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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가 무너뜨리고 교회가 다시 세운 것하나됨의 십자가(엡 2:12-13)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19.03.31 17:36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저희는 예수님으로부터 초대 교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의 의미가 어떻게 받아들여졌고, 변화되어 왔는지를 계속 살펴보고 또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마태복음을 통해서 복음서를 기록했던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옛 시대의 종말을 의미하고, 하나님 나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미 시작되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새로운 세계의 백성,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서 새로운 시대를 전해나갈 사명을 갖게 되었다는 말씀까지 드렸습니다.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오늘은 에베소서의 말씀을 통해서 초대교회의 십자가에 대한 생각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약간 의아하게 생각하실 분도 계시리라고 봅니다. 순서상 바울서신은 이미 2주전에 살펴봤는데, 또 바울서신을 가지고 교회의 이야기를 한다는 점이 이상하다고 느끼실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신약성경에 있는 13권의 바울서신 중에서 7권은 실제 사도 바울이 기록한 진정서신이라고 부르고, 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이렇게 6권은 실제로 사도 바울이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사도 바울의 이름을 차용한 교회의 창작물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를 제2바울서신, 후대바울서신이라고 부릅니다.

보수적인 학자들이나 교회에서는 13권 모두 사도 바울이 쓴 편지가 맞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 제2바울서신들은 굳이 신학적인 이유들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읽어보면 진정바울서신이라고 불리는 서신들과는 약간 글의 느낌이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2바울서신이 가짜라던가, 잘못된 서신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나 골로새서 등의 전체를 기록하진 않았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그 교회들에 편지를 보냈을 가능성은 보내지 않았을 가능성보다 훨씬 높습니다. 그렇기에 제2바울서신은 바울이 쓴 편지를 바탕으로 교회의 생각을 녹여낸 책일 수도 있습니다. 완전한 창작물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기초로 교회의 상황에 맞게 수정했다고 보는 편이 좋을 듯 합니다. 사실 이에 대한 정확한 해답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교회는 누군가 한 명의 권위를 높이려고 노력해왔고, 바울서신은 모두 사도 바울이 썼다고 반발하는 일도, 사도 바울이 쓰지 않고 사도 바울의 이름을 빌린 일반 교회 공동체의 기록이라고 말한다면, 마치 사도 바울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왔습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서도 네 명의 저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기록했다고 말해야지만 대단히 권위가 있는 책인양 생각합니다. 하지만 구약성경도, 신약성경도 모두 어떤 상황에서 기록되었건 성도님들, 믿는 사람들을 위해 기록된 책들입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들을 위해 기록되었다함은 성경이 저자 개인의 산물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의지와 사상이 함께 반영된 공동의 산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비록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로 내려주신 책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듣는 사람들의 상황에 맞게,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로 말씀을 주셨음은 오히려 자명합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저자 개인의 것, 하나님의 계시로만 단정할 수 없습니다. 듣는 사람들, 말씀을 읽는 사람들이 함께 고려되었고, 그들의 상황이 반영된 공동의 책입니다.

이방인이 계약 안으로

서론이 길었습니다만, 그런 이유로 에베소서의 십자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에베소서는 분명 이방인 선교 대상자들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에베소서는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혐오와 차별, 구원의 가능성마저 다 허물어뜨리셨습니다. ⓒGetty Image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에서 ‘너희’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입니다. 11절을 보면 정확하게 나옵니다. ‘너희는 육체로는 이방인’이고 ‘할례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이스라엘 밖에 있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약속과는 멀리 떨어진 사람들입니다.

에베소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이러한 경계가 무너져버렸다고 말합니다. 14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본문에 나타난 ‘둘’은 유대인과 이방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허물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왜 이방인과 유대인의 경계를 허무는 사건이 되었을까? 그 대답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죄인의 문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1절과 12절에 나타나는 이방인에 대한 설명은 결국 ‘죄인’에 대한 설명입니다. ‘할례 받지 않은 무리’,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 외인’, ‘세상 속에서 소망이 없는 자’, ‘하나님도 없는 자’, 이러한 설명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표현으로 말하자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이러한 사람들, 구원과 동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죄인입니다. 저희는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 누군가를 죄인으로 만드는 사회의 체계를 깨뜨리셨음을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도 예수님의 이러한 인식을 이어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에베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서가 사도 바울의 생각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초대 교회에서 십자가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생각은 죄인을 규정하는 체계가 이제 사라지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이방인도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기존 율법의 붕괴를 의미할 수도 있으며, 마태복음에서 보았던 새로운 세계로의 변화, 종말이라는 사상과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깨어진 율법

율법의 붕괴, 어쩌면 지금의 기독교가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바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새로운 율법, 사랑의 법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유대교가 가지고 있는 법, 모세를 통해 받았던 율법은 의미가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서 나오는 15절에 보면,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서신들을 통해서 자주 봐왔던 말입니다. ‘율법 폐기’에 관한 내용들은 또 이런 말씀들과 연결됩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율법이 폐기되고 행위로 구원을 받는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는 믿음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지금까지도 많은 교회에서 전하고 있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의아함을 품게 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 2:10)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데, 바로 이어지는 말씀은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하여’ 지어졌다고 말합니다. ‘선한 일’은 결국 행위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반절은 ‘우리로 그 가운데서, 하나님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말합니다. 이 역시도 우리가 행위를 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율법이 폐기 되었고, 행위를 통한 구원은 없는데, 왜 그런 말을 한 직후에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사실 율법의 붕괴는 율법의 폐기와 동일한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신약성경에서 처음 나온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구약성경에서 먼저 나타난 이야기입니다.

