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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르담(성모 마리아), 슬피 울다(욥19:23-27; 고전15:1-11; 막15:42-16:8)부활주일(4월21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9.04.19 18:42

1. 십자가 처형

<노트르담 성당에서 화마를 이기고,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안고 있음>

고난주간이 시작된 지난 2019년 4월 15일 저녁(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의 최대 관광명소 중 한 곳이자 역사적 장소인 노트르담 대성당에 큰불이 나, 지붕과 첨탑이 붕괴하는 등 큰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노트르담 성당은 가톨릭 성당으로 주교좌성당 가톨릭 파리 대교구 본당입니다. 프랑스어로 노트르담(Notre-Dame)은 성모 마리아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렇기에 프랑스에는 성모 마리아를 주보성인(主保聖人, 수호성인)으로 하는 성당이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프랑스 고딕 양식 건축물의 대표작이며, 빅토르 위고의 『노틀담의 꼽추』 소설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합니다. 1804년 12월 2일에는 교황 비오 7세가 참석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대관식이 열린 곳이기도 했습니다. 현재 프랑스에 있는 관광지 중 외국인 방문객이 가장 많은 곳입니다. 2012년 기준으로 연간 관광객 수가 1,400만을 넘었습니다. 2위인 루브르 박물관이 연간 방문객 수가 900만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차이입니다. 또한 유럽 내에서도 가장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입니다.
  
대통령 마크롱은 현장이동 전에 트위터에, “매우 슬프다. 우리의 일부가 불탔다.”라고 표현했습니다. 현장 근처에 있던 파리 시민들이 충격을 호소하며 울먹거렸으며 또한 성당이 보이는 곳에서 모여 조용히 성가를 부르며 슬퍼하고 있는 시민들도 있었습니다. 12세기에 건축된 건물로 내부 장식품이 대부분 목조로 돼 있기 때문에 피해가 컸습니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경험이 있죠? 2008년 2월 11일 새벽, 대한민국 국보 1호 숭례문이 불로 무너진 적이 있었죠? 경비 절감으로 무인 경비 시스템을 도입한 후 불이 났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당시 우리 사회의 윤리와 도덕이 무너지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숭례문(崇禮門)은 예를 높이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번 고난주간에 노트르담 대성당이 불탄 것은, 성모 마리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앞에서 슬피 운 것으로 상징적으로 이해가 됩니다.

<숭례문 소실장면(서울신문)>

아무튼 역사적인 보존 가치가 있는 건물이 불타 무너질 때, 우리는 가슴 한 편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건물 하나가 무너지는 것에도 이토록 슬퍼하는데, 한 사람의 죽음에 관해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우리 인류의 아픔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에 찬성하였습니다. 조롱과 멸시, 천대와 침 뱉음뿐이었습니다. 게다가 제자인 가룟 유다의 배반과 수제자인 베드로의 부인으로 그 죽음은 더 비참했습니다. 오직 성모 마리아와 여인들 몇 사람만이 울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형을 당했습니다. 신학자 마르틴 헹엘은 『십자가 처형』 (대한기독교서회, 1982)에서 십자가형에 관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① 형벌로서 십자가형은 고대 세계에서 광범위하게 널리 펴져 있었다. 십자가형은 가장 잔인한 형별이다.
② 십자가형은 정치적, 군사적 범죄에 대한 처형 방법이었다.
③ 십자가형의 사용의 주된 이유는 범죄 예방을 위한 것이다.
④ 동시에 십자가형은 복수에 대한 원초적인 욕망을 만족시켰을 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통치자들, 그리고 대중들의 새디즘(가학적)적인 잔인성을 만족시켰다.
⑤ 처형한 자를 벌거벗겨 눈에 띠는 장소, 네거리, 극장 안, 높은 언덕, 그가 범행한 장소에 공개적으로 진열함으로서, 십자가형은 또한 내면적인 차원에서 처형당한 자의 수치를 드러내준다.
⑥ 십자가형은 처형당한 자를 대부분 매장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처참하게 평가되었다.
⑦ 로마시대에 있어서 십자가형은 무엇보다도 위험스러운 범죄자들과 가장 낮은 계급에게 실시 되었다.
⑧ 십자가에 처형당한 수많은 희생자들의 끝없는 고통에 관한 주제를 비평하거나, 심지어 철학적으로 발전시키는 시도가 없었다. 그만큼 이 십자가형은 잔인하였다.
⑨ 이러한 상황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메시야에 대한 원시 그리스도교들의 메시지는 인간의  잔인성으로 인하여 고문당하고 죽기까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난당한 자들을 하나님의 사랑과 결속 시킨다.
⑩ 바울은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에 대한 메시지의 어리석음을 말했을 때에 그는 수수께끼나 추상적인 부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설교할 때에 부딪힌 어려운 경험과 그로 인하여 야기된 모욕을 그렇게 표현하였다.

