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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고발 사건바울의 십자가(고전 1:23-24)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19.03.17 17:57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지난주에 사순절 첫째 주일을 맞아 저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올해 사순절 기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지난주에 드렸던 말씀은 예수님 자신에게 있어서 십자가 사건이 무슨 의미를 갖는가였습니다. 예수님 승천 이후 생겨난 교회의 신앙을 떼어내고, 실제 예수님께서 보여주려고 하셨던, 또 가르치려고 하셨던 십자가 사건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이 사회의 문제를 고발하셨습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사람이,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이 고통 받을 수 있는 세상, 무죄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세상을 고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이런 세상으로부터의 해방을 선포하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당신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이 세상을 해방시키라는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였고 의미였다면, 예수님의 승천 이후 교회는 그 십자가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였고, 전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도 있습니다. 혹시나 미리 말씀드리자면, 앞서 말씀드린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십자가 사건과 교회가 전한 십자가의 의미가 조금씩 달라졌다고 해서, 초대교회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의도를 제자 집단이 정확하게 이해했는가의 문제는 둘째 치더라도, 말씀의 의미나 사건의 의미는 시대의 상황에 따라 당연히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러한 변화가 왜곡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의미의 확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해방으로써 십자가 사건을 보여주셨다면, 교회의 시대에는 사회 시스템만이 아닌 종교적 해방의 사건으로 이해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여러 다양한 갈래로 의미의 해석이 나누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다양한 갈래 속에서 우리는 더욱더 큰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이유로 초대교회가 받아들였던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하는데, 이번 주에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시기 순으로 보면, 실제 예수님의 활동 이후 가장 먼저 기록된 책이 바울의 서신들입니다. 복음서를 통해 볼 수 있는 교회의 신앙들은 바울 서신보다도 늦게 기록되었기 때문에 먼저 사도 바울의 십자가 이해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걸림돌인 십자가

사도 바울의 십자가 이해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구절이 바로 고린도전서 1장 23절이라고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의미를 유대인과 헬라인으로 구분하여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유대인에게는 걸림돌’, ‘헬라인에게는 미련함’

▲ 예수와 사도 바울의 십자가가 고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Getty Image

이 중 ‘걸림돌’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책이 로마서이고 ‘미련함’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한 책은 고린도전서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의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 성경의 번역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23절에서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는 새번역 성경과 공동번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리끼는 것’의 원어는 ‘스칸다론(σκάνδαλον)’으로 ‘함정, 장애물’을 의미합니다. 때때로 시편에서 ‘올무’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스칸다론’을 ‘거리끼는 것’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이는 ‘싫어하는 무엇’, 또는 ‘피해갈 수 있는 무엇’을 의미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 ‘똥이 더러워서 피한다’라고 할 때 ‘똥’ 정도의 의미를 갖게 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유대인들이 피해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반드시 걸려 넘어진다고, 또는 십자가에 막혀버릴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9장 31-3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마찬가지의 의미로 로마서 11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이에 대해서 정확히 이해하려면 사도 바울의 율법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하겠지만, 간단하게 말해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중시하던 ‘율법적 행위’는 잘못된 율법 준수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율법의 본질인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믿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잘못을 보여주는 사건, 그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었기에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도록 만든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율법 행위 중심이었던 유대인의 넘어짐을 의미하고, 또한 당시 유대인의 실패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일본 신개역 성경’은 ‘걸림돌’을 ‘躓き(츠마즈키)’로 번역하고 있는데, ‘츠마즈키’는 ‘발에 걸려 넘어질 뻔함’이라는 의미와 함께 ‘실패’, ‘좌절’, ‘실수’라는 의미를 담습니다. 원어의 의미와 바울이 전하는 의미를 모두 담은 단어 선택으로 보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유대인들의 율법 시스템에 대한 경고와 실패의 표지로 생각했다면, 이는 지난주에 저희가 생각했던 사회 시스템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십자가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당시 사회 시스템에 대해, 유대인들의 죄인 규정 시스템이자 율법 시스템에 대해서 비판하시고 이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미련함

