으기 운동 정신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저출산 위기, 다가온 통일 등 여러 가지 시대적 과제가 산적한 오늘날, 20대들은 뚜렷한 시대정신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유교 사회주의’라는 표현으로도 설명이 가능할 정도의, 국가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것이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었던 과거의 집단주의는 이제 해체 수순에 돌입하고 있다.”(바른미래당 김현동 청년대변인)

따라서 지난해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논란에서 20대의 대부분은 설사 이 팀이 남북 평화와 화해의 단초가 되는 길이라 할지라도, 열심히 노력한 선수를 엔트리에서 제외하는 것에 분노했던 것입니다. 남북 단일팀에서 60대 이상 강경보수의 분노는 ‘북’이라는 글자에 기인한 것이라면, 20대의 분노는 ‘단일팀’이라는 불공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미투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들어볼까요?

“오늘날 ‘성평등이 필요하다’라는 명제에 대해, 남녀는 서로 다른 시각을 바탕으로 보고 있다. 20대 남성에게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는 내가 비난할 대상일 뿐, 책임과 잘못을 분담해야 할 동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에서, 20대 남성에게 지난 남성중심주의 사회의 책임을 분담하라는 요구는 불공정함 그 자체로 받아들여진다. 쉽게 말해 ‘82년생 김지영’이 살던 세상의 부조리는 ‘92년생 김지훈’이 감당해야 할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핵심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공정함의 확립이다.”(김현동 대변인)

공정, 정의, 의로움! 성서가 말하고 있는 것을 지금 젊은 세대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세 본문은 이런 질문을 가진 한 청년의 물음으로 시작됩니다. 따라서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청년주일, 청년들에게 주시는 지혜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2.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가복음 본문에서 예수께 한 사람이 질문을 던집니다. 마태복음은 ‘한 청년(마 19:20)’으로 누가복음은 ‘관리(18:18)’로 표현합니다만, 청년으로 통일하겠습니다.

▲ 하인리히 호프만, <예수와 젊은 부자 청년>(1889)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막 10:17-19)

예수님은 선함에 대한 주권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인 계명 중, 특히 사회적 의무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5계명인 부모 공경이 가장 나중에 나오고, 6계명부터 10계명까지를 먼저 언급함으로 청년의 사회적 의무에 대한 강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자 청년은 이것을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막 10:20-22)

왜 예수님을 떠났을까요? 공정과 정의, 의로움을 말하지만, 전체의 공정함이 아닌, 자신에게 해당되는 조그마한 의에 갇혀 있었던 청년이기 때문입니다. 전체의 공정함을 위한 사회적 의무는 내가 ‘이웃에게 하지 않는 것’, 곧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을 넘어, ‘이웃에게 하는 것’으로 나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경쟁과 실적위주로 살아가는 오늘 청년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구약 말씀은 좀 더 본질적인 영역으로 청년들의 시선을 이끕니다.

3. 공수래 공수거

오늘 구약 본문 전도서의 핵심은 ‘헛됨’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허망하다는 것입니다. 해 아래의 인간 삶을 관망하고 나서, 전도자는 인간의 관점에서 그 모든 것이 헛되다고 선언합니다. 그 선언을 깊이 생각하며 같이 읽어볼까요?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도 많아지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전 5:10-11)

소유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들어볼까요?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 내가 해 아래에서 큰 폐단 되는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이라. 그 재물이 재난을 당할 때 없어지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것도 없느니라.”(전 5:12-14)

그렇습니다. 우리의 소유가 우리를 온전히 지켜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자기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전 5:15)”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도 큰 불행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는 수고가 그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일평생을 어두운 데에서 먹으며 많은 근심과 질병과 분노가 그에게 있느니라.” (전 5:10-17)

그렇습니다. 무엇이 중요한지를 모르는 인생은 소유가 많아도, 그 소유로 인해 불행하며, 근심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Naked came we into the world and naked shall we depart from it(이 세상에 알몸으로 와서 알몸으로 떠난다)”는 의미입니다. “You can’t take it with you when you go(갈 때는 그것, 곧 소유물을 가져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Shroud has no pockets(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죠?)!”

4. 어떻게 살 것인가?

자,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것은 비단 한 청년의 물음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의 물음입니다. 예수님의 바로 밑 동생(마 13:55)이자, 시리아 안디옥의 감독인 야고보는 그 답을 오늘 본문 말씀에서 잘 보여줍니다. 야고보는 야곱과 같은 이름으로 ‘약탈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약대 무릎을 가진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기도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때는 믿지 않다가, 예수님의 부활 이후 믿기 시작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큰 기둥이 됩니다(갈 2:9).