로마의 법관 가이오(Gaius Cassius)는 십자가형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테러에 의하지 않고는 저 쓰레기들을 절대로 저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로마 제국에서 십자가형은 로마 제국에 반항하는 자에게 공포심을 줌으로써 효율적인 지배를 하기 위한 테러의 도구였습니다. 그들은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이 십자가 위에 매달린 채로 고통 속에서 죽어가도록 하고, 십자가에 달린 시신을 그냥 내버려 둠으로 그것을 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었습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십자가형이 있었습니다. 로마 시대에 노예 검투사 스팔타쿠스의 반란(기원전 73~71년 경)이 있었습니다. 반란이 실패로 끝나자, 로마는 노예 반란군 6,000명을 십자가형틀에 달았는데 수십 km의 십자가에서 썩어가는 시체 냄새로 로마 남쪽으로 가는 길에는 행인이 없었다고 합니다.

예수님 이후에도 로마는 유대와의 전쟁(66-73년)에서 십자가 처형을 실시합니다. 예루살렘을 함락한 로마의 티투스(Titus)는 예루살렘 성을 포위 한 이후, 자신의 잔인함을 보이기 위하여 성에서 도망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십자가에 달았습니다. 사실 로마는 반항 하는 도시를 서서히 파괴하고 정복된 사람의 의지를 꺾고, 폭동의 무리나 다루기 어려운 지방(유대가 대표적입니다만)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십자가형을 사용했습니다. 티투스는 십자가에 사용할 나무를 구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유대 사람들을 십자가에 달았고, 그 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이토록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오늘 부활주일, 세 본문 말씀은 고난에 대한 불안, 십자가형의 무서움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대로, 말씀대로 잔인한 십자가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에 대한 소망의 말씀을 우리는 바울 사도를 통해서 들을 수 있습니다.

<제주도 새미 은총의 동산의 골고다 언덕길>

2.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욥기만큼 고난에 대한 의미를 잘 설명한 말씀이 없습니다. 본문 19장 말씀은 친구인 빌닷이 욥을 꾸짖는 말인 18장에 대한 욥의 답변입니다. 이 답변에서 욥은 자신을 정죄하는 친구들의 발언에 대해 항의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받는 고난의 출처가 바로 하나님임을 분명히 밝히고,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 고통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철필로 기록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볼까요?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욥 19:23-24).” 그만큼 욥의 고통이 크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고엘)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5-26).” 대속자는 히브리 말로 ‘고엘’입니다. 살인자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을 위해 ‘피의 복수’를 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친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복수나 보복도 해당 되지만, 우리 말 번역처럼 대속자, 혹은 ‘변호인(공동번역)’의 의미도 있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보아스가 룻의 ‘고엘(변호인)’이었으며,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고엘(대속자)’이었습니다. 따라서 욥은 자신을 이 고통 속에서 건져내실 분이 하나님 밖에 없음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26절의 말씀이 조금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오리게네스 이후 많은 주석가들이 이 말씀에서 영생과 부활에 관한 소망을 읽으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공동번역으로 한번 볼까요? “나의 살갗이 뭉그러져 이 살이 질크러진 후에라도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 ‘질크러지다’는 말은 ‘한 부분이 깊이 푹 패어 들어간 상태’를 말합니다. 곧, 살갗의 한 부분이 쑥 들어가 뭉그러져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뵙겠다는 말입니다. 육체 바깥으로 빠져나온 영혼이 자신을 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계속해서 같은 의미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공동번역으로 보겠습니다.