어쩌면 사도 바울은 더 넓은 의미에서 제국의 폭력적 시스템으로부터의 해방까지도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구약성경에 정통해 있었다면 이런 맥락을 깨닫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이를 전파하는데 있어서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간디의 비폭력 저항’을 알기 때문에, ‘촛불을 통한 탄핵’을 경험했기에 예수님의 방식이 옳았다고 쉽게 말할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그런 개념이 전혀 없었습니다. ‘무저항을 통한 저항’, ‘비폭력으로 폭력에 맞섬’, ‘십자가에 처형당함으로 악한 체계로부터의 해방 선포’, 이 모든 말은 당시 사람들, 특히 헬라인들에게 있어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이기고, 어리석은 자가 지혜로운 자를 꺾고, 수치가 긍지가 되는 일은 이해할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해 십자가의 미련함을 이야기합니다. 지혜가 최고라고 여겼던 헬라인들 앞에서 사도 바울은 당당하게 말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미련한 일이다” 자신이 전파하고 있는 십자가 사건을 미련하다고 말하는 사도 바울의 이런 당당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고린도전서 1장 27-29절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강한 자,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시기 위해서, 세상에서 강하다고 지혜롭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그들의 강함과 지혜는 아무 것도 아님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일부러 약하고 미련한 자들을 택하신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가장 미련해 보이는 방식, 가장 힘없어 보이는 방식인 십자가 처형을 통해 이 땅을 변화시키고 개혁시키는 일을 행하신다고 말합니다.

정리해서 생각해보자면, 사도 바울이 유대인과 헬라인으로 나누어 십자가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분명 이 땅의 잘못된 체계를 바로잡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체계에 대한 고발이건 걸림돌이건, 지금 나아가고 있는 길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표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헬라인들에게 설명하는 부분은 왜 하필이면 십자가 처형이라는 방식인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미련한 자를 택하시고 그들을 통해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즉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진 일과 십자가라는 방식이 선택된 이유를 둘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힘

사도 바울은 지금의 세상이 잘못 되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점을 가르치셨음도 깨달았습니다. 또한 그 가르침의 극치가 십자가 사건이었음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삶의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말씀은 십자가 사건이 가지고 있는 의미만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깨달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더욱 중심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어떻게 보자면 이는 십자가 사건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의미라고 말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잘못을 깨달았다면 당연히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는 십자가 사건을 깨달은 우리의 사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변화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기에 그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롭게 살아간다는 것은 말은 쉽지만 실재로 행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또다시 십자가를 말합니다. “이전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그만큼 큰 결단과 노력, 고통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은 자신이 이미 그 과정을 거쳤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과거형으로 써 있지만, 사실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선포입니다. 과거의 잘못된 관습, 태도, 마음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안에서만 살아가라는 다짐과 결단과 변화의 촉구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아야 할 정도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어쩌면 바울은 우리가 너무도 쉽게 “나는 변했습니다,” “나는 회개했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하도록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으라는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많은 교회들에서는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으라는 사도 바울의 말조차도 너무나 쉽게 내뱉어버리고 있는 현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십자가 사건, 헬라인들을 향해서 이야기했던, ‘십자가는 미련한 일이다’라는 점은 우리가 쉽게 받아들여도 됩니다. 우리는 이미 이를 알고 있고,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약한 자를 택하시고 부족한 자를 택하신다는 이야기는 수없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다만 이 점은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약하다고 생각할 때, 힘없다고 느껴질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기에 여러분은 약하지 않습니다. 미련하지도, 힘없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십니다.

이를 기억하셨다면 여러분께서 하실 일은 변화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면서 우리 과거의 잘못된 모습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쉽게 생각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변화는 어렵습니다. 개인의 변화도 어렵고 그렇기에 세상의 변화는 더욱 어렵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어려운 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가셨고, 사도 바울도 그 길을 따라 갔음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갈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변화되고, 또한 세상을 바꿔갈 수 있습니다.

이 사순절이 십자가에 우리의 잘못된 모습을 못 박는 기간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말로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변화의 길을 차근차근 걸어가시는 기간이 되길 바랍니다. 십자가에 우리의 옛 모습을 못 박을 정도의 노력으로 변화되시는 기간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될 때, 이 세상도 함께 바뀌어 갈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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