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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신비로운 낭비”살며 묵상하며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19.04.13 17:53
3 그 때에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다.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4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하나이며 장차 예수를 넘겨줄 가룟 유다가 말하였다.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6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는 도둑이어서 돈자루를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것을 훔쳐내곤 하였기 때문이다.) 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8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요한복음 12:3~8 새번역)

1년치 연봉을 향유로 부어 발을 닦는 일과 그 돈으로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 어느 것이 바르고 의로운 일인가? 너무 뻔한 물음 같아 보입니다. 하루를 연명하기조차 어려운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가룟 유다의 손을 들어줄 것입니다. 반면에 마리아의 행위는 누가 봐도 과도한 낭비로 보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막지 않으십니다. 막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특별한 의미까지 부여해 주십니다. 장례에 쓸 것을 미리 사용하는 것이라고. 게다가 자신이 언제나 함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까지.

마리아는 장례를 알고 있었을까? 본문에는 알고 있었다는 어떤 암시도 없습니다. 모르고 행한 일이 살아계실 때 장례의 예를 갖춰드린 상황이 되었습니다. 죽은 동생을 살려주신 주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려도 아깝지 않을 사랑을 받았습니다. 발을 닦아주는 일은 종이 주인을 섬기거나 친구를 닦아주는 사랑의 몸짓입니다. 종처럼, 친구처럼 그렇게라도 벅찬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상상도 못한 의미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자신 앞에 있는 한 사람에게 행하는 작은 몸짓에는 늘 특별한 의미가 담깁니다. 모든 작은 몸짓이 사실은 영원히 한 번뿐인 의미가 됩니다.

▲ Philippe de Champaigne(1602-1674), “Christ in the House of Simon the Pharisee”(1656경) ⓒWikipedia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눈빛으로 포옹할 수 있는 한 사람, 그와 언제나 함께일 수는 없습니다. 매 순간이 마지막일 수 있습니다. 어느 작가는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질 때, 그 마지막 말을 기억해둡니다. 그것이 어쩌면 유언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생생하게 깨어나면, 처음이면서 마지막처럼 다 주고 싶습니다. 그런 생생함은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을 때도 맛봅니다. 마리아는 너무 큰 사랑에 사로잡혀 처음이면서 마지막인 듯 다 드리고 싶었던 것이 아닐지. 그랬다면 십자가의 죽음을 몰라도 그 순간에 마지막을, 영원을 담을 수 있습니다.

모든 판단에는 어떤 기준이 전제 됩니다. 낭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효율적으로 쓰면 의롭고, 한 사람을 위해 쏟아버린 향수는 낭비다? 소수보다 다수에게 효율적으로 사용되지 않으면 낭비라는 전제입니다. 그것을 핑계로 다수를 위해 소수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너무나 자주 정당화되었습니다. 효율과 합리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습니다. 아흔아홉 마리를 위해 한 마리 잃은 양의 희생은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지독한 낭비가 아닙니까? 한 영혼을 우주보다 귀하게 여기고,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은 죄인을 위해 하나님이 죽습니다. 우주와 한 영혼, 하나님과 죄인 비교할 수 없이 한쪽으로 쏠리는 저울의 기울기를 역전시킵니다. 그것이 사랑의 낭비이자 신비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라는 추상적 존재는 언제든 함께 일 수 있습니다. 추상적인 존재를 그리며 사랑하는 일은 어쩌면 너무나 쉽고, 낭만적입니다. 방송에서 뭉클하게 연출된 불쌍한 사람을, 인류를 사랑하기란 쉽습니다. 그러나 살이 맞닿고 호흡이 섞이는 구체적인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전혀 다릅니다. 사랑에 사로잡히지 않는 한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온 인류는 사랑해도 눈앞의 한 사람은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눈앞에 한 사람을 온 우주보다 더 사랑하면, 그때 나머지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의 문이 열립니다. 주님께서 죄인 한 사람을 사랑하시어 모두를 사랑하셨듯이. 또한 나머지 모두에게 행하는 몸짓은 결국 가장 소중한 한 사람에게 가닿습니다.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의 씨알이 숲을 이룹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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