“나는 기어이 이 두 눈으로 (하나님을) 뵙고야 말리라. 내 쪽으로 돌아서신 그를 뵙고야 말리라. 그러나 젖 먹던 힘마저 다 빠지고 말았구나.”(욥 19:27) 왜 나에게 이러한 고통을 주시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욥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기에게로 돌아서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 없이, 까닭 없이 이러한 고통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초조합니다. 공동번역은 젖 먹던 힘마저 다 빠졌다고 번역했지요? 그만큼 욥의 고통이 크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고통 역시 욥의 이러한 고통 못지않았습니다. 우리는 고통 앞에 초조하고, 온 몸에 힘이 빠지는 경험을 합니다(군사정권 시절 고문 당하신 우리 기장 교단의 선배 목회자들의 경험은 십자가 고통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욥은 당대의 의인이었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 것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으로 이어집니다.

3. 무서워하여 아무 말로 못하더라

오늘 본문 신약의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먼저 죽음의 장면입니다.

“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가 오래냐 묻고,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는지라.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막 15:42-47)

이스라엘의 무덤 구조는 대략 여섯 가지 정도 됩니다. ① 단순한 구덩이로 팔레스틴 지방의 초기 무덤의 형태입니다. 시체를 조심스럽게 구덩이에 넣은 것입니다. ② 석관(石棺)은 땅 밑을 파서 그 안쪽을 바르고 구덩이를 돌로 덮어서 마치 상자처럼 되도록 하는 형태입니다. ③ 지하의 묘실(墓室, 무덤)의 경우 석관 형태 보다 더욱 정교하게 지하에 묘실을 만든 것입니다. 연한 암석층에 수직 통로를 만들고 그 밑에 동굴과 같은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초기의 지하 묘실은 둥근 형태로서 대개는 맨 밑에 무덤의 입구를 막는 큰 돌이 있었습니다. ④ 항아리들이 무덤 또는 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크기가 작아, 어른의 구부린 시체 한구 넣을 만합니다. ⑤ 카타콤(catacomb)의 경우, 너무 유명한데 로마 시대에 유행한 것입니다. 무덤이 더 커지고 그 구조도 정교해 짐에 따라 지하 묘지인 카타콤이 생겨났습니다. 복도도 있고, 1구의 시체가 들어갈 만한 방이 여럿 달린 큰 지하 구축물입니다. 각 시체실은 네모진 우묵한 곳으로서 벽돌과 석판으로 봉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⑥ 마지막으로 동굴이 있는데, 이것은 오랫동안 사람들에 의해 무덤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초기에는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혹은 동굴을 인위적으로 파서 만들었습니다. 아무런 장식이나 시체실이 따로 없는 평범한 암굴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점차 정성을 들여 다듬어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대개는 경사진 언덕의 지표 바로 밑에 있는 암석(岩石)을 깎아 만들었습니다. 이런 무덤의 입구에는 돌을 놓거나, 또는 홈을 파 놓아서, 돌을 굴려 무덤을 막을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막 15:46)”라는 말씀으로 보아 예수님의 무덤은 이러한 동굴이었습니다. 아무튼 계속해서 본문 말씀을 살펴볼까요? 장이 바뀝니다. 16장입니다.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막 16:1-7)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여기서 멈춥니다. 따라서 “갈릴리에서 만나자.”라는 말씀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그러나 오늘 세 본문으로 주어진 복음서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막 16:8) 그리고 원래 마가복음은 이 말씀인 16장 8절로 끝났습니다.

