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Sermonday
기독교의 타락, 죽음 이후를 이야기한다구원과 심판의 현재성(요 3:16~21)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19.03.19 20:51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뜻, 오늘 본문말씀은 그 뜻을 아주 분명한 말씀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이야기가 없는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의미를 특별한 방식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 영광은 아버지께서 주신 독생자의 영광이며, 그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1:14).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요한복음은 그렇게 전합니다. 이른바 성육신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곧 인간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인간이 되신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요한복음은 선포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말씀 바로 앞에는 유명한 니고데모와 예수님 사이의 대화가 전해집니다. 니고데모는 인간의 거듭남에 대해 묻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거듭남의 의미를 일러 주십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로 그 말씀에 계속 이어지는 말씀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인간은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선포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다.” 성서는 어째서 이런 말씀으로 구원의 길을 해명하고 있을까요? 구약성서에 그려진 대로 저 높이 계신 하나님께서 시시때때로 백성들과 함께 하면서 인도하시면 되었지 무슨 까닭에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을까요?

그것은 완전하게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신 하나님을 뜻합니다. 군림하거나 지시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과 함께 하는 하나님을 뜻합니다. ‘자 봐라! 이렇게 바로 너희 곁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고 그렇게 선포하고 계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함께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도 하나님의 진실을 알지 못한다면 인간에게는 더 이상 다른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몸소 인간들에게 깨우쳐 주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이 말씀은 그 뜻입니다. 그것은 종교적 배타성의 도그마를 옹호하는 선언이 아닙니다. 인간이 된 하나님을 보고도 하나님의 진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인간이 도대체 뭘 알 수 있으며 무슨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느냐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영생’, 곧 영원한 생명은, 다른 복음서들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와 같은 의미로 요한복음이 특별히 강조하는 개념입니다. 하나님 나라 안에서 누리는 삶,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삶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뜻, 아니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뜻은 인간에게 당신의 진실을 가장 쉽게 알리고, 동시에 그렇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이 전하고 있는 성육신의 선포는 바로 그 신앙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오늘 말씀 가운데 바로 이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중요한 첫 번째 초점입니다. 오늘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진실을 곡해하고 있습니다. 심판이 두려워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진실을 곡해하고 있습니다. 지옥이 두려워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 진실을 곡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구원의 기쁨에 동참하기 위해서입니다.

▲ 한밤 중에 예수를 찾아온 니고데모 ⓒWikipedia

바로 인간의 몸으로 이 땅 위에서 하나님 나라를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름으로써 우리는 구원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신앙을 금기의 영역에서 해방시켜 진정한 자유와 해방의 영역으로 전환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재난과 심판을 피하기 위한 소극적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구원의 기쁨에 동참하며 하나님 나라를 향유하기 위한 적극적 신앙입니다.

그 구원의 기쁨에 동참하며 하나님 나라를 향유하는 것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닙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이 말씀에 다시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중요한 두 번째 초점입니다.

이 말씀에서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것은 심판의 현재성입니다. 심판이 미래의 어떤 곳에서 이루어질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루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거꾸로 구원의 현재성을 말합니다. 행위 업적의 결과에 따라 먼 미래 어떤 곳에서 구원을 보장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곳에서 구원을 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진실 역시 많은 기독교인들에게서 곡해되고 있습니다. 신앙은 사후보상과 관련된 문제일 뿐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 진실을 곡해한 것입니다. 구원과 심판을 사후보상으로 여기는 데서 기독교가 타락하고 사람들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 타락한 구조에 동참합니다. 중세 교회가 면죄부를 판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사후보상에 대한 거짓 약속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신도들의 순수한 헌신의 열정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습니까? 교회는 성장하는데, 교인은 어떤 의미로든 성장하지 못하는 사연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후보상의 논리로 지금 누려야 할 것을 누리지 못하게 만든 반면 교회만 살찌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판과 구원은 바로 지금의 문제입니다. 지금 내가 심판을 받을 것이냐 지금 내가 구원의 기쁨에 동참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 심판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지금 구원의 기쁨에 동참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우리는 사후보상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지금 이 땅 위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구원의 기쁨에 동참하기 위해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장차 받을 보상 때문에 사랑합니까? 아닙니다. 그 자체로 기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누군가를 사랑합니다. 지금 구원의 기쁨에 동참한다는 것은 그와 같은 이치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이렇게 심판과 구원의 현재성, 곧 지금 여기에서의 심판과 구원을 선포하고 있는 것은, 엄연히 구별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선포는 단지 그 현실을 직시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그 두 갈래 길에서 선택의 결단을 요청하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어떤 길, 어떤 가능성을 선택할 것인지 요청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이냐 심판의 길이냐 선택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재삼 강조하건대 그 요청은 종교적 도그마에 대한 믿음의 여부와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삶의 문제입니다. 지금 구원을 향유하는 삶이냐 심판을 받는 삶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름만 기독교인이 된다고 해서, 말끝마다 하나님을 운운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길에 동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뜻을 사느냐 못 사느냐, 그것이 관건입니다.

