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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제에서 희생제로순교의 길까지(마 16:24-25)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19.04.07 17:35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순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올해 사순절 기간 동안 저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십자가에 달리셨는가? 예수님의 죽음에 가장 가까웠던 사도 바울은 그 십자가 사건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사도 바울 이후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졌고, 어떻게 전했는가? 이에 대해서 4주 동안 말씀을 전해드렸습니다.

오늘은 신약성경보다도 조금 더 뒤의 이야기, 성경 직후 시대의 교회 이야기를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상당히 생소한 이름을 듣게 되실테지만, 그렇게 어려운 이름도 아니고, 초대교회 이야기를 하다보면 종종 나오게 될 이름이기 때문에 오늘 들어두시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폴리캅의 순교 이야기

대략 70년경에서 150년경까지 스미르나, 지금의 터키 이즈미르에서 교회의 주교로 있었던 폴리캅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 관한 내용은 초대 교회에서 활동했던 여러 사람의 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안 나오니까 모르지만, 당시 초대 교회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에 관해서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한 점들도 많이 있지만, 오늘 말씀에서는 어느 정도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아마’, ‘대략’ 이런 표현 없이 확정적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앞서 폴리캅이 70년경에 태어나서 활동했다는 이야기는 그가 예수님의 제자들을 만났을 수도 있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그는 아마도 어린 시절에 예수님의 제자들, 혹은 열 두 제자에는 속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만났던 사도들을 만나서 말씀을 배웠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 그에 대한 기록들에는 ‘사도들의 제자 폴리캅’이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당시에 폴리캅이 유명했던 이유는 그의 삶이 예수님을 따라 살기 위해 노력했던, 참으로 존경 받을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고, 그가 죽은 이후에도 그의 이름이 오르고 내린 이유는 그가 86세의 나이로 장엄하게 순교했기 때문입니다.

폴리캅이 순교한 내용은 「폴리캅 순교록」이라는 책에 담겨서,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책이 지금의 성경에 들어오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순교에 대해 너무도 장엄하고 아름답게 묘사하기 때문에 폴리캅을 예수님과 동일한 위치에 올려놓을 위험이 있었고, 또한 순교를 너무 미화시키지 않으려는 초대 교회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순교 이야기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점이, 로마는 기독교인들을 발견하면 무조건 죽이고 박해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불만을 가졌던 집단은 유대교이고, 로마는 단지 신흥 종교가 생겨나는 일을 꺼려했을 뿐입니다. 기독교가 성장하는게 불편했던 유대교는 기독교인을 발견하면 로마에 신흥 종교라고 고발합니다. 그러면 로마는 그들을 잡아서 재판을 하고, 그들이 신흥 종교라고 인정되면 처형했습니다.

반면에 로마로부터 체포당하지 않기 위해서 다른 지역으로 도망치면 심하게 쫓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고, 재판에서 신흥 종교임이 증명되지 않으면 그들은 풀려나곤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수차례 잡혀서 매는 맞았을지라도 풀려날 수 있었던 이유가, 로마인들이 기독교를 유대교와 다른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너희들 문제는 너희들끼리 처리하라’고 돌려보낸 것입니다. 빌라도가 처음에 예수님을 돌려보낸 이유도 동일합니다.

그런데 폴리캅처럼 유명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로마가 아니라 유대교가 눈에 불을 켜고 쫓아다녔던 것 같습니다. 「폴리캅 순교록」에 보면, 그도 여러차례 도피를 했지만, 어떤 지역에서 노예들이 붙잡히게 되었고, 그들이 폴리캅의 숨은 장소를 말하는 바람에 붙잡히게 됩니다. 폴리캅은 잡히기 전날 밤, 자신의 베게가 불타는 꿈을 꿨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은 화형을 당하게 되리라고 사람들에게 말했고, 그 날 잡혀가게 된 것입니다.

▲ 초대교회 교부 폴리캅을 잡으러 온 로마 병사와 폴리캅의 숨은 장소를 알려준 고발자 ⓒGetty Image

앞서 말씀드렸지만, 당시 폴리캅의 나이가 86세였습니다. 완전히 노인입니다. 폴리캅이 숨은 장소에 그를 잡으러 왔던 사람들도 실제 폴리캅을 보고는 자신들이 이런 노인을 체포하려고 그렇게 애써왔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놀랐다고 합니다.

