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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Y 캐슬, 하늘의 움직이지 않는 피라미드 성사건과 신학/스카이 캐슬 (1)
신익상(성공회대학교) | 승인 2019.03.26 20:05

우리의 가장 큰 진짜 문제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안다는 데 있다. 드라마 〈SKY 캐슬〉이 마지막까지 보여준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너무도 잘 안다. 무한경쟁과 승자독식! ― ‘파국민혁’의 거대한 피라미드가 연거푸 떠올리게 만드는, “인간 사회에 사는 한 피라미드 구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라는 “어떤 훌륭한 분”(‘찐찐진희’가 ‘파국민혁’을 가리키는 반신반의어)의 이 말은 ‘극복 불가능한’ 문제다.

1. 도처에 피라미드가 있다

그런데, 그래서 진리다. ‘찐찐진희’와 ‘허리양우’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집요한 질문[을 빙자한 강요]을 던진다. 아들 수찬은 피라미드의 무게중심이 중간 아래 어딘가에 있고, 파라오의 미라도 거기에 있으니 중간쯤에 있는 게 가장 좋은 거 아니냐는 대답[즉시 자리를 피하는 애잔함]으로 이 질문[을 빙자한 강요]에 화답한다.

이 장면으로 대표되는 〈SKY 캐슬〉은 우리 사회가 직면한 극복 불가능한 문제를 확인시켜 준다. 피라미드는 여전히 거기에 있을 것이고, 그러니 꼭대기에 있거나 아니면 중간쯤에서 만족하거나 어쨌든 우리는 피라미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질문도 대답도 이 지점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는다.

▲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한 장면 ⓒJTBC 사진 캡쳐

왜냐하면, 우리는 문제가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피라미드는 모든 질문이 쏟아져 나오고 모든 대답이 한 군데로 모여드는 벗어날 수 없는 전제다. 다 자란 세대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오르고자 하는 삶이 얼마나 고되고 슬픈 일인가를 몸으로 체득한 삶의 현자다.

하지만 이 현자는, 피라미드 외에는 몸소 경험한 것이 없어 피라미드를 떠올리지 않고서 삶의 문제를 생각하지 못하는 피라미드 바보 현자가 되어간다. 아직 자라나는 세대는, 피라미드 바보에 의해 길러지면서, 피라미드 바깥으로 나가볼 기회를 박탈당한 채 피라미드 내부를 배회한다. 그러다 보면 자라나는 세대의 인생 종착지 역시 피라미드 바보 현자다. 말하자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피라미드 ‘속에’ 던져진다.

2. 피라미드 문제 풀기

거의 누구도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피라미드가 정답인 세상에서 어떻게 피라미드 문제를 풀 수 있을까? 그런데 문제는, 문제를 잘못 파악하고도 제대로 파악한 것이라고 믿을 때 발생할 수 있다.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이 그런 예다.

얼마 전 핀란드 정부는 지난 2년간 실업자 2천 명에게 매달 560유로(약 70만 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했다. 이렇게 기본소득을 실험한 핀란드는 기본소득이 실업자들의 행복도는 높였으나 고용을 유발하지는 못했다는 결과를 발표하면서 이 실험이 사실상 실패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생산 효율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지만, 반대로 취업률은 곤두박질치고 있다는 문제를 기본소득이라는 방식으로 풀어본 결과였다.

하지만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은 문제를 잘못 해석했고, 그래서 결론도 잘못 내려지고 말았다. 생산 효율성이 기계에 의해 높아지는 상황에서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 노동력이 생산에서 갈수록 덜 필요해진다는 사실이지 인간 노동력이 저평가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따라서 기본소득은 고용을 증대하기 위해 주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노동이 갈수록 덜 필요한 시대에도 인간이 최소한의 품위를 가지고 자기실현을 할 수 있도록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은 문제의 핵심이 고용창출이 아닌 인간 삶의 지속가능성에 있다는 점을 놓쳤다.

기본소득이 실업률에 대한 답이 아니라 행복도에 대한 답이었듯이, 자라나는 세대가 정말로 원하는 삶은 피라미드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과 관계가 없는 다른 차원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피라미드 바보의 세상이다. 우리는 “힘은, 아빠, 내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보다 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뭘 위해 사는지, 그게 선명할 때, 그게 뚜렷할 때 나오는 거 아니에요?”라는 우주의 말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러한 앎이 피라미드 구조 안에서 작동하긴 힘들다는 체념은 더욱 강하다.