새언약에 대한 말씀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레미야 31장에도 나옵니다. 예레미야 31장 31-33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통해 때가 이르면, 율법을 깨뜨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초대교회는 ‘이때’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법은 깨어집니다. 왜 율법을 깨십니까? 32절에 그 설명이 나옵니다. 율법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돌판에 새겨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고 새로운 법을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하지만 이번에 주시는 법은 돌판에 새겨주시지 않습니다. 33절에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해서 기존의 율법은 강제성을 지녔고 새로운 율법은 마음에 새겨진 율법이기에 자율성을 지녔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마음에 법을 새기는 일 자체도 일종의 강제적인 행위라고 생각되기는 합니다.

하나님 안으로

초대교회는 분명 기존의 강제적인 율법,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율법은 깨어졌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분명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개념 속에서는 아무리 마음속에 법을 새긴다고 해도 사람이 자율적으로 바르게 법을 지키며 선한 행위에 이르게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리스 철학의 개념을 가져옵니다. 영적인 일치, 합일이라는 사상을 가져옵니다. 이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됨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이것이 영성입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에도 이런 편린이 보이기는 합니다만, 그리스 철학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람은 2세기 초반, 100-150년경에 활동했던 유스티누스, 조금 익숙한 표현으로 말하자면, 순교자 저스틴입니다. 그는 그리스 철학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유스티누스보다 한 발 더 나아가서 그리스 철학을 완전히 수용한 사람이 150년 이후에 활동했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율법을 주셨다면 그리스인에게는 철학을 주셨다.” 철학도 구원으로 향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종교다원주의의 창시자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클레멘트는 철학으로 어느 정도까지는 다가갈 수 있어도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통해서만 진리에 도달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율법이 돌판에 새겨지던 마음에 새겨지던, 사람은 죄를 향한 욕망을 품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이 사라지는 길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되는 길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뜬금없이 초대교회의 교부 이야기를 하는듯 합니다만, 에베소서에서도 그런 말씀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2장 18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서, 하나의 성령을 얻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2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처소,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그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들이 그리스 철학을 성경 해석에 가져온 이유는 더욱 다양합니다. 하지만 초대교회는 유대인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님 안으로 나아감을 그리스 철학을 통해 알게 되었고, 이를 성도들에게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됨으로 더 이상 죄에 머무르지 않고, 헛된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더 이상 돌판에 새겨진 율법을 필요로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행위의 강조는 필요치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된 평안을 얻은 사람들은 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하나된 사람들은, 악한 길로 갈 이유도 없고, 악한 일을 행할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기에 예수님의 선한 행동만을 따라 살아가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화해와 하나됨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새로운 언약을 이 땅에 만드셨습니다. 그 언약은 누군가를 죄인으로 만드는 언약도 아니고, 마음에 새겨놓았다는 말로만 끝낼 수 있는 언약도 아닙니다. 그저 당연하게 지킬 수 있는, 그저 당연하게 선한 일만을 행하며 살게 되는 언약입니다.

우리가 이를 알고만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옛 율법에 매여있는 사람들입니다. 아직도 ‘언약에 대한 외인’이며, ‘세상 속에서 소망이 없는 자’, ‘하나님도 없는 자’입니다. 알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이를 마음에 품고 노력해서 변화되어야 합니다.

정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간구하고, 내 마음이, 내 삶이 변화되기를 바라며, 우리의 생활 속에서 조금씩 변하고자 노력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성령으로 묶어주실 것이고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루게 될 것이며, 하나님 안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이를 이루기 위한 첫걸음으로 성도들간의 화해와 하나됨을 말합니다. 성도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을 때, 하나의 성전, 하나의 교회를 이루게 되고, 이 교회는 교회의 몸 되시는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과 하나 된 교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가 됩니다.

그리고 그곳, 하나된 교회에서 여러분들이 얻게 되실 것은 참된 평안입니다. 에베소서 2장 17-18절입니다.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먼저 하나의 교회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함께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믿는 성도님들을 생각하시고 사랑하시며 아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의 교회를 이루시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시길 바랍니다. 참된 평안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여러분께서 누리시는 평안을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꿈꾸던 세상, 참된 하나님 나라가 그곳에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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