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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안에 하느님의 씨를 키워라 - 다석 유영모(3)조선교회의 뿌리를 찾아서(8)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 승인 2019.03.23 18:36

마가복음이 예수의 수난사를 중심으로 낮아지신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을 주제로 삼은 반면에 요한복음은 높아진 그리스도,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분으로,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주제로 삼는다. 다석은 이를 해석하여 말하기를 요한복음의 하느님은 역사 안에 말씀의 형태로 자신을 내보이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래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 또한 이 세상에 “진리의 실을 뽑아 말씀의 집(思想)을 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절대를 품는 주체적인 신앙인

곧 생각하는 사람 주체적 인간을 강조한 것이다. 서구교회가 말한다고 무조건 믿지 말고, 목사가 말한다고 무조건 신뢰하지 말고, 자신 안에 절대를 품고 말씀을 되씹고 되씹는 과정을 통해 믿으라는 것이다. 그러할 때,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믿음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뜻을 찾게 된다고 말한다.

“절대가 아닌 것은 생각하지 말고, 지상의 것은 거의 전부 훨훨 벗어버리고 ‘하나’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하나의 ‘님’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절대 진리를 위해서는 내버릴 것은 다 내버려야 합니다. 이런 것은 다 어디서 나오는 것이겠습니까? 다 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생(生)을 가진 자는 영원히 사랑을 추구하여 나갑니다. 이 세상이 되고 안 되고는 영원한 님을 찾는 사랑의 힘을 갖느냐 못 갖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김교신 선생과 달리 류영모 선생은 정통기독교신앙을 버렸다. 정통기독교신앙이란 4세기 말에 바울의 편지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교의신학의 핵심을 요약한 사도신경을 따르는 신앙을 말한다. 사도신경에서 말하고 있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은 예수의 육신부활과 동정녀 탄생에 이어, 예수의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인간의 원죄가 속죄된다는 대속의 속죄교리를 믿는 것이다.

그런데 다석은 사도신경에 입각한 속죄교리는 자기와는 관계가 없다고 했다. 요한복음에 따라 진정한 기독신앙은 하느님의 성령을 받아 영원한 생명(얼나)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에게서는 예수의 신앙을 배워야지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는다.”

달리 말해 예수 믿기를 넘어 예수 따르기를 넘어 예수살기를 하라는 것이다. 예수의 피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대속신앙만이 주를 이루는 오늘 교회의 현실은 분명 예수께서 바라셨던 일은 아니다. 다석은 교회가 가르치는 대속 신앙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기초하여 스스로의 주체적인 신앙을 갖기를 바란다. 예수께서 그렇게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와 함께 자신의 한계를 넘어 보다 큰일을 하여야 한다.

자속의 예수, 대속의 그리스도

흔히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할 때, 불교는 자력종교, 기독교는 타력종교라고 말한다. 불교는 극기의 훈련과 명상 깨달음을 통해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곧 스스로가 부처가 되는 구원의 길을 가르친다고 한다. 반면 기독교는 구원은 오로지 전적으로 하느님의 주권에 달려 있는 것으로 그의 아들이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곧 오로지 신의 은총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

▲ 다석 유영모 선생님과 그의 부인 김효정 선생님 ⓒGetty Image

남한교회가 구원 교리에 있어 가장 강조하는 성서 구절은 로마서 3장 28절의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덛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라는 사도 바울의 얘기이다. 마르틴 루터 신부가 중세 가톨릭교회의 타락에 대항하여 개혁운동을 펼칠 때에도 바로 이 말씀에 근거해서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고 구원은 오직 하느님의 은혜에 의한다고 하는 sola gratia를 외쳤던 것이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바울과 루터 공히 구원에 있어 자속의 노력은 부정하고 대속의 교리만을 외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모든 주장과 사상이 그러하듯이 기독교에서 어떤 특정 교리가 외쳐질 때에는 그 교리를 외쳐야만 하는 역사적 상황이 있는 것이다. 바울이 오직 믿음에 의한 의인됨을 강조하는 것은 당시 유대교의 율법 곧 할례법이나 안식일법 정결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는 ‘폐쇄적인 유대혈통 민족주의’와 ‘예루살렘성전 제사절대주의’라는 부당한 교권 교리에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이방인 구원을 가로막는 이러한 법을 타개해야만 했던 상황이 있었다.

