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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얼 사상 - 다석 류영모(4)조선교회의 뿌리를 찾아서(8)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 승인 2019.04.06 18:52

이번 글이 다석 류영모 선생에 관련한 네번째이다. 워낙 방대한 사상이라 1년을 계속한다 해도 끝이 나질 않겠지만, 중요한 얘기들이 많아 다섯 번까지 할 예정이다.

우리 말과 ‘얼’

“우리의 숨은 목숨인데 이렇게 할딱할딱 숨을 쉬어야 사는 생명은 참 생명이 아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숨쉬는 얼생명이 참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면 코로 숨쉬지 않아도 끊어지지 않는 얼숨이 있을 것이다. 내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제나는 소용이 없다. 숨 안 쉬면 끊어지는 이 목숨은 가짜 생명이다. 하느님의 성령인 말숨(말씀)을 숨쉬지 못하면 사람이라 하기 어렵다. 하느님이 보내는 성령인 얼나가 참나다. 하느님 아들 예수는 얼나인 영원한 생명이다.”

이 짧은 글 속에 다석 류영모 선생이 즐겨 쓰던 ‘얼’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온다. 얼생명 얼숨 얼나. ‘성령’이라는 한자어를 순수 우리말로 옮긴 단어가 ‘얼’이다.

▲ 구기동 집 주변을 산책하는 다석의 모습(1970년도, 80세) ⓒ다석사상 연구회

요한복음 4장 24절의 ‘하느님은 영이시다’라는 말을 다석은 ‘하느님은 얼이시다’로 바꿔 말한다. 하늘나라 또한 ‘얼나라’라고 말한다. 얼은 썩어 없어질 몸의 반대어이며 영원함을 상징한다.

요한 1서 3장 9절의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씨(sperma, 그리스)가 그 사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씀에서 나오는 ‘하느님의 씨,’ 곧 하느님을 알게 하고 자라서 하느님과 하나되게 하는 것도 얼이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가운데, 얼이 빠지다, 얼얼하다는 말이 있다. 얼이 빠지다라는 말은 갑작스런 충격으로 멍청해져서 생각의 알맹이가 없이 정신없이 이소리 저소리 횡설수설하는 경우를 말한다.

반면 얼얼하다는 말은 문자의 뜻으로 보면 얼이 가득 찬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의 쓰임새를 보면 얼이 빠진 경우와 비슷하여 넘어져 몸의 어딘가가 부딪혀 부어올라 신경이 둔하게 될 때, 얼얼하다고 말한다. 생각이 분명하지 못할 때, 머리가 얼얼하다고 말한다.

본래는 좋은 말인데, 실제는 부정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사실 얼이 하나만 들어와도 우리가 감당하기 힘들거늘 두 개나 들어왔으니 감당치 못할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우리가락을 들을 때에 흥이 나서 외치는 추임새 중의 하나인 ‘얼쑤,’ ‘얼씨구 좋다’도 얼이 넘치는 상태 곧 너무 흥겨워 ‘신’이 춤추는 상태를 표현한 말이다. 좀 거친 표현을 쓴다면 너무 좋아 자신의 똥집이 들썩들썩 거릴 때를 말한다.

얼굴이라는 단어 또한 다석은 이를 ‘얼+골’ 곧 얼의 ‘골자구니’에서 나온 말로 설명한다.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얼이 지나온 모습을 볼 수 있다. 깊게 파인 주름에서 인생의 험한 골짜기를 엿볼 수 있고, 눈가를 스치는 여유있는 미소에서 인생의 넉넉한 골짜기를 맛볼 수 있다. 예수님 또한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얼굴을 얼의 골자구니로 풀이한 것은 참으로 깊은 통찰에서 나온 매우 독창적인 해석이다.

어른과 어린이라는 단어 또한 ‘얼이 온전한 사람’에서 나온 말로 해석한다. “사람이 나이 먹고 시집 장가간다고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성령으로 얼과 얼이 얼려야 어른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본래 우리말에 상대방을 높이는 말에 ‘언님’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또한 ‘얼님’ ‘얼을 가진 님’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요즘은 식당이나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분을 향해 ‘언니’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 근본을 알면 쉽게 사용해서는 안될 말이다.

얼은 알과도 그 뜻이 통한다. 알의 껍데기는 그 생명이 나오고 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와 같이 우리 몸도 마찬가지다. 몸 혹은 맘은 모두 얼이 나올 때까지만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얼은 곧 태초에 야훼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부어주신 당신의 숨길, 숨바람, 곧 성령이다. 구원이란 바로 이 얼을 찾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 또한 같은 의미이다. 물은 과거의 죄를 씻어내는 역할을 하고 비어낸 몸을 새롭게 하는 역할은 성령이 담당한다.