요즘 우리의 눈이 어지럽고 귀가 따갑습니다. 미세먼지가 꽉 차서도 아니고 도시의 소음이 요란해서도 아닙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도 없고, 역사에 대한 숙연함도 없는 인간들의 몰염치한 태도와 그 인간들이 뱉어내는 말도 아닌 말들 때문입니다. 인간에 대한 초보적인 예의, 역사에 대한 초보적인 이해마저 갖추지 못한 인간들 때문입니다.

39년 만에 광주의 법정에 선 전두환은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는 것으로 일관하였습니다. 공중에 내뱉은 말은 “이거 왜 이래?” 한 마디였습니다. 최소한 형식적인 사죄의 말 한마디라도 기대한 사람들이 얼마나 순진한가 하는 것을 일깨워주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접한 순간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단 한마디라도 참회의 발언을 내놓았더라면, 곤란할 뻔 했다. 나는 아직 저 자를 용서할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그가 이어가고 있는 삶이 어떤 삶일까요? 법적인 판결 이전에 그는 이미 심판의 나락에 있을 뿐입니다. 자신의 지금 삶이 얼마나 누추하고 비루한 것인지 알지 못하니 더욱 딱할 뿐입니다.

지난 11일 광주에서 재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는 세브란스 병원을 들렀습니다. 때마침 그 병원에는 9일 서거하신 문동환 목사님께서 계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지켜나가고 있는 신앙의 전통을 일군 선구자이자 동시에 한국 민주화운동의 거목이신 문동환 목사님은, 1988년 국회 5∙18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위 위원장으로서 국민의 심판을 받는 전두환을 목전에 세우기도 하셨습니다. 전두환은 아는지 모르는지 바로 문 목사님께서 누워 계시는 그 시간 그 병원을 들르는 장면이 텔레비전 화면에 떴을 때, 제 눈에는 검은 차가 병원을 들어가는 의미 없는 장면 대신에 두 사람의 대비되는 길이 선명하게 들어왔습니다. 전날 저도 조문을 다녀왔던 터였고, 또 다음날 장례식에도 참여하였습니다만...

살아계실 때 억울한 이들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그들의 고통에 함께 하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평생 몸 바치셨다가, 지금 육신은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여전히 숱한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계시며 하늘의 삶을 누리는 분의 길. 반면에 권력을 쥐고 숱한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았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줬고, 지금도 구구한 변명과 거짓말로 진실을 대면하지 못하고, 살아 있으나 이미 지옥의 나락에 처해 있는 인간 말종의 길. 구원의 길과 심판의 길이 그렇게 대비되었습니다. 제 눈에는 11일 밤 그 장면이 결코 우연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두환으로 표상되는 어두운 그림자는 과거지사만은 아니었습니다. 국민의 대표들이 모인 국회에서 야당대표의 막말은 아연실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그 막말 폭탄으로 지난 한 주간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습니까? 막말 폭탄은 계속되었습니다. 역사를 바로잡고자 하였던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을 국민 분열을 일으킨 사태라고 주장하는 역사인식은, 그렇게 말하고 동조하는 사람들의 뿌리가 무엇인지 자신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오히려 만천하에 드러내지 않았습니까?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 호도된 역사인식으로 자신들의 정체와 행위를 감추고 싶어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자신들의 정체와 행위를 드러내주는 경우입니다. 법적 처벌은 아직까지 면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역사적 심판은 면하지 못한 그 범죄집단과 한 패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주는 경우입니다.

오늘 말씀은 여전히 오늘 우리 현실에서도 존재하는 두 갈래의 길, 그 대비되는 길을 재삼 환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본문말씀의 참뜻은 그 두 갈래 길에서 선택을 촉구하는 데 있습니다. 지금 구원을 선택하라는 뜻입니다.

역사적으로 벌어진 비극의 사태에 대해 많은 나라들이 어째서 엄중히 그 책임을 묻고 있을까요?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국가들은 나치에 협력하면서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시효를 두지 않고 그 책임을 묻습니다. 지독한 인종차별정책으로 악명 높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진실과화해위원회를 통해 범죄의 진실을 인정하면 용서하고 화해하는 절차를 밟았습니다. 남아공의 이 경우는, 지금도 일본이 완강하게 사과를 거부하고 있지만, 사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 민간인 법정 판결의 원칙을 원용한 실질적 사례입니다. 어두운 역사를 지우고 밝은 역사를 열어가려는 인간적 노력이요, 제도적 시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 바로 그 하나님의 뜻에 부응하기 위해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그 뜻을 외면하고 심판의 나락에서 진실을 온전히 대하지 못하는 이들이 진실 앞에 자신들을 드러내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다 여길지라도 마음 한 구석에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하늘나라를 누리는 삶이 아닙니다. 제발 더불어 하늘나라, 하나님 나라를 누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더불어 기도하고 헌신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서대문구 경기대로 55(충정로 2가)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 생명의집 204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9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