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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 속에서 만난 임재”살며 묵상하며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19.04.25 17:19
45 낮 열두 시부터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46 세 시쯤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47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몇이 이 말을 듣고서 말하였다.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르고 있다.” 48 그러자 그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셔서, 갈대에 꿰어, 그에게 마시게 하였다. 49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어디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하여 주나 두고 보자” 하고 말하였다. 50 예수께서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셨다.(마태복음 27:45~50/새번역)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마태복음도, 마가복음도 이 물음과 큰 외침으로 숨을 거두시는 주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의 반문, 왜 버리십니까? 이 반문 자체가 기독교 역사 속에서 불편한 의문을 남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왜 이것을 물어보시며 돌아가셨을까?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가르치시던 분이 아닌가. 왜인지 그 이유를 정말 모르셨던 것일까? 아니면 모르는 척하신 것일까?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만 같은 인간 실존에 대한 표현이셨을까?

어떤 의미로 물어보신 것이냐는 물음은 다양한 신학적 논의의 원천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물음과 논의 자체가 침묵하게 되는 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절규하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선 사람들, 혹은 서봤던 사람들, 그들에게 이 물음은 실존입니다. 이 물음을 앞에서 억장이 무너져 내립니다. 억울하게 잔혹한 폭력에 희생된 수많은 이들, 그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살아남은 이들에게 이 물음은 의문문이 아닙니다. 한걸음 떨어져 토론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닙니다. 물음의 모습을 한 절규이자, 신음입니다.

▲ 데미언 허스트, “부활”(1998~2003), 런던, 개인소장 ⓒGetty Image

어떤 탁월한 신학적 답변도 대답이 될 수 없습니다. ‘네 마음 이해해.’ ‘하나님 뜻이 있을 거야.’ ‘이 일을 통해 하나님 더욱 선한 일을 이루실거야.’ … 그 어떤 말도 공허한 울림이거나 잔인한 폭력이 되고 맙니다. 부활하여 천국에서 다시 만날 거야, 만병통치약처럼 쓰이는 부활과 천국 역시 별 소용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어떤 선한 의도를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절규를 너무 빨리 지우려 하는 게 아닐까요? 울음을 그치게, 아픔을 잊게 하려고 합니다. 선한 의도라 해도 이런 태도는 아픔과 눈물에 대한 억압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마음속으로 되놰 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되뇌고 되뇌다 주님을 만납니다. 처참하게 버림받았다 느꼈던 소외, 하나님조차 보이지 않던 어둠 속에서 어쩌면 하나님이 가장 원망스러웠던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먼저 와 계십니다. 아무 말 할 수 없지만, 아무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한 마디로 주님을 끌어안습니다. 주님과 함께 웁니다. 가슴 속 깊이 눌러놨던 눈물이, 신음이, 절규가 그날처럼 다시 터져 나옵니다. 어디에 계시는 것이냐고 몸부림치던 하나님의 부재 속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대답해 달라고 애원하던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주님 품에 안깁니다. 하나님의 부재 속에서 만난 임재입니다.

너무 급하게 부활로 넘어가려 하면 부활조차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너무 멋진 설명으로 아픔을 밀어내려 해도 역시 공허할 뿐입니다. 이제 그만 좀 슬퍼하라는 말, 너무나 가혹한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께서 우리의 비참한 실존에 동참하셨듯이, 함께 머무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절규 속에 함께 계셨듯이 무력함 속에 함께 머물 수 있습니다. 얼마나 함께 머물고, 얼마나 함께 울었나에 충분함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고통스러운 실존 속에 주님과 함께 머무름 자체가 다시 일어날 힘을 잉태합니다. 부활이 드러나지 않은 자리에 남겨진 이들과 함께 기다릴 이유입니다. 부활을 마음껏 기뻐할 수 없는 이들과 함께 하나님의 부재를 끌어안는 이유입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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