루터 또한 중세 가톨릭의 로마 교황청이 베드로성당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해 민중을 오도하는 잘못된 가르침과 횡포에 가까운 교권에 대항해야 하는 역사적 상황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나 루터가 신앙의 실천과 행위에 소홀하였던가? 전연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보다도 신앙 행위에 있어서는 철저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있어서 이 ‘오직 은혜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가르침은 그 역사적 상황을 무시함으로 말미암아 매우 잘못된 결과를 낳고 말았다.

남한교회의 타락과 그 원인

지금 남한의 교회들이 비판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기적이고 사회 참여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예배나 기도에는 열심이지만, 윤리·도덕성이 떨어져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비난받지 않는 대형교회들이 없다.

성스캔달, 재정비리, 세습, 교권횡포 등으로 인해 세상은 교회에 등을 돌리고 있다. 주일성수나 십일조헌금과 같은 종교적 실천만을 강조하고 교회 밖의 사회적 약자가 당하는 아픔은 외면하고 있다. 사회구조 악의 문제에는 눈을 감고 있다.

우리는 안식일을 거룩되이 지키라는 주일 성수 명령은 본래 쉴 수 없었던 노예와 가축 곧, 사회적 약자를 위한 계명이었다. 열에 하나를 바치라는 십일조의 계명 또한 과부와 고아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한 계명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계명의 말씀들이 교회성장을 위한 계명으로 잘못 이용되고 있다.

지금 대형교회에 가면 쉽게 접할 수 있는 모습이 무엇인가? 만세! 삼창을 본떠 주여! 삼창을 외치고 나서 집단 통성기도를 시작한다. 두 손을 들고 주여! 주여!를 외치거나 방언기도를 하는 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집단적인 열광 속에서 개인의 스트레스나 울분을 토해내는 일에 너무 익숙해 있다.

예수께서 가르친 기도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도록 하고’ ‘하루치의 양식을 위해’ 그리고 ‘죄를 범한 형제를 용서하라’ 등등이 주 내용이다. 공중석상에서 손을 들고 크게 외치는 기도는 바리새인의 기도라고 비판하셨다. 차라리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테레사 수녀가 미국 TV 방송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댄 래더라는 앵커맨이 ‘당신은 하느님께 기도할 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라고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수녀님은 이렇게 답했다. “저는 듣습니다.”

예상 밖의 대답에 당황한 앵커는 다시 질문을 하였다. “당신이 듣고 있을 때에 하느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러자 수녀님은 답변하기를 “그분도 듣지요.” 남한교회가 깊게 묵상해 보아야 할 예화이다.

작금의 개신교의 성장이 멈추고 감소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지 않을까? 10년 전만 해도 젊은이들이 개신교를 가리켜 ‘개독교,’ 목사를 ‘먹사,’ 평신도를 ‘병신도’라고 조롱하였다. SNS상에 끊임없이 나왔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비난을 찾아보기 힘들다. 비판을 할 때는 그래도 관심이 있었고 염려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관심의 대상에서 사라졌다. 젊은이들의 관심과 참여가 사라진 교회는 미래가 없다. 교회 지도자들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분명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신다. 신앙 훈련이나 사회 실천과 같은 자속 신앙이 없이 통성기도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에 의지하여 구원받으려는 대속 신앙은 한 때 많은 사람들이 마치 밀물이 밀려들어오듯 쉽게 교회에 들어올 수 있는 동기가 되었지만, 지금은 교회 타락을 제공하는 원인이 되었고 교인들이 교회에 실망하고 떠나가는 주된 이유가 되고 말았다.

지금도 많은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힘입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예수의 피에 대한 설교도 많이 하고 보혈의 찬송을 많이 부르고 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십자가 고난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밀양’이라는 영화에서도 지적이 되었지만, 정작 피해자는 아직 용서를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데, 가해자는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고 말한다. 좁은 길 신앙은 없어지고, 고난의 십자가는 예수님이 다 지고 갔으니 넓은 길을 편안하게 걸어가면 된다는 식으로 오해하고 있다. 대속신앙에 일방적으로 기울어져 있는 신앙의 추를 자속신앙으로 옮겨 신앙의 균형을 맞추어야 할 때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과 류영모