따라서 마가복음을 기본 자료로 사용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저자는 아무래도 이러한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들 나름대로 얻은 구전전승과 문서자료를 첨삭하여 서로 조금씩 다른 부활 현현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요한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마가복음도 16장 9-20절 말씀을 보충하여 부활현현과 복음증거, 승천의 사건을 다룹니다. 아마도 이것은 교회가 조직화되어가는 과정에 첨가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첨가의 이유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막 16:14;16)” 때문입니다.

아무튼 마가복음의 마지막 구절에 의하면 부활은 기쁨의 소식이 아닙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분명 한 청년이 “놀라지 말라, 예수께서 살아나셨다”고 말했지만, 여인들은 놀라 떨며 무덤굴에서 나와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무서워서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십자가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아는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조차도 또 다른 고통과 환난의 시작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또 피바람이 불겠구나!” 불의한 로마 권력과 예루살렘 종교 기득권 세력들이 또 어떻게 폭력을 행사할지를 생각하면 무서워서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만, 노트르담, 성모 마리아처럼 슬피 울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고린도 전서 말씀에서 희망을 발견합니다.
 
4. 부활, 죽음을 삼켜버리는 하나님의 힘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1-8)

사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바울이 선포한 복음의 핵심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 그리고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집약하는 상징입니다.

오늘 서신서의 본문 말씀이 고린도 전서죠? 고린도 교회에 분파가 생기고, 자기의 이름을 딴 계파가 생긴 것을 본 바울은 이렇게 꾸짖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고전 1:13)” 이 말은 ‘그리스도’라는 정형화된 명칭 대신, ‘십자가에 달리다’라는 동사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세주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말 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힘없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고통이자, 버림받은 인류의 고통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생명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 사건입니다. 저 로마의 불의한 권력과 저 유대교 제사장과 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 종교 기득권자들 그들이 야합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고 모든 이의 상상력과 세계관을 산산조각 내는 사건입니다. 부활은 죽음을 삼켜버리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나와 너, 공동체와 공동체, 남과 북, 동과 서, 위와 아래의 관계를 찢어놓는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는 힘이 바로 부활의 사건입니다. 그 무시무시한 죽음을 삼켜버리는 부활의 생명력이야말로 기독교의 본질이며 모든 불의한 세력들에 대한 승리의 보장입니다.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김선용 교수는 이렇게 부활 사건을 이야기 합니다.

“시공간에서 일어난 충격적 사건인 빈 채로 발견된 예수의 무덤, 그리고 시공간의 모든 물리법칙을 무너뜨리는 특이점으로 이 세상에 돌입한 하나님의 압도적 힘이 고스란히 드러난 예수의 부활 사건. 이 두 가지를 마음에 새긴다면 우리는 완전히 다른 실재관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부활절을 맞이할 때마다 마가복음의 마지막 구절에 나타난 ‘정신이 아득해지고 입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두려워 떠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될 것이다.”

또한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묵시적인 사건입니다. 종말론적 의미를 갖는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통치와 권력, 이것은 예수님 당시 빌라도 총독, 로마 황제, 헤롯 왕, 그리고 그들의 배후에 있는 부패한 종교 기득권 세력을 해체하는 사건입니다. 메시아에 의해, 마지막 종말의 때에 멸망당하고 말 세력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악한 권력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를 질문합니다. 따라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하나님의 정의와 억압 받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편파성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마침내 그 십자가의 모진 수난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은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고전 15:9-11)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박해자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박해하는 이가 예수님을 전하는 이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박해자, 핍박자의 자리에서 박해받는 사람, 핍박 받는 사람들의 자리로 내려갑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십자가의 자리에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아침을 맞이합니다.

오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 부활의 기쁨을 깨닫고,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가 헛되지 아니함을 깨닫고, 분열이 아니라 하나됨으로,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으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기쁜 소식의 증거자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 바울의 사상은 김재성, 『바울신학』 (한신대출판부, 2014)
부활에 관한 내용은 김선용, 「신약성서가 말하는 부활」, 『기독교사상』 724호, 2019년 4월호 참조.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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