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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결승선이 아닌 이정표”살며 묵상하며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19.04.22 19:30
16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서, 예수께서 일러주신 산에 이르렀다. 17 그들은 예수를 뵙고, 절을 하였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8 예수께서 다가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태복음 28:16~20 새번역)

장과 절을 모르고 본다면, 부활 이후 재회한 장면인줄 알 수 있을까?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 제자들을 가르치신 어느 평범한 날처럼 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난 놀라움과 감격, 대속사역을 완성한 기쁨의 승전가… 그 비슷한 분위기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조차 부활에 대해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 이전과 다르지 않게 하나님 주신 사명을 가르치시고 전해주실 뿐입니다. 주님께는 십자가 이전과 부활 이후가 한결 같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사는 것일 뿐입니다.

제자들의 침묵은 죄책감을 떠오르게 합니다. 함께 죽으러 가자고 외쳤던 결의는 산산이 무너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아무 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살아나신 주님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만남 이후, 결국 주님의 길을 따라갔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아는 자로서 살고 죽었습니다.

▲ Mike Torevell, “Road To Emmaus” ⓒGetty Image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오늘의 부활절은 어떤 모습입니까? 특별연합예배를 하고, 웅장한 칸타타를 합니다. 승전가를 울리고 부활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정말 기쁩니까? 오히려 제자들보다 더 무거운 마음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수없이 부활절예배를 드리고 승리를 노래하면서 그에 합당한 열매가 가물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죽음을 아는 사람답게 사는 이가 드뭅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죽어만 갑니다. 부활도 믿는다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답게 사는 이가 드뭅니다. 부활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죽어만 갑니다. 부활을 아는 자로 살고 죽지 못합니다. 정말 부활하신 주님 앞이라면 죄책감에 부끄러워야 자연스럽습니다.

부활의 기쁨을 선포하고 노래하는 중심에는 대속의 은총이 빠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어떻습니까? 너희의 죄, 그 피 값을 다 치러줬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것을 의심하지 말고 믿어서 죽어서 천국에 꼭 가라… 뭐 이런 비슷한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나의 영생, 나의 속죄, 나, 나, 나에 대한 관심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 제자를 삼아 가르침을 지키게 하라는 사명뿐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도, 누구에게 주시는 약속입니까? 십자가를 지는 제자로 살아가고 죽어가는 삶을 향한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의 마지막 28장에서 부활은 무엇입니까? 대속, 영생 등에 대한 욕망을 내려놓고 날 것 그대로 보면 무엇으로 보입니까? 부활은 갈릴리로 제자들을 부르시는 초청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도 막을 수 없는 갈릴리에서의 사역으로 다시 부르십니다. 갈릴리에서 시작한 하나님 나라 사역을 온 세상에 퍼뜨리라는 파송입니다. 부활은 이 땅에서 제자로 살고 제자를 길러내라는 사명을 향합니다. 제자로 살고 죽는 길, 하나님 나라의 삶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길을 선명하게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결승선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길, 제자의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입니다. 이정표라고 볼 때, 28장에서 부활은 제자리를 찾습니다.

부활이 내세의 천국을 가리키는 이정표라면, 죽은 이후 어느 날까지 그저 하늘만 가리키는 화살표일 뿐입니다. 교회가 하늘 가리키는 이정표를 보고 하늘만 보고 서있는 것이 아닙니까. 부활은 분명 진리와 생명의 길이신 주님의 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당장 여기에서 해야 할 일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빈 무덤을 뒤로 하고, 부활을 뒤로 하고 갈릴리로 가십니다. 제자들도 십자가의 길로 보내십니다. 그럼에도 이정표를 결승선처럼 바라만 보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부활이라는 이정표는 영원히 살려는 욕망보다 십자가의 길을 따르려는 소망에게 기쁨입니다. 그 누구보다 지금 여기에서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려는 목마름에게 부활은 시원한 생명수가 됩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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