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생활 칼럼
마음씨 착했던 정호가 먼저 떠났다기독청년운동에 투신하다(2)
김정택 목사 | 승인 2019.03.16 18:14

1975년, 참으로 비슷한 시기에 각 교단마다 사회구원의 신앙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불은 교단에서부터 연대의 불길로 번질 수밖에 없었고 드디어 1976년 1월에는 대전.유성에서 기독운동의 연합체인 한국기독청년협의회를 탄생시켰다. 구세군, 기감, 기장, 복음, 성공회, 예장 6개교단이 모여 초대 회장으로는 기장 황주석을 선출하였다.

나는 현장운동을 총괄하는 민중선교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어설프지만 그래도 사울 알렌스키 교육을 받았다고 나에게도 조직가라는 자의식이 생겨있었다. 같은 반 동료들이나 후배들을 자꾸 청계천 판자촌으로 데려가서는 현장을 보여주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이 시대의 우리들의 사명이라는 것을 정말 진실스럽게 역설하곤 하였다.

신앙심이 돈독했던 후배 정호, 청년운동에 뛰어들다

1학년 후배인 김정호는 예산 친구인데 고등학교 시절에 빌리 그래함이 여의도에서 하는 부흥집회에 걸어서 참석한 아주 신앙심이 돈독한 친구다. 정호는 망설임없이 같이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나는 동완이 형을  찾아갔고 동완이 형은 정호를 박형규 목사가 이끌고 있는 수도권선교협의회 실무자로 만들었다. 정호는 약수동 판자집에 살았다.

▲ 본 이미지는 글의 내용과 무관하지만 한 청년의 죽음이라는 의미에서 게재한다. 편집자 주

약수동 판자집은 청년.학생들의  보금자리.모임장소로  변모되고 있었다. 감신 선배인 종진이 형은 이때만 하더래도 별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은 없었지만 농촌봉사를 하는 그룹의 대단한  인기있는 보스였다. 종진 형은 정호 집에 순진한 남녀대학생들을 많이 데리고 왔다.

또 한쪽에서는 서울대의 농촌활동 학습파들도 들라닥 거렸다.  정호가 다리가 되어 순진파와 학습파가 합쳐 농촌공부모임이 형성되었다. 김기영과 민인기가 주로 공부를 지도하였고 장상환은 슬며시 나타났다 슬며시 사라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정호는 얼굴에 성실이 쓰여진 그야말로 농촌내음새를 물씬 풍기는 모습이라서 선후배들이 다들 좋아했다. 말은 별로 없고 히쭉 웃기만 잘하였다.

어느 날은 김의기라는 서강대 친구가 공부모임에 참여하였다. 의기는 정호 형 판자집에서 자주 기거하였다. 의기는 교회를 안 다니던 친구인데 정호의 신심에 매료되었는지 형제교회를 다니더니 대학생회도  꾸려내었다.

나는 그당시만 해도 감리교전국연합회를 겸하고 있었기때문에 전국연합회에 농촌선교위원회를 두고  의기를 초대위원장으로 앉혔다. 교단 청년연합회로서는 감리교에서 처음 농촌선교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마음씨 착한 정호가 왜

76년 겨울이었을까? 77년 겨울이었을까? 하필이면 정호네집에서 아무 모임도 없었고 같이 잠잔 친구도 없었던 날이었다. 추운 날이기에 정호는 연탄불을 피우고는 창문도 살짝 열어 놓지 않고 잠이 들어버렸다.

아침에 가보니 정호가 연탄가스로 쓰러져 있었다. 급히 병원엘 실어 갔지만 영원히 숨은 돌아오지 않았다. 장례식장은 울음바다가 되었고 박형규 목사는 하나님이 마음씨가 착한 정호의 보필이 필요해서 데려갔나 보다고 말씀을 전하면서 눈물을 닦았다.

김정택 목사  kjt9425@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9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