▲ 주님의 형제, 야고보 사도

아마도 야고보는 어린 시절, 형 예수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아버지 요셉이 죽은 후,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형의 믿음직스러운 모습은, 야고보로 하여금 형제의 우애를 초월하여 가장에 대한 신뢰감도 갖게 하였을 것입니다. 자신보다 남을 위하고 선행을 하며 사는 형의 모습이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공생애 기간 집을 떠나, 세속적인 혈연관계를 넘어선 형의 모습에는 배신감과 불안이 짓누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 사건 이후, 형인 예수는 더 이상 육신의 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야고보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러한 야고보의 마음으로 본문 말씀을 같이 읽어 볼까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시험’에 관한 말씀, ‘참 지혜’에 관한 말씀, 그리고 ‘인생의 허무함’과 ‘진실된 삶’에 관한 말씀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5-8)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약 1:9-11)

야고보 사도의 말씀은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무게가 있고, 깊이가 있는 말씀입니다.

5. 현세와 내세의 보상: 92년생 김지훈이 말해야 할 세상?

자, 다시 처음 말씀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놀라운 선포입니다.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마 10:23-25)

재물이 있는 자도, 부자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니? 따라서 제자들의 질문은 정당합니다.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마 10:26)” 이것은 한 청년의 질문, 그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0:27).”

소유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에 대한 문제는 소유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전적 의존’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마 10:28).” 예수님은 이러한 베드로의 말을 듣고, 자신을 따르는 자에 대한 보상을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마 10:29-30)

두 가지 보상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현세와, 내세 곧 오는 세상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천국의 비밀을 알지만 실천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덧붙인 말씀이 바로 그러한 의미입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0:31).”

구약의 말씀은 특별히 현세의 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재물과 부요함에 관한 말씀입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모든 것이 헛되다고 선언했던 전도자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삶의 의미와 목적이 생긴다고 봅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먹고, 마시며, 기뻐하며, 선을 행하고, 낙을 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더욱이 인간의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날마다 주시는 선물임을 깨닫게 되면, 허무와 절망은 사라질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는 자기의 생명의 날을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기뻐하는 것으로 응답하심이니라.”(전 5:18-20)

무엇이 먼저냐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재산과 부가 먼저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먼저입니다. 여러분의 건강과 생명이 먼저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그의 나라가 먼저입니다. 인간의 관점이 먼저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점이 먼저입니다. 여러분의 노력이 중요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입니다. 그리고 은혜 받은 이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많은 청년들이 고민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혹은 무슨 일을 할까? 따라서 20대, 혹은 90년대생, 밀레니얼 세대들은 ‘전지구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아니,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아예 체념 하는듯한 태도를 보입니다. 추상적인 문제 역시 귀찮아합니다. 더욱이 ‘연대’와 ‘공동체’라는 의식은 저 멀리 사라진지 옛날입니다. 너무 거대한 문제이기에 그 문제에 압도당하거나, 아니면 아예 눈을 감아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부자 청년이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까지 가지 못하고, 예수님 곁을 떠났던 것처럼, 우리도 이 청년과 같이 우리의 소유 때문에 주님을 떠나야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전도자의 통찰을 깨달아야 합니다. 야고보의 조언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간은 젊은이들의 편입니다. 시간은 젊은 세대들에게 기회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임홍택의 말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도 일자리가 부족한 상태로, 이는 수요자인 기업에 유리한 시기다. 하지만 90년대생들이 구직 활동을 진행하는 이 시간을 지나, 2000년대 출생자들이 본격적으로 입사를 하게 되는 시점에는 일본과 같이 상황이 역전될 수 있다. 일자리보다 취업자가 적어지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90년대 출생자는 687만 명, 2000년대 출생자는 496만 명이다. 우리나라의 기업들도 구직자들의 눈치를 봐야 할 시기가 올 수 있다.”

따라서 조효제 교수는 밀레니엄 대학생들에게 ‘희망의 인권’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앞으로 십년, 이십년 뒤엔 한반도 상황이 지금보다 훨씬 진전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때엔 이 땅의 모든 사람들―남북한 선주민과 이주자―을 아우르는 포괄적 인권이 우리 공동체의 본질적인 화두로 떠오를 것이다. 그 일을 해낼 주인공들, 능동적 희망의 인권을 실천할 밀레니엄 신입생들을 하루빨리 만나고 싶다.”

지금 프랑스는 노란 조끼를 입은 프레카리아트(Precariat, 이탈리아어 ‘불안정하다(Precario)’와 노동자를 뜻하는 영어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어)들이 최저임금과 연금 인상과 함께 노동의 외주화 금지, 비정규직 양산의 중지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1848년 6월 파리에 정치세력으로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트)이 탄생했다면, 이제 2019년 프랑스의 노란조끼들의 반란은 정치세력으로서의 프레카리아트를 낳았습니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새로운 세상은 ‘촛불 혁명’ 다음에 전체(까지는 힘들다면, 적어도 약자들)의 공정함을 위해 연대하며 공동체의 선을 위해 노력하는 ‘밀레니얼 세대들의 혁명’으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92년생 김지훈’은 ‘82년생 김지영’에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불의한 기성세대들, 불공정한 시스템에 분노해야 할 것입니다. 그 길에 내세와 현세의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만난 청년은 자신의 소유 때문에 그 하나님 나라의 길과 영생을 얻지 못했지만, 지금 이 땅의 젊은이들은 그 길을 꼭 걸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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