다 자란 세대는 경쟁적인 교육제도와 이러한 교육제도를 조장하는 우리 사회의 이기적인 경쟁구조, 존중하고 존중받는 사회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올라가야 하는 고단한 사회, 경쟁을 빌미로 서로를 이용하고 배신하는 사회를 고쳐야 한다는 생각이 아주 멀리 있는 안드로메다의 이상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강남에 입시 코디네이터가 있다면, 이제 우리 동네도 입시 코디네이터가 있어야 하는 것이 더 현실이다. 결국, 드라마 〈SKY 캐슬>은 우리의 현실 문제를 적나라하고 섬세하게 파헤침으로써 이 문제를 다시 견딜 힘을 주는 또 하나의 갈등 완화제 역할을 하고 만 것은 아닐까? SKY 캐슬은 여전히 하늘 위에 견고하게 떠 있는 움직이지 않는 피라미드 성이다.

3. 종말이냐, 메시아냐?

그럼, 교회는 피라미드 문제를 풀 묘안을 가지고 있을까? 다행히도 있는 것 같다. 매주 수많은 교회에서 제시해주는 정답, 다름 아닌 ‘종말’이다. 이 피라미드 세상이 조만간, 아니면 언젠간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올 거라는 얘기다.

정말로 기대되는 세상 아닌가? 신실한 신자들은 신앙의 진정성을 가지고 하늘의 움직이지 않는 성 앞에서 탄식하듯 읊조린다. “주여, 어서 오소서!” 이 피라미드 세상을 끝장 내달라는 하소연은 그 이후에 누리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간절한 기대와 맞물려 있다. 하지만, 그러면 “만사 OK”인가? 무언가 석연찮다. 무언가 캥긴다. 뭘까?

사실, 하늘의 저 움직이지 않는 피라미드 성은 그 성에 입성하거나 적어도 그 성을 향해 한 걸음이라도 더 내딛으려는 간절한 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아닌가? 그런 마음이 여러 사람의 마음이 되고, 그 마음이 모여 사회 제도를 만들고, 그 제도에 따라 열정과 창의성을 발휘한 결과, 저 피라미드 성이 요지부동으로 강화되어온 것 아닌가? 그렇다면, 저 피라미드 성이 마지막 때에 무너져내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면 충분할까? 혹시, 피라미드 바보인 사람들이 그대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면, 그 하늘과 그 땅 위에 새 피라미드 성이 건설될 수도 있는 건 아닌가?

“주여, 어서 오소서!” 하는 탄식의 하소연은 이 세상이 끝장나는 종말의 때를 부르는 소리여서는 안 된다. 이 세상이 끝장나기 전,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끝장나고 새 마음이 시작되는, 종말 바로 직전을 부르는 소리여야 한다. 마음이 준비되지 않고서야, 제아무리 신의 나라가 와도 소용없다.

메시아, 우리의 구세주는 종말이 이르기 전에 ‘어서 오셔야 한다.’ 생전 예수는 신의 제국이 들이닥친다는 선언 앞에서 마음의 근본적[급진적] 변화, 곧 metanoia(change of mind)를 요구하셨다. 그분께서 다시 오시는 날은, 우리네 마음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맞추어 뿌리부터 변화하고, 그 변화에 합당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준비되는, 종말 직전의 순간, 메시아적 순간이다. 하늘의 움직이지 않는 성을 만들어낸 우리 마음과 마음의 이음매가 허물어지고, 피라미드 안에서 바깥으로 한 걸음 내디딜 용기가 용솟음치는 순간이다.

교회는 피라미드 바보들의 마음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기대 뒤에 숨겨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네 마음을 음지에서 끌어내어 양지에 펼쳐놓아야 한다. 현실에서 피라미드를 오르는 경쟁적인 삶을 꿈꾸며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 신앙심의 모순을 들추어내야 한다.

어쩌면 하늘의 저 움직이지 않는 피라미드 성은, 교회에 또 하나의 시험대인지도 모르겠다. ‘종말’이라는 멋진 어휘 뒤에 숨어있느냐, 아니면 ‘메시아’라는 더 멋진 이의 마음을 따라 변화하느냐. 한국 교회는 어느 쪽일까? 나는, 어느 쪽일까?

신익상(성공회대학교)  kncc@knc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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