이때 폴리캅은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식사와 음료를 제공하고, 자신에게 기도할 시간을 허락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는 영에 가득차서 두 시간 동안 기도를 드립니다. 그를 잡으러 왔던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우리가 왜 이렇게 경건한 노인을 잡으러 왔는가 후회했다고도 전해집니다.

재판장에서 재판관은 폴리캅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여든 여섯 해 동안 나는 그분을 섬겼습니다. 그 분은 나에게 어떤 그릇된 행위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구원하신 왕을 어떻게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맹수들을 부르십시오! 우리는 정녕 더 좋은 것에서 더 나쁜 것으로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악한 것에서 의로운 것으로 마음을 바꾸는 것이 더 낫습니다!”(폴리캅 순교록 9, 11)

이렇게 이야기하고 그가 배교하지 않자, 그를 맹수형에 처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맹수형은 이미 그 전에 했기 때문에 굶주린 맹수를 준비할 수 없다는 이유로, 폴리캅이 꿨던 꿈처럼 그는 화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화형에 처해지기 앞서 나무에 묶인 폴리캅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후, 죽게 됩니다. 순교록에는 이 장면이 상당히 신화적으로 미화되어 있지만, 그런 부분까지 사실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폴리캅의 순교 모습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순간을 간접 체험하였기에 이 날을 기념하였습니다. 또한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써서 여러 교회에 전하였습니다. 스미르나 교회가 주도적으로 전파했다기보다, 주변 교회들이 폴리캅의 순교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부탁해왔기 때문에 순교 이야기를 적습니다. 그게 「폴리캅 순교록」입니다.

초대교회의 순교

「폴리캅 순교록」을 통해서 초대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십자가의 의미가 어떤 식으로 변화되었는지를 우리는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희생제사로 이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희생하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다는, 지금의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십자가의 이해와 동일한 생각을 이때부터 시작합니다. 하지만 지금 교회들이 하는 이야기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들이 십자가를 희생제로 생각한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로마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화목제와 연결시킵니다.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될 것이, 화목제는 사람과 하나님이 화해하는 제사가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이 화해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화해의 상징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 교만하다보니까 사람과 하나님이 화해했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개념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지금의 교만한 우리들의 생각 속에서 화목제는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삐지셨으니까 화 좀 푸시라고 하나님께 고기 바치는 일입니다. 이런 제사는 없습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에서 드리는 제사는 속죄제이고 속건죄입니다. 죄의 용서를 구하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지, 하나님과 화해하자고 화목제 드리는 게 아닙니다. 화목제는 사람과 사람의 화해를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화목 제물이 되셨다는 의미는 명확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의인과 죄인을 화해시키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 죄인 취급 받던 사람들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가 하신 말씀, ‘죄인을 더 이상 죄인이라 부르지 않겠다’는 말씀을 믿고 따르며 실천하는 이들은 모두 구원의 길, 의인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나 신약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관점은 유대인적 관점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은 의인이고, 자신들 밖에 있는 이방인이 죄인입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이방인을 초대하는 개념,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개념이 화목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경계를 허무셨기에 화목제물이 되십니다.

반대로 수많은 초대 교회들은 이방 지역에 있었고, 폴리캅을 비롯한 대부분의 초대 교회 교부들과 성도들은 이방인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들과 유대인을 화해시켜주는 의미를 넘어서게 됩니다. 죄인인 자신들의 죄가 사라지게 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너희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선포하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속죄제이고 속건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희생 제물이 되십니다.

폴리캅 시대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로마에 의한 박해와 처형은 그러한 십자가 사건에 동참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속죄를 위한 제물은 더러워서는 안 됩니다. 정결하고 순수한 제물만이 속죄를 위한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말로 선하게 살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정결한 제물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선한 삶을 삽니다.

때로 순교가 마치 영웅적 행위로 생각될 수도 있기 때문에, 순교를 바라는 사람들도 나타났지만, 「폴리캅 순교록」은 오히려 이런 이들을 경계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순교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이와같이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폴리캅 순교록 4)

오히려 책의 서두에 폴리캅이 자신도 주님처럼 죽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기다렸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적습니다.