남한교회의 일반 성령이해

성령은 우선 하느님 예수와 더불어 동등한 인격체이다. 이 세 분이 하시는 역할은 다르지만, 이 세분은 한 분이시다라는 것이 기독교 교리신학이 주창하는 삼위일체론의 핵심이자 남한교회가 매 예배 때마다 반복하는 사도신조가 만들어진 이유이다. 그 이전에 만들어진 니케아신조가 있는데 그 내용이 사도신조와 거의 비슷하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또 다시 사도신조를 새롭게 고백한 이유는 성령님을 하느님이나 예수님보다 하위에 두려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지금도 성령운동을 하는 교회를 가보면 강단에 선 목사들이 성령을 받으라고 말하면서 쉿! 쉿! 하는 목쉰 소리를 낸다. 때로는 손을 펴서 성령을 나눠주는 시늉을 하기도 한다. 마치 성령은 부흥목사의 주머니 속에 있다가 그 목사의 명령에 따라 왔다갔다하는 것 같다.

이는 참 성령의 모습이 아니다. 한 인간의 명령에 따라 왔다갔다하는 영이라면 그건 하느님의 거룩하신 영, 성령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유혹하는 사탄의 영에 불과하다. 이 영이 때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거품을 내며 넘어뜨리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이런 일들은 최면사들도 하고 무당들도 하는 일이다. 오히려 무녀나 무당들은 접신을 하면 날이 시퍼렇게 날이 선 작두 위를 맨발로 걷기도 한다. 그러나 성령파 부흥사들이 날이 선 작두 위를 맨발로 걸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초자연적인 기적 사건에만 관련지어 성령의 역사를 말하면 기독교가 뛰어날 것이 하나도 없다.

남한교회는 그 선교 역사가 짧아 성령하면 방언과 치유 기적만을 떠올리는 성령 은사주의에 너무나 깊이 빠져 있다. 사도 바울로가 쓴 여러 편지를 종합하면 성령의 은사는 방언과 치유 기적만 있는 것이 아니다.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장 에베소서 4장 등에 기록되어 있는 은사들을 보면, 거기에는 지도하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지혜, 지식, 권면, 방언, 통역, 치유, 예언, 전도, 섬김, 자선, 영분별 등등 30가지가 넘는다.

오히려 바울로는 방언의 은사나 치유의 은사를 여러 은사 중 하위에 속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남한의 많은 교회들은 이 낮은 은사에만 매달려 있다. 바울로가 말하는 최고의 은사는 무엇인가? 그의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은 바로 12장의 은사장 다음에 나온다. 여러 은사를 말하고 나서 이렇게 묻는다.

“여러분 모두가 사도일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기적을 행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병 고치는 능력을 받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이상한 언어를 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은 더 큰 은총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그것은 사랑의 은사입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로 선생이 이렇게 신신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을 감추는 사랑의 은사보다는 자신을 드러내주는 방언과 치유의 은사에 더 관심한다. 그래 남한교회에서 성령은 방언과 치유 기적이라는 신비주의와 광신주의의 산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저는 이 글을 통해 교권과 광신주의에 갇혀 버린 성령님을 해방시키기를 원한다. 본래의 자유하는 영으로 되살아나 오늘 여러분의 현실의 삶 속에서 이 땅의 탐욕을 줄이는 영원에 대한 소망과 경쟁이 가져오는 죽음의 권세를 누르는 부활의 능력을 되찾기를 고대한다.

성령은 생명의 근원

성서가 말하는 성령님은 ‘생명을 낳게 하는 분’으로 말해진다. 제1성서에서는 성령을 히브리어로 루아흐!라 말하고 제2성서에서는 그리스어로 프뉴마로 말한다. 창세기 1장에서 야훼 하느님은 흙으로부터 인간을 빗은 후에 그 코에 당신의 입김 루아흐!를 불어넣으시어 살아있는 생명체로 만드신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성령 프뉴마는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하시어 새롭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히브리어 루아흐나 그리스어 프뉴마는 모두 성령으로 번역되지만 동시에 문맥에 따라 바람으로도 번역된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변화의 힘을 동반한다. 특히 요한은 단어의 이러한 단어의 이중적인 의미를 이용한 엇갈리는 대화를 좋아한다.

그리스어 ‘ana’라는 부사는 ‘다시’와 ‘위로부터’라는 두 가지의 뜻을 갖고 있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나야 한다고 하는 질적 태어남을 말하고 있는데, 이를 니고데모는 두 번 태어나야 한다고 하는 그래서 어머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나오는 양적 의미로 이해하고 있어 대화가 엇갈리고 있다.
  
다석 류영모는 어머니 배에서 나온 나는 참나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 생명은 가짜 생명인 몸나입니다. 우리는 참 생명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일이 참나를 찾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는 참나가 들어갑니다. 어머니 배에서 나온 것은 참나가 아니고 속알(德)의 나, 성령의 나가 참나입니다. 우주와 지구를 통째로 싸고 있는 호연지기(浩然之氣)의 나가 참나입니다. 죽으면 흙 한줌 재 한 줌이 되는 몸뚱이는 참나가 아닙니다.”