대속신앙의 대표적인 성서 구절은 요한복음 3장 16절이다.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함을 얻을 것이다.” 100년 전 조선교회는 이 말씀 하나에 근거해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 어렸을 때, 교회에 가면 자주 부르던 노래가 바로 이 말씀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유명했던 류영모 선생과 김교신 선생은 신앙의 길에 있어 약간 차이가 있다. 김교신 선생은 정통신앙을 유지했고, 류영모 선생은 매우 폭넓은 신앙관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류영모 선생은 김교신 선생이 주관하는 성서연구회 모임에 참여하면서도 어느 한계를 넘는 말은 일절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김교신의 간청에 못 이겨 성서연구회 모임에서 요한복음 3장 16절을 풀이하였는데, 아니다 다를까 류영모가 예상한 대로 모두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져서 웅성거렸다. 이 장면을 김교신은 일기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류영모 선생의 독특한 요한복음관을 듣고 일동의 논의가 분분했다. 류 선생은 특이한 해석을 갖고 계시다. 남의 신앙을 동요시킬까 염려하여 자기의 성서관을 쉽게 공표하지 않는 터인데 수년 동안의 간청에 의해 금일 요한복음 3장 16절을 설명하시니 처음 듣는 이들이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다석 유영모, 박영호, 두레, 67-68쪽)

그날 그 자리에 함께 했던 류달영 선생이 그 내용을 이렇게 기록하여 놓았다.

“1937년 1월 정초 경인선 오류역 근처 송두용 선생 집에서 겨울철 성서연구 모임을 가졌다. 다석은 북한산록 구기리에서 이곳까지 걸어서 왔다. 다석은 그 모임에서 김교신의 간청에 의해 성서말씀을 하게 되었다. 말씀의 내용은 요한복음 3장 16절 해설이었다. 다석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정통을 자처하는 교회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아주 다르다고 말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하느님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했는데, 다석의 생각은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한다는 것이었다. 자기 외아들을 죽이는 하느님이 어떻게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외아들을 죽이는 하느님을 사랑의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은 당치도 않다고 했다. 다석은 말하기를 하느님이 사람에게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하느님이 하느님의 생명(성령)을 사람의 마음속에 넣어 주었다는 것이라고 했다.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자기 안에 하느님의 본성(씨)를 지녔으므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라는 요한1서 3장 9절의 말씀과 상통하는 해석을 하셨다. 사람은 제 마음 속에 하느님의 본성(씨)를 키워서 하느님과 하나되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때 의견이 분분하여 여러 사람들이 질문을 하려고 했는데, 김교신 선생이 이를 막으면서 “다석 선생의 성서풀이는 아주 높은 차원에서 하는 말씀이므로 알아들을 만한 귀를 따로 갖고 듣지 않으면 그 참뜻을 바로 이 자리에서 깨닫기 어려우니 각자 마음에 간직하고 돌아가서 오랫동안 새겨보라고 타일렀다.” 여기서 우리는 류영모 선생이 주장하는 바를 정확히 해석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찌 보면 이는 모두 요한복음의 핵심 주장이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인 것 같이 우리들도 하느님과 하나 되기’를 위해 기도하셨고(17장 22절), 또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14장 12절)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대속신앙이 아닌 이 땅에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자속신앙을 강조한 말씀이다. 다석 류영모 선생은 당시 선교사들이 주도하는 조선교회의 지나친 대속신앙적인 성서해석이 가져올 조선교회의 미래를 그때 이미 예감했다고 본다.

따라서 대속신앙의 대표적 성서 구절인 요한복음 3장 16절을 해석할 때, 그 한 구절에만 매여 좁게 해석할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 전체 맥락에서 해석을 해야 한다. 그리고 3장 16절 이하 말씀인 19절과 20절 말씀을 보더라도 이는 명확하다. 19절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자신들의 행실이 악하여’라고 말함으로 ‘행실’을 강조하고 있고, 20절에서는 “악한 일을 일삼는 자가 빛을 미워하고 멀리 한다”고 말함으로 또한 “악한 일”을 강조하고 있다.

교회가 처음 선교와 전도를 시작할 때, 신앙행위가 강조된 무거운 신앙을 요구하기는 힘들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단순하고 명료한 대속신앙이 효과적이다. 그러나 교회가 성장하고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맡았을 때에는 그 교리나 신학은 이제 맞추어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도록 하는 자속신앙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새 부대에는 새 포도주를 담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오늘 남한교회는 평화통일이라는 민족적이고 세계사적인 과제 앞에 서 있다. 개인영혼 구원이라는 전통교리와 대속신앙에 매여 있어서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

남한교회의 미래를 위해 뼈를 깎는 각고(刻苦)의 노력이 필요하다. ‘예수믿기’를 넘어 ‘예수따르기’와 ‘예수살기’의 신앙에 이르도록 힘써 노력해야 할 것이다.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choshal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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