“이는 우리가 자신의 일뿐만 아니라 이웃에 관련된 일도 돌보면서 폴리캅을 본받는 사람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형제도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이 참되고 변함없는 사랑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폴리캅 순교록 2)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일은 참으로 고귀한 일이기에 분명 성도들은 이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순교를 위해서 한 일은 이웃을 돌보는 일, 형제가 구원 받기를 원하는 일, 참되고 변함없는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일이 그들이 순교 당하기 위해 했던 일입니다.

목숨을 내놓는 일

옛날 초대교회의 성도들, 특히 이방인이 중심이 되었던 교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자신들의 죄를 씻어주신, 희생의 사건, 속죄제로 이해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이 허물어졌음을 이야기할 때, 이방인의 입장에서 나온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십자가 이해에는 당연히 사도 바울의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죄인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 사람들이 악을 행할 수는 있지만, 이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재판정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들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영광은 순교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순교는 아무나 할 수 있지 않습니다. 온 삶을 그리스도를 향하고, 그리스도와 닮은 삶을 살아갈 때, 참된 순교가 가능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 삶의 끝에서야 누군가의 회개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이란 이웃을 돕고, 형제를 사랑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을 여기까지만 읽으면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라는 이야기로만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다음절인 26절에 이런 말씀이 등장합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이 말씀은 목숨이 우리의 모든 소유물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모든 것을 바쳐서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죽으라’는 명령이 아니라 ‘가진 것을 다 바쳐서’ 따르라는 명령입니다.

그렇기에 초대교회 교인들은 그토록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고, 약한 자들을 도왔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가진 것을 다 바쳐서 이웃을 위해 살았습니다.

이쯤에서 지금의 교회들은 어떤가 생각했으면 합니다. 지금의 교회들도 초대교회의 이런 생각을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해주시려 희생 제물이 되셨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하며, 나도 그러한 삶에 동참하고자 하는 목표는 상실한 채, 그저 ‘이제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는 사실에 취해서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도구화 시키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웃’의 의미도 축소 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의 벽을 허무셨는데, 초대교회도 모든 벽을 허물고 이웃을 위해 애썼는데, 지금의 교회는 우리 교인들, 조금 넓게 생각한다면 우리 교단 교인들만 이웃입니다. 나머지는 이웃이 아니니까 막 대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악이라고 규정해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끝까지 복음을 전한다는 사명은 이어 받았으나, 예수님의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은 어딘가로 치워버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의인, 넌 죄인이라는 바리새인적인 율법관을 다시금 꺼내들고 죄인들을 가르치기 위해 복음을 전합니다. 그들의 구원을 바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게 아니라, ‘이 훌륭한 의인께서 너희 죄인들에게 복음을 가르치시고, 무지한 중생들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시겠다.’라는 마음가짐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지금의 교회를 바라본다면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 교회에 순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폴리캅이 죽기 직전에 드린 기도문을 읽어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드린 말씀을 바탕으로 그가 어떤 생각으로 이런 기도를 올렸는지 생각하셨으면 합니다.

“전능하신 주 하나님, 당신께서 사랑하고 복을 주시는 당신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천사들과 권능들과 모든 피조물과 당신 앞에 살고 있는 모든 의인의 하나님이시여, 저를 이 날 이 시간에 합당하다고 여기셨으니 당신을 찬미합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순교자들 가운데에 동참하고, 성령의 불멸 안에서 영혼과 육체가 영원한 삶인 부활을 위하여 당신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거짓이 없으시고 진실하신 하나님, 당신께서 미리 마련하시고 계시하셨으며 지금 이루신대로 오늘 저를 순교자들 가운데 마음에 드는 살진 희생제물로 당신 앞에 받아 주옵소서. 이 때문에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종, 영원한 하늘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에 대해 당신을 찬미하고 찬양하며 당신께 영광을 돌리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과 성령과 함께 당신께 이제와 영원히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지금 우리가 순교할 것은 아니지만, 이 점은 꼭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나는 순교할 자격을 갖춘 성도인가? 하나님께서 나를 합당하다고 여기실만한 성도인가?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 “넌 합당한 성도였다”라는 말씀을 듣기까지 세상에서 선을 행하시고, 사랑을 행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라며, 그런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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