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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임을 부정당한 사람의 이웃으로김상기 목사와 함께 하는 <성서와 위로>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19.04.18 02:47
네가 보기에는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들에게 당한 자의 이웃이 된 것 같냐.(누가복음 10,36)

매우 낯익고 누구라도 아주 손쉽게 답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이토록 분명한 물음지만 그 대답에 따른 책임은 상당히 무겁습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현학적인 질문에 실천적인 답변을 들었으니 율법사는 망치로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나'라고 하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 그에게 '강도들에게 당한 저 사람의 이웃'이라는 말은 생각의 패러다임을 바꾸라는 '혁명적' 요구였을테니, 정신을 가다듬기도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에게만 그럴까요? 귀있는 자만 들을 수 있어서 그저 그런 정도로 흘려버릴 수 있는 이야기일까요?

▲ 빈센트 반 고흐, ‘선한 사마리아인’, 1890, 캔버스에 유채 73×59.5㎝, 크뢸러 뮐러 미술관, 오테를로 ⓒWikiCommons

폭력이 행사되는 곳에서 폭력을 당한 자 편에 선다는 것은 그 폭력에 저항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폭력에 저항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명령하는 예수 앞에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강도들은 누구일까요? 그들에게 죽어가는 자들은 누구인가요?

권력 카르텔! '국익'을 구실로 내세우며 권력을 남용 왜곡하는 정치-경제-언론-종교 권력이 '자주' 강도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구조화된 그 권력의 작동 결과들 가운데 하나는, 그러나 단지 하나가 아니라 가장 큰 폐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악의 구조화이고, 그 수혜자는 언제나 그 권력자들입니다.

그 구조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린 사람들, 그 가운데에는 노동자들이 있고 세월호 304인도 있습니다. 또 여성들, 장애자들, 소수자들, 난민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다는 아닙니다.

그 구조는 차별과 학대와 혐오와 억압을 생산하고 일상화하기에 그 피해자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들 앞에서 불쌍함 곧 연민을 느끼고 행동한다는 것은 그때 '사람이 된다'거나 또는 사람임이 드러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사람임을 부정당한 사람의 사람임이 그러한 공감적 행위에 의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이러한 상호작용이며 하나의 과정입니다. 예수께서는 폭력에 저항하는 이 사랑의 과정으로 우리를 부릅니다.

그 부름에 응답하는 사랑의 오늘이기를. 공감적 행동으로 사람이 되고 '강도당한' 자의 사람임이 회복되는 기쁨 넘치는 이날이기를.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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