다석은 ‘나’라는 단어를 이용한 여러 가지의 우리 말을 만들었는데, 육신적인 인간을 말할 때는 ‘몸나’ 혹은 제 것이라는 의미에서 ‘제나’로, 성령으로 거듭난 인간은 ‘얼나’ 혹은 참된 모습의 인간이라는 ‘참나’로, 몸나 혹은 제나에서 얼나 혹은 참나를 체험하는 인간은 ‘솟나’로 말한다.

요한복음에서의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는 다석의 용어로 말하면 제나 혹은 몸나가 얼나 혹은 참나로 거듭나는 솟나의 과정에 대한 것이다. 니고데모는 예수가 뛰어난 랍비인 것은 알았지만,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솟난 하느님의 아들인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래 둘 사이의 대화는 거기서 그렇게 끝난다.

그러나 이후 니고데모는 이 예수의 말씀을 곱씹고 곱씹어서 숨은 제자로 남아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예수를 변호하기도 하고 십자가 처형 후 예수의 시신에 바를 향유를 들고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처음에는 니고데모만 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가까이 따라다니던 사람들도 몰랐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떡을 얻어먹자 예수를 저들의 세상 왕으로 받들고자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저들을 피하신다. 예수님은 육신의 떡을 통해 영원의 떡을 주고자 했지만, 예수의 참 뜻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자꾸만 좇아오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여 온 살아있는 떡이다. 이 떡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떡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6장 51절)

그러자 사람들은 그만 이 ‘살’이라는 단어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마치 식인종이라도 되어야 한다는 말로 오해하고는 말이 어렵다고 수군거리고는 다들 떠나간다.(6장 66절) 다만 베드로는 뭔가 어렴풋이 짐작을 했다.

그래서 예수께서 너희도 떠나가겠느냐고 물었을 때에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고 답한다.(요한 6장 68-69)
  
예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아니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셨다. 여기서 하느님 나라란 우리가 죽은 후에 가는 어떤 저 하늘 저편에 있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주기도에 있는 것과 같이 이 땅에 임하는 나라를 의미한다. 사도 바울로가 말한바와 같이 육체를 따라 사는 죄와 죽음의 법에서 벗어나 생명과 평화의 성령을 따라 사는 그 나라가 하느님의 나라인 것이다.

그래서 저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난 사람이란 다름 아닌 인간의 욕망으로 얼룩진 이 땅의 오욕의 역사 속에서 움틀거리는 공의와 생명과 평화의 하느님 나라 역사의 소리를 듣고 이에 응답하는 사람을 말한다고 믿는다. 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솟나를 경험한 얼나의 사람은 작게는 사람을 바라볼 때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우릴 줄 아는 사람이요 크게는 하느님의 백성들인 씨알이 주인되는 민의 역사를 믿고 하루하루를 희망의 투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제주4.3 항쟁에서 있었던 이야기 하나를 전해들이고 오늘 이야기를 마치고자 한다. 제주4.3항쟁사건(濟州四三事件)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30만 전체 도민 중 거의 십분지 일에 해당하는 3만명이 살해당한 사건이며 이중 3분지 1이 여성, 어린이, 노인들이었다. 한마디로 골육상잔인 한국전쟁의 축소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초기에 합의에 의해 소수의 희생자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일이지만,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북에서 내려온 기독청년단과 미군정과 하수인 이승만정권이 손을 잡고 빨갱이 이념 논쟁을 벌려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 죽인 대학살사건이다. 왜냐하면 당시 미군정이 파악한 남한 사람들의 이념은 70% 이상이 남의 자본주의보다는 북의 사회공산주의 제제를 더 원하고 있었기에 친북 빨갱이 이념 논쟁을 벌일 필요가 있었다. 이미 미국에서도 이러한 논쟁으로 정적들을 감옥에 가둔 맥카시논쟁이 있었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당시 한 달 만에 무려 6천명을 체포하는 대규모 토벌작전을 벌인 경비대장 박진경을 암살한 기독교인 문상길 중위의 법정에서의 마지막 증언입니다.

“22살의 나이를 마지막으로 나 문상길은 저 세상으로 떠나갑니다. 여러분은 한국의 군대입니다. 매국노(이승만)의 단독 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 하에 한국 민족을 학살하는 한국 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염원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헤어져 떠나갈 사람의 마지막 바람을 잊지 말아 주십시요.
이 법정은 미군정의 법정이며 미 군정장관의 딘 장군의 총애를 받던 박진경 대령의 살해범을 재판하는 인간들로 구성된 법정이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 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 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하여서는 공감을 가질 줄로 안다. 우리에게 총살형을 선고하는 데 대하여 민족적인 양심으로 대단히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다. 이 법정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안심하기 바란다. 박진경 연대장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갔고, 수일 후에는 우리도 간다. 그리고 재판장 이하 전원도 저 세상에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 세상 하느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해도 하느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그러니 재판장은 장차 하느님의 법정에서 다시 재판하여 주기를 부탁한다.”

류영모 선생이 말하는 몸나와 제나라는 세상 생명을 넘어 하늘 얼나에서 부활 솟나로 살